미·북한 ‘경수로 꿍꿍이’
  • 卞昌燮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5.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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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 “타결 급할 것 없다”… 북한은 정치 카드로, 미국은 핵 동결용으로 활용
지난해 10월 하순 미국과 북한이 제네바에서 핵문제를 극적으로 타결한 뒤 최근까지 사태의 흐름을 살펴보면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그것은, 북한이 경수로 문제를 단순히 전력 공급 차원에서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정치 카드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북한은 경수로 카드를 최대한 활용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문제와 수교 등을 포함해 미국과 얽힌 현안을 모두 풀려고 한다는 점이다.

북한이 진짜 전력난으로 고통 받고 있다면 굳이 오랜 시일과 엄청난 돈이 드는 경수로 건설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 오히려 10년씩 걸리는 경수로 건설에 비해 공사 기간도 훨씬 짧고 북한에 풍부하게 매장된 석탄을 연료로 사용할 수 있는 화력 발전소를 짓는 편이 훨씬 낫다. 그런데도 굳이 경수로를 고집하는 까닭은, 경수로 카드를 정치적 무기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미국은 북한이 경수로를 정치 카드로 활용해 왔음을 잘 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북한에 질질 끌려간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서울의 한 서방 외교관은 “약한 사람일수록 자존심이 강한 법이다. 북한이 현재 취약한 협상 입지에 있기 때문에 궁지로 몰아넣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강자일수록 약자를 포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국익을 철저히 챙기는 미국이 단순히 북한을 포용하는 차원에서 경수로 문제를 끌고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북한 핵 협상이 파행을 거듭하면서도 현상 유지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미국의 국익이 아직은 손상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북한 핵 문제를 한반도 문제가 아닌 세계적인 핵확산방지 차원에서 다루어 왔다. 따라서 북한 핵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도 지극히 실용적이다. ‘부러지지 않았으면 고치려 하지 말라’는 미국 속담대로, 미국 정부는 국익이 손상 받지 않는 한 북한 핵 정책과 관련해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북한 핵 정책의 핵심은, 북한이 핵 동결 약속을 준수하고 핵확산방지조약(NPT)에 남아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난번 제네바 합의를 미국이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도 북한으로부터 이 부분을 보장 받았기 때문이다.

갈루치 대사의 충격 발언

북한 핵 문제를 보는 미국의 이같은 시각은 그동안 고위 관리들의 입을 통해 거듭 확인됐다. 미국이 경수로 공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과 고위급 정치 회담을 준비하는 가운데 4월27일 갈루치 핵담당 대사가 한 발언은 충격적이다. 로이터 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갈루치 대사는 민주당전국여성클럽(WNDC)이 주최한 연설에서 “북한이 핵 동결을 계속 유지하는 한 약 40억달러가 드는 경수로 건설 계획을 북한에 강요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현재 북한이 핵 동결 약속을 지키고 있는 상황을 미국이 즉각적으로 파기해서도 안된다”고 덧붙였다. 그의 발언은 어떻게 된 일인지 국내 신문이나 방송에는 보도되지 않았다.

놀랍게도 갈루치 대사의 말에는, 북한이 핵 동결 약속을 지키는 한 현재 교착 상태에 빠진 경수로 문제가 장기화하더라도 크게 걱정할 것이 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 즉 미국이 볼 때 1차적 과제는 북한의 핵 동결 준수이지 경수로 문제 해결이 아니라는 점이다. 게다가 경수로 건설에 드는 40억달러의 대부분을 한국이 부담하도록 돼 있기 때문에 미국은 그다지 걱정할 것도 없다.

이같은 미국의 시각과 맞물려 최근 북한이 취하는 태도 역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최근 한 국내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북한은 경수로 공급 협정 체결이 차질을 빚어 원전 건설이 늦어질 경우에 대비해 미국 기업의 도움을 받아 대규모 화력발전소 단지 건설을 협의해 왔다는 것이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상황은 좀더 분명해진다. 즉 북한은 화력발전소를 건설해 전력난을 해소하는 한편 경수로 문제를 정치 카드로 활용해 협상 입지를 더욱 강화할 수 있게 된다.

이 보도에 따르면, 북한 대외경제위원회 김정우 부위원장은 미국의 발전설비 회사인 스탠턴그룹과 함경북도 은덕군 탄광지역에 20만kW 용량의 화력발전소 10개를 건설하는 방안을 타진했다는 것이다. 이 정도 용량의 발전 규모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경수로 공급을 통해 제공할 예정인 2백만kW급과 같다.

