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그루지야, 루마니아 전철 밟는가
  • 모스크바/정다원 (dwj@sisapress.com)
  • 승인 2003.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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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혈 혁명 성공했어도 그루지야 갈 길은 멀다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그루지야 대통령이 선거 부정 시비에 휘말려 마침내 11월23일(한국 시각) 권좌에서 쫓겨났다. 야당 지도자들이 셰바르드나제 대통령 퇴진을 외치며 거리 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선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벌어진 극적인 결과이다. 군 병력은 출동 준비를 마치고 명령이 내려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듯 폭발 전야의 혼미한 정국은 그루지야의 복잡한 국내 사정과 맞물려 머지 않아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대통령이 사임한다고 해도 당분간 정국은 안정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사태는 신구 세대간 권력 투쟁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니노 부르자나제 국회의장(민주당 당수), 미하일 사카쉬빌리 국민운동당 당수, 주라부 쥐바니 녹색당 당수 등 신세대 정치인들이 셰바르드나제 대통령과 그 추종 세력인 구세대 정치인들의 퇴진을 주도했다. 이들 중 부르자네제는 셰바르드나제의 퇴진과 동시에 임시 수반이 됐다. 사카쉬빌리와 쥐바니는 ‘크마라’ 대학생 연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그루지야 시민 연합’을 결성하고 셰바르드나제의 거대 여당과 투쟁해왔다.

시민연합은 대통령 친인척들의 호화 별장 소유, 딸의 영화사·방송사 지배, 사위의 ‘마그티’ 통신 회사 인수 등과 연관된 일련의 비리를 폭로하며 대통령 주변이 온통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은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현재 상황은 결코 묵과할 수 없다. 내전이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라고 강수를 내놓았다.

사카쉬빌리에 대한 대중의 인기와 국민적 지지는 상당하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국제법을 전공한 그는 1995년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한때 내무장관을 지냈다. 그는 “우리는 미래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셰바르드나제가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운명과 똑같은 전철을 밟을 것이라 단언했다. 그의 이같은 예언은 셰바르드나제의 퇴진으로 적중한 셈이다.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에 대한 국민 감정도 최악이었다. 셰바르드나제는 내무장관 시절 부패 규탄에 나선 군중을 경찰력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진압한 전력 탓에, 잔인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 서방 언론은 “지금 셰바르드나제는 1997년 사형 제도가 폐지된 것을 몹시 애석해 하고 있다”라고 비꼬았다.
5백만 그루지야 국민들은 새로운 정치를 바라고 있다. 1992년 내전의 혼란 속에서 ‘번영, 그루지야 건설’이라는 달콤한 구호로 국민을 현혹해 권력을 잡은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획책하는 데 신물이 났기 때문이다. 집권 초기의 구호와 달리 그루지야 곳곳에는 걸인이 득실거리고 무정부주의가 팽배해 있다. 국민 상당수는 실업 상태이고, 연금 생활자들은 가난에 허덕이며, 많은 시민들이 막노동을 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지원받는 전기나 석유도 끊기기 다반사고, 국제 금융 신용은 바닥이다.

위기를 느낀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은 과거 신임이 두터웠던 부르자나제 국회의장을 내세워 사카쉬빌리·쥐바니와 수 차례 협상을 시도했지만 접점을 찾는 데 실패했다. 사카쉬빌리는 협상 결과에 대해 “시간만 허비했다. 대통령 퇴진 이외에 다른 어떤 대안도 없다”라고 말했고, 부르자나제 또한 “대통령은 어떤 위기 해결 방안도 제시하지 않았다”라고 불만을 토로하며 강경 대응을 시사했다.

막다른 길로 몰리자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은 이번에는 외부에서 탈출구를 찾았다. 우선 그는 견원지간인 아슬란 아바쉬제 압하스 자치공화국 대통령을 찾았다. 그루지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는 아바쉬제 대통령은 독립을 막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던 셰바르드나제 대통령과 대립각을 날카롭게 세워왔다. 그런 아바쉬제가 이번에는 셰바르드나제를 편들었다. 그는 그루지야의 반정부 세력을 권력 붕괴를 획책하는 파시스트와 폭력주의자라고 매도하면서, 모스크바와의 통로 역할을 자임했었다. 양자간 물밑 거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국·러시아도 등돌려

셰바르드나제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크렘린은 셰바르드나제의 외교술에 불만이 많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과거 체첸과 인접한 그루지야 팬키시 계곡에 은거해 투쟁하는 체첸 반군들을 소탕하기 위해 셰바르드나제측에 폭격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그러자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은 크렘린을 견제할 의도로 미국을 끌어들였고, 나아가 유럽과 나토(NATO)에도 접근했다. 현재 러시아는 내정 불간섭 원칙을 내세우며 사태를 관망 중이다.

미국의 지지를 얻어내려는 외교 노력도 계속되어 왔다. 하지만 그루지야 주재 미국대사관 측은 중앙선관위와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에게 선거 결과에 대한 의혹을 불식할 수 있는 발표를 하라고 종용하면서 ‘사태 해결의 열쇠는 크렘린이 쥐고 있다’고 말했다. 그루지야에 대한 워싱턴의 실질적인 관심은 셰바르드나제 정권의 안위가 아니라 송유관(바쿠-트빌리시-세이한) 건설에 있다.

러시아와 미국의 미온적인 반응은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을 점차 벼랑으로 몰아세웠다. 측근들의 동요도 눈에 띌 정도로 늘어 이미 등을 돌린 사람도 있다. 대통령 보좌관인 측근 3인을 사퇴시킨 후 외교 절차를 밟아 망명해야 한다는 주장마저 나오는 실정이다. 지난 11월18일에는 핵심 측근인 국영 방송사 사장이 사임했다. 이때부터 이미 분석가들은 이제 셰바르드나제 정권에 충성하던 경찰·군부·권력 실세들의 결단만 남았다고 말했다.

그루지야 내부 사정은 복잡하기 짝이 없다. 탈중앙 권력을 외치는 압하스, 아드자리, 메그렐리, 구리(셰바르드나제 대통령 고향), 삼쯔헤 등 11개 지역에 대한 그루지야 정부의 통제력은 미약하다. 포도주 주산지인 알라잔스카야 계곡에는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지역 토호들도 있다. 사태가 이들 지역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돌아갈 경우 심각성은 가중될 수 있다. 이번 사태가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의 사임만으로 마무리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루지야 사태는 여타 독립국가 연합 국가들에게도 지대한 관심거리이다. 결코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아제르바이잔도 대통령 선거에 대한 부정 시비가 일어 적지 않은 혼란을 겪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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