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지야 대통령 뒤에 ‘빅 브라더’ 있었네
  • 모스크바·정다원 통신원 ()
  • 승인 2004.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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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카프카스에 자리잡은 그루지야. 인구 4백40만인 이 작은 나라에서 유럽 최연소 대통령이 탄생했다. 올해 서른여섯 살 난 미하일 사카쉬빌리. 그는 지난해 11월 무혈 시민 혁명을 주도해, ‘은빛 여우’라는 별명이 붙은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76) 전 대통령을 몰아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인물이다.

사카쉬빌리는 친서방, 특히 친미 성향 인물이다. 우크라이나 키예프 국제관계대학에서 국제법을 전공한 그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잠깐 국제법을 연구하다가,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정부는 지난해 11월 그루지야 시민혁명의 숨가쁜 국면에서 사카쉬빌리에게 은밀히 돈과 장비를 지원했고, 이번 대선 때에도 5백만 달러라는 뭉칫돈을 내놓았다. 그것도 모자라 미국은 아예 사카쉬빌리의 선거 전략을 짜주고 외풍까지 막아주는 등 아낌없이 후원했다.

사카쉬빌리의 정치 입문을 도운 후견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이 몰아낸 셰바르드나제 전 대통령이었다. 1990년대 초반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은 미국 방문길에 오른 적이 있는데, 당시 동행했던 주라브 쥐바니(당시 국회의장)가 미국에 체류하던 사카쉬빌리를 대통령에게 소개하면서 정계에 입문할 길이 활짝 트였던 것이다. 1995년 국회 법사위원회 의장에 선출된 사카쉬빌리를 셰바르드나제는 법무장관에 임명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가, 당시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체제 변신을 꾀하기 시작한 그루지야의 개혁을 이끌기에 적격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법무장관 사카쉬빌리는 ‘사적 자치’라는 자본주의 원칙에 입각해 꼼꼼하게 법안을 마련했고, 이를 국회에 상정해 통과시키려 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사태가 벌어졌다. 바로 자신의 정치적 대부인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이 법안에 반대하며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다. 셰바르드나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사카쉬빌리를 법무장관 자리에서 내쫓았다.

해임된 직후 사카쉬빌리는 셰바르드나제 측근과 가족의 부정 부패를 폭로했다. 셰바르드나제가 국유 재산을 사유화해 독점하는 데 새 법안이 걸림돌이 되자 이를 거부하고 자신을 몰아냈다는 것이다. 사카쉬빌리는 셰바르드나제 정권과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웠다. 셰바르드나제를 맹신하는 측근들을 ‘네오 볼셰비즘’이라고 비난하며 구세력 퇴진운동에 불을 붙인 것이다.
사카쉬빌리는 국민운동당을 결성해 반정부 운동의 선봉에 서서,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했다. 그루지야의 ‘철의 여인’이라고 소문 난 니노 부르자나제(현 임시정부 대통령)를 끌어들였고, 녹색당 당수인 주라부 쥐바니(현 국무장관)와도 손잡았다.

정치적 운명을 가른 일련의 사태는 지난해 11월 발생했다. 이 무렵 대통령 비리를 둘러싼 양측의 공방은 국회의원 선거로 이어졌다. 사카쉬빌리를 비롯한 ‘혁명 3인’은 선거 구도를 대통령 비리 심판으로 몰아갔다. 미국의 재정 지원과 러시아의 암묵적 동의를 등에 업고, 열광하는 시민들과 함께 대대적인 시위를 벌인 것도 이때다. 전국적인 군중 집회가 일어난 지 7일 만에 셰바르드나제 정권은 무너졌다.
그리고 지난 1월4일 치른 대통령 선거에서 사카쉬빌리는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적인 표차로 따돌리고 대권을 잡았다. 그는 개표 초반 90% 이상의 지지율을 얻기도 했다.

이제 막 취임한 젊은 대통령 앞날에는 과제가 산적해 있다. 당선 확정 직후 사카쉬빌리는 5대 국정 목표를 제시했다. △부패 척결 △경제 재건 △분리 운동 봉쇄 및 자치공화국 재통합 △미국 및 서방과의 관계 증진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이 그것이다. 그가 제시한 다섯 가지 현안은 그루지야 문제의 심각성을 압축하고 있다.

한달 30 달러로 연명하는 4백40만 국민의 궁핍한 생활, 해이해진 공직 사회의 기강과 부정부패 만연, 엄청난 빈부 격차, 종족·인종·종교·지역 등에 기인한 각종 분리 독립 움직임, 무너진 경제. 이 모든 것이 사카쉬빌리가 풀어야 할 난제이다. 나아가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 몇몇 자치 공화국 지도자들을 설득하는 과제도 남아 있다.

국내 문제 못지 않게 외교 문제 또한 복잡하다. 전문가들은 사카쉬빌리의 대통령 당선은 그루지야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미국과 러시아의 줄다리기를 이용한 외교적 승리라고 논평했다. 즉 그가 양국의 세력 균형 심리를 저울질하며 자신의 선거에 활용했다는 것이다. 한때 사카쉬빌리의 친미 성향을 마뜩치 않게 여겼던 러시아측은 국가안전부 장관을 지낸 이고리 기오르가제를 대선 후보로 내세울 작정이었다. 하지만 니노 부르자나제가 외교적 담판으로 모스크바의 입장을 돌아서게 했다는 후문이다.

미국의 최대 관심은 송유관(바쿠-트빌리시-세이한) 건설이라는 이권에 있다. 올해 말 개통될 이 송유관은 카스피 해 방면 에너지원을 러시아 영토를 우회해 서방으로 빼내는 젖줄 구실을 하게 된다. 원유 수송에서 전제 조건은 두말할 나위 없이 안정된 중앙 집권 정부이다. 그루지야 전역을 장악하고 통치할 수 있으면서도 친미 성향을 가진 정권. 이것이 바로 미국이 사카쉬빌리를 지원하며 머리 속에 그렸던 구상인 셈이다.
러시아는 그루지야를 자기네 영향권 아래 묶어둘 필요성이 있다. 그루지야가 러시아의 카프카스 전략에서 중요한 지리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발칸·동유럽에 이어 카프카스 및 중앙아시아로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미국과 서방 세력을 차단하는 데 그루지야의 역할은 자못 중요하다.

사카쉬빌리로서도 러시아를 멀리할 수 없다. 그루지야에 대한 모스크바의 영향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그루지야에서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압하스·남(南)오세티야·아자리야 자치 공화국 지도자들은 모두 크렘린의 의사를 따르고 존중한다.

이번 대선 과정을 통해서 사카쉬빌리의 외교 노선은 분명하게 밝혀졌다. 그는 미국·유럽 등 서방 자본을 끌어들여 와해된 경제를 회생시킬 것이며, 크렘린과 백악관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면서 정권의 안위를 도모하고 분열된 조국을 통일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1월25일 미하일 사카쉬빌리는 대통령 취임식을 가졌다. 이 날은 공교롭게도 사카쉬빌리에게 쫓겨난 셰바르드나제 전 대통령의 76회 생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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