국내 한 신문은 4월15일자에서 스탠턴그룹이 5월부터 나진·선봉 지역에 정유공장(현재 휴업중)을 재가동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스탠턴그룹이 유럽에서 원유를 도입해 이를 북한에서 정제한 뒤 전량을 국제 석유 메이저에 수출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한편 이 회사의 찰스 워든 부사장은 지난 3월 말 서울을 방문해 정부 고위 당국자들과 재계 인사들을 만나 경수로 문제에 관해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시사저널> 제288호 커버 스토리 참조).
북한과 활발하게 접촉해온 스탠턴그룹은 어떤 회사인가. <시사저널>이 최근 입수한 공식 자료에 따르면, 이 회사는 지난해 10월 하순 제네바 합의문이 나온 직후 북한의 요청에 따라 회사 간부진을 평양에 파견했다. 이들은 1주일 동안 평양에 머무르면서 북한 책임자들과 깊이 논의했으며, 북한의 동북부 지역을 방문해 전력·정유 산업 및 항구 시설에 대한 현장 답사까지 마쳤다. 스탠턴그룹이 특히 관심을 보인 부문은 전력 생산·원유 정제·산업 개발 세 분야인 것으로 알려졌다. 스탠턴그룹은 보스턴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파워매스, 파뇔그룹, 파뇔경제개발사 등 3개 계열사와 드렉셀 대학 부설 국제공학경영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또 이와는 별도로 스탠턴그룹 경영팀을 가지고 있다.

스탠턴그룹은 특히 석유·가스·석탄과 같은 재래식 연료를 쓰는 발전소 건설에 관심이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회사는 현재 캐나다, 멕시코, 폴란드를 포함한 동유럽권, 나아가 동북아시아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특히 동북아시아 지역의 경우 유엔개발계획(UNDP) 주관 아래 추진돼온 두만강개발계획에 참여하면서 북한의 전력 시설 공급에도 큰 관심을 보여왔다.

스탠턴그룹, 북한기업과 합작 투자 추진

스탠턴그룹이 세운 나진·선봉 지역 개발계획을 보면, 우선 현재 휴업중인 20만kW급 발전소를 재가동해 이 지역에 전력을 공급한다는 것이다. 둘째, 해외에서 원유를 수입해 이를 정제한 뒤 전량 해외에 수출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정제된 원유는 일절 북한으로 반입하지 않는다. 셋째, 나진·선봉 지역 내의 자유경제무역지대에 제조업 투자를 촉진해 수출을 늘린다는 방침이다. 세 분야 모두에서 스탠턴그룹은 북한 기업과 합작 투자 형태로 사업을 진행하게 된다.

스탠턴그룹의 자료에 따르면, 북한은 좀더 개방적인 경제 체제로 움직여가는 데 미국 기업의 도움을 선호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회사로 스탠턴그룹을 택했다고 한다. 지난 1월 이 회사의 스티븐 브라운 사장이 미국 상원 에너지위원회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스탠턴그룹은(제네바 합의 ) 뒤 북한과 거래한 최초의 미국 기업으로, 그동안 미국 정부와 주기적으로 협의하며 북한 진출을 꾀해 왔다. 또한 미국 재무부에 북한과 거래할 수 있는 특별 허가를 신청해 놓았다.

현재 미국 기업 가운데 스탠턴그룹이 가장 정력적으로 북한과 접촉하고 있지만 그 성패는 경수로 회담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다. 곧 재개될 미·북한 고위급 정치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돼 경수로 공급 체결이 성사되면 평양에 미국 연락사무소가 설치될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스탠턴그룹을 비롯한 다른 미국 기업들도 본격적인 진출 채비를 서두를 것이 뻔하다. 그러나 경수로 문제를 정치 카드로 삼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미국 정부나 기업의 말을 호락호락 들어줄지 의문이다. 북한 핵 사정에 밝은 외교안보연구원 윤덕민 교수는 “북한은 앞으로 10년 동안 경수로 카드를 충분히 활용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으려 할 것이다”라고 진단한다. 경수로 카드는 북한에게 사실상 핵무기와 맞먹는 정치적 지렛대 효과를 가져다 주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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