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 대규모 감축은 없다”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3.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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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 핵심 당국자 ‘공감대’ 형성돼…한국이 감축 수용하면 미국도 피곤
전투병 파병을 압박해 오던 미국의 공세가 일단 주춤해졌다. 가급적이면 한국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한 태도까지 엿보인다. 미국의 저명한 군사 전문 기자 리처드 할로란이 <워싱턴 타임스> 11월24일자에 쓴 글에 대해 미국 국방부가 즉각 해명하고 나선 것이 가장 최근의 사례이다.

할로란 기자는, 한국 정부가 사단급 전투병을 이라크에 파견해 달라는 미국의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에 주한미군 병력 일부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배치하는 등 주한미군의 구조를 대대적으로 개편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미국 국방부가 즉시 그런 사실이 없다며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지난 11월25일 부시 대통령은 ‘해외 주둔 미군 재배치 검토’(GPR)를 공식 선언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나종일 국가안보보좌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라이스 보좌관이 전화를 통해 “한국은 올해 초부터 미국과 주한미군 재배치를 위한 미래 한·미 동맹구상 회의(FOTA)를 여러 차례 해왔기 때문에 추가 협의를 할 필요가 없다”라고 사전에 알려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상대방의 눈치를 보지 않고 거칠게 행동해온 부시 행정부가 갑자기 정중한 태도로 나오는 이유가 뭘까. 파병 문제를 직접 다루어온 정부 고위 당국자는 “바깥에서 보는 것과 달리 한·미 핵심 당국자들 간에는 벌써부터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돼 왔다. 할로란 기자의 주장은 핵심부의 동향이 아니라 태평양사령부 수준의 견해일 뿐이다”라고 일축했다.

정부 일각에서는 주한미군 감축 문제에 대해 이미 한·미 정부 간에 일정한 합의가 있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지난 10월18일 AP통신이 ‘주한미군 3분의 1 감축 가능성’을 보도한 직후 한·미 실무 협의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내년 여름까지 이 사안을 거론하지 않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더 본질적인 데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럼스펠드 장관의 방한을 계기로 미국측이 노무현 정부의 태도가 예사롭지 않다는 점을 파악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다. 즉 현재 한국 사회와 노무현 정부가 주한미군감축설만 꺼내도 주가가 폭락하고 정부 사절단을 월 스트리트에 파견하던 올해 초 같은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일단 조심스러운 입장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미국측은 럼스펠드 방한 직전 예전과 비슷한 행태로 밀고 나왔다. 미국 행정부가 은연중에 ‘전투병 5천명 파병 요구안’을 미국 언론과 한국 내 친미 인사 그리고 보수 언론 등에 흘리고, 이들이 다양한 방식의 언론 플레이를 통해 이를 기정 사실화하는 순서를 보였다. 그러나 비전투병 3천명을 보내겠다는 한국 정부의 파병안은 거의 요지부동이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보수 언론이나 일부 친미 인사들은 자기들이 마구 흔들어대면 정부가 흔들릴 것으로 생각했겠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아무리 미국의 요구라 해도 우리가 수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라고 잘라 말했다.

일부 언론은 외교 안보 라인을 자주파와 한미동맹파로 분류하고, 자주파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때문에 한·미 간에 분란이 발생하는 것처럼 몰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이분법은 김영삼 정부 시절처럼 외교 안보 부처들이 각개 약진하던 때에나 가능한 시각이다. 참여정부에서는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주관해 외교·안보 관련 부처 실무자들이 모여 단일한 정부안을 도출하도록 되어 있다. 이같은 정책 결정 체제 바깥에 있는 인사들이 개인 의견을 마치 정부 입장인 것처럼 언론에 흘려 정부 내에서 혼선을 빚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 결과는 언론의 오보 행진으로 나타났다.

자주파·한미동맹파 논쟁의 또 다른 오류는, 파병안이 몇몇 자주파로 분류된 실무 인사들을 넘어선 수준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도 드러난다. 한국측 파병안에는 국정 최고책임자인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 관계 및 주한미군 문제 등에 대한 나름의 소신이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같은 사실을 한국 내 일부 친미·보수 진영이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 초 주한미군 문제로 인해 몇 차례 곤욕을 치른 노대통령은 그동안 미군이 감축 또는 철수할 경우를 놓고 다양한 대비책을 강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15 경축사에서 있었던 자주국방 선언은 바로 그런 고민의 결정체 가운데 하나이다. 노대통령은 한마디로 ‘한·미 관계는 존중한다. 그러나 미국의 부당한 압력은 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밝힌 것이다. 미국이 주한미군을 감축하겠다고 하니 한국으로서는 자주 국방을 통해 그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주한미군 일부, 북한 진주→중국 견제’ 구상도

미국으로서도 주한미군 감축 얘기를 꺼내는 순간 한국 정부가 ‘유감이지만 동맹국의 뜻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며 주한미군 감축을 받아들이는 경우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한국이 주한미군 감축을 선뜻 수용하면 미국은 여러 가지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대전제는 주한미군은 감축해도 주일미군은 유지한다는 것인데, 자칫하면 주일미군까지 철수해 결국 동아시아를 떠나게 되는 일까지 발생할 수 있다.

원래 주한미군 철수는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관계 정상화를 염두에 둔 시나리오였다. 여기에는 미군의 일부 병력을 북한에 진주시켜 중국을 직접 견제할 수도 있다는 구상이 담겨 있다. 그러나 핵 문제 때문에 시나리오 상태로 남아 있다.

상황을 종합하면 지금 당장은 주한미군을 대규모로 감축하기가 어렵다. 만약 주한미군을 이라크에 파병한다 해도 상황을 주시하며 특정 부대 단위보다는 자원자 위주로 편성한 소규모 병력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또한 주한미군보다는 하와이 주둔 4사단과 25사단 등 유사시 증원되는 예비 부대가 1차 파병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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