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럼스펠드 당신 찍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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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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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방장관, ‘이라크 전후 처리’ 주도권 다투다가 망신살
지난 5월 이후 이라크 전후 처리가 차질을 빚으면서 정치적 곤경에 처한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최근 자신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두 핵심 참모의 갈등 때문에 심기가 몹시 불편하다. 그중 한 사람은 천하가 알아주는 ‘실세’인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71이고, 다른 한 사람은 부시의 총애를 받으며 미국의 대외 정책을 사실상 요리해온 콘돌리사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49)이다.

2001년 1월 부시 행정부 출범과 동시에 입각한 두 사람은 이듬해 9월 사상 유례 없는 테러 사태, 뒤이어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잇달아 치르며 동고동락해온, 둘도 없이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 두 사람이 최근 이라크 전후 처리 문제를 놓고 볼썽사나운 자존심 싸움을 공개적으로 벌인 뒤 냉각 관계에 들어가 워싱턴 외교가의 관심이 뜨겁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2년 반 만에 공개적으로 표출된 두 사람 사이의 대결은 부시 대통령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는 라이스 보좌관의 승리로 끝났다. 이번 사태는 라이스 보좌관이 최근 <뉴욕 타임스>와 가진 회견에서 털어놓은 말 한마디가 도화선이 되었다.

라이스는 지금까지 국방부가 주도해 온 이라크 전후 복구 사업이 효율적이지 못했다며 국방부와는 별도로 백악관 차원에서 ‘이라크 안정화그룹(ISG)’을 발족하겠다고 밝혔다. 그녀는 지난 8월 부시 대통령의 텍사스 별장에서 딕 체니 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이같은 구상을 처음 논의했으며 최근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이에 관한 비밀 메모를 럼스펠드 장관은 물론 조지 테넷 중앙정보국장과 콜린 파월 국무장관에게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라이스의 말대로 ‘이라크 안정화그룹’을 발족한 배경은 단순히 ‘효율성 제고’ 때문만은 아니다. 우선은 국방부가 주도하는 이라크 복구 사업에 대한 백악관의 회의적 기류가 작용했다는 지적이다. 또 다른 요인은 부시의 재선 전략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다. 칼 로브 백악관 선임자문을 비롯한 부시의 핵심 참모진은, 하루가 멀다하고 미군 희생자가 속출하고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되는 상황에서 지금처럼 이라크 난맥상을 국방부 손에 방치할 경우 내년 11월 대선 전략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우려를 표시해 왔다.

이런 맥락에서 이라크 안정화그룹 발족을 자신에 대한 ‘불신임’으로 간주했을 법한 럼스펠드가 발끈한 것은 당연했는지 모른다. 이라크 전후 복구 사업을 ‘럼스펠드의 쇼’로 치장하려던 꿈이 일순간에 깨어진 것이다. 그는 라이스의 발언이 대서특필된 직후 유럽 기자들과 가진 회견에서 그간의 신중한 모습답지 않게 불만을 잔뜩 털어놓았다.

그가 제기한 불만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라크 전후 복구 업무 재편과 관련해 사전 통보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비밀 메모를 작성한 배경에 대해서도 협의한 바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비밀 메모 사전 인지 여부에 관해 한 독일 기자가 끈질기게 추궁하자 럼스펠드는 화를 벌컥내며 “당신은 영어도 모르나? 그녀의 배경 설명회 자리에 내가 없다고 하지 않았소”라며 짜증을 냈다고 한다.

럼스펠드의 노발대발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자 스콧 맥클레린 백악관 대변인은 두 사람 사이의 불화설을 부인하면서도 럼스펠드의 변명성 발언에는 일침을 놓았다. 그가 럼스펠드가 이라크 안정화그룹 문제에 관해 라이스 보좌관으로부터 사전 설명을 들었으며 이에 관한 비밀 메모에 대해서도 설명을 들었다고 밝힌 것이다. 이같은 사실이 공개되자 럼스펠드 장관은 그제서야 “이라크 안정화그룹 문제가 내 부하 선에서 논의된 일은 있다”라며 한 발 빼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평생 직업 관료로 지내며 신중함이 몸에 밴 럼스펠드가 이미 사전 협의가 된 사안을 놓고 노발대발한 까닭은 무엇일까. 정치 분석가들은 그 원인을 럼스펠드의 자존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한다. 럼스펠드는 1957년 의원 보좌관으로 공직에 들어선 이후 국방장관·백악관 비서실장·연방 하원의원·나토 대사 등 수십년 공직 생활을 경험한 백전노장이다. 체니 부통령도 한때는 그의 부하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통령인 부시를 제외하면 행정부 관리 어느 누구도 럼스펠드의 경력과 권세 앞에 몸을 낮출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한 예로 럼스펠드가 나이 30에 연방 하원의원으로 첫 공직 생활을 시작하던 1962년 라이스 안보보좌관의 나이는 여덟 살이었다. 나이로 보나 관록으로 보나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라이스가 자기를 제치고 이라크 전후 복구 사업을 주도하겠다고 나섰으니 럼스펠드의 자존심이 상한 것은 당연했는지 모른다.

백악관의 한 고위 관리는 <월 스트리트 저널>과의 회견에서 ‘결국 이번 일은 럼스펠드의 자존심 때문에 비롯된 문제’라고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일각에서는 국방부가 주도하는 이라크 복구 사업이 갈수록 꼬여가면서 자신의 입지가 취약해지자, 불안감을 느낀 럼스펠드가 라이스는 물론 부시 대통령에게 항의의 표시로 이번 일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문제는 이번 사태를 보는 부시 대통령의 마음이 편치 않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아도 부시 대통령은 최대 현안인 이라크 복구 사업을 비롯해 북한 핵과 이란 핵 개발 의혹에 대한 대처 방법을 놓고 국방부와 유관 부처간 갈등으로 재임 내내 골치를 썩였다. 이런 상황에서 국방부 최고 책임자가 국가안보보좌관 이름을 들먹이며 공개적으로 반발하고 나섰으니 부시의 심사가 뒤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뉴욕 데일리 뉴스> 보도에 따르면, 부시 대통령은 럼스펠드의 처신에 너무도 실망한 나머지 내년 대선에서 재선되더라도 그를 중용하지 않기로 결심을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라이스 보좌관에 대한 부시의 신임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오히려 더욱 두터워진 것 같다. 최근 들어 주요 외교 공식 일정과 관련해 부시가 그녀를 대동하는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에 자주 비치고 있다. 이를 두고 워싱턴 외교가에는, 부시가 내년 선거에서 재선될 경우 2기 내각에 참여하지 않기로 작심한 파월 장관의 후임으로 라이스를 내정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바야흐로 럼스펠드의 화려한 날은 가고 라이스 전성 시대가 도래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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