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 '종합 경기장'이 된 부산 아시안게임
  • 박병출 부산 주재기자 (pbc@e-sisa.co.kr)
  • 승인 2001.09.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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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준비 지지부진…조직위는 OCA에 '봉' 노릇
제15회 아시안게임이 9월29일로 'D-365'를 맞는다. 개최지 부산시는 지난 9월8일부터 부산전시컨벤션센터(BEXCO)에서 프레대회를 열고 있고, 16일에는 아시안게임 주경기장 개장식을 갖고 축제 분위기 조성을 위한 '불 지피기'에 들어갔다.


부산에서는 11월27일부터 5일간 월드컵 축구 본선 조추첨 행사도 열린다. 조추첨에는 국제축구연맹(FIFA) 조셉 블레터 회장 등 3백여 명, 한·일 양국 월드컵조직위원회 관계자, 각국 대표, 보도진 등 4천여 명이 참석한다. 부산이 세계 축구의 '임시 수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개항 이래 최대의 국제 잔치를 치르는 부산시의 표정은 밝지 않다. 아시안게임 준비가 지지부진해 이러다가 대회를 열 수 있겠느냐는 극단적인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아시안게임조직위원회(조직위)가 그동안 김운용 위원장과 안상영 부위원장(부산시장), 우병택 집행위원장 간의 '삼각 갈등'과 한기복 사무총장의 일방적 사퇴 등으로 내홍을 겪은 데다, 상당수 경기장의 착공이 지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한 달 동안 조직위와 부산시를 상대로 특별 감사를 벌인 감사원은 최근 조직위에 무려 65건에 달하는 지적 사항을 통보했다. 감사 결과에 따르면, 조직위는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선수 도핑검사 장비 구입비 2백60억원을 예산에 편성하지 않았으며, 선수촌 운영비는 3백41억원이나 뻥튀기 편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길이 3.3㎞인 경기장 진입로 공사를 맡은 부산교통공단은 배정된 지하철 공사비 1백5억원 중 60억 원을 다른 데 써버린 것으로 드러났다. 부산시가 출자해 설립한 (주)부산관광개발은 민간 주주사인 코오롱건설이 AG 골프장 공사를 낙찰받자 당초 입찰 내용에 들어 있던 조경·조명 등 일부 공사를 빼고 계약을 맺어 46억원의 공돈을 넘겨주었다는 지적을 받았다. 부산시가 최대 주주(지분 48%)인 (주)부산관광개발은 경영권을 민간 투자사에 넘겨주고 채무 보증액만 전액 떠맡는 등 '이상한 경영'을 해 의혹을 샀다.


대회 끝난 뒤 경기장 준공할 판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경기장을 일정대로 짓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승마장과 조정·카누 경기장이 골칫덩어리이다. 승마장은 아시안게임 이후 경마장으로 전환하려는 부산시와 경남도가 밥그릇 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부지를 선정하는 데 6년을 허비하고 지난 8월 말에야 착공했다. 그나마 부지에 연약 지반이 많아 일반적인 공법으로는 2년 가까운 공사 기간이 필요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부실 시공을 눈감아 주지 않으면, 대회 1년 후에나 준공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조정·카누 경기장은 대회 준비 난맥상을 보여주는 표본 사례이다. 부산시는 1996년 설계를 현상 공모해, 8백40억원을 들여 서낙동강 일원에 13만여 평 규모의 대형 경기장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확정했으나, 2년여 우여곡절 끝에 부산 강서구가 55억원 규모의 경기장을 세우는 것으로 축소했다.


강서구청은 본부동을 제외한 선수동과 정고(艇庫) 등 부속 시설을 컨테이너와 천막 등으로 설계할 정도로 '알뜰 공사'를 벌이다 지난 8월 뒤늦게 난관을 만났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수심조차 제대로 재어 보지 않고 설계를 의뢰했다가, 토사량이 예상의 두 배 가까운 38만6천㎥에 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현장 관계자는 "무리해서 당초 계획대로 9월 중에 준설을 끝내도 강바닥 정리 작업에 2∼3개월이 더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 일대가 문화재보호구역(철새 도래지)이어서 10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공사를 중단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책이 없다. 지반마저 제대로 다지지 않아 부지가 스펀지처럼 물컹거리는 상태에서 9월12일 건축 공사에 들어갔다. 부산시는 대회 준비에 차질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조직위가 아시아올림픽평의회(평의회·OCA)와 굴욕적 이면 계약을 맺은 점도 물의를 빚고 있다. 지난해 평의회가 '부산시가 대회 유치 당시 약속한 발전 기금 3천5백만 달러를 내놓지 않고 있다'며 대회 개최권을 박탈하겠다고 협박하자 조직위는 이른바 '시드니 협정'을 통해 수익 사업 전권을 넘겨주고 평의회의 입을 막았다. 평의회가 선정한 휘장사업체가 파산하자 다시 협상에 나선 조직위는 지난 7월 '쿠웨이트 양해각서'를 체결해 21개 품목의 휘장사업권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최근 조직위가 국내 사업자 선정을 두고 평의회와 마찰을 빚으면서 두 차례의 협약 과정에서 얼마나 '봉' 노릇을 했는지 드러났다. 시드니 협약 당시 평의회는 이행보증금조로 2천만 달러를 요구했는데, 조직위와 부산시가 순순히 조건을 받아들여 지난해 10월 홍콩의 한 은행에 개설한 평의회 계좌에 돈을 입금했다는 것이다. 평의회는 특히 '이 사실이 언론 등을 통해 알려지기만 해도 (발설 책임에 관계없이) 약속 불이행으로 간주해 돈을 인출한다'는 조항을 명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직위는 쿠웨이트 양해각서 체결 과정에서도 국내 휘장사업자를 선정할 때 '평의회 추천, 조직위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조항을 넣어 이중으로 발목을 잡혔다.


조직위 대신 평의회가 휘장사업자 선정


이 바람에 조직위는 최근 평의회측이 국내 휘장사업자로 '부적절한' 업체를 추천했는데도 승인 불가 의사를 밝히지 못한 채 시간을 끌고 있다. 8월20일 조직위에서 사업설명회를 연 이 업체에 대해 담당 부서인 사업2부 간부들은 "신설 회사여서 사업 실적이나 사전 정보가 전혀 없고 사업 계획도 개략적인 수준에 불과해 설명회 내용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조직위가 승인을 거부하지 못하는 것은, 자칫 계약 불이행 시비로 번질 경우 보증금 2천만 달러를 날릴 수도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최근에는 "김위원장이 지난 7월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선거에서 낙선해 영향력이 줄어든 데다 자신에 대한 '흔들기'가 계속되고 있어 물러나야겠다는 심경을 밝혔다"라는 김위원장 측근들의 말이 퍼지면서, 조직위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9월12일 김위원장을 만난 백기문 사무총장이 '사실 무근'이라고 확인하기는 했지만, 조직위 관계자들은 밑에서는 사력을 다하고 있는데 위가 삐걱거려 죽을 맛이라고 불만을 나타냈다. 김위원장은 지난 5월에도 사퇴 의사를 비치며 한동안 업무를 거부해 비난을 받은 바 있다. 1995년 5월 아시안게임 유치 당시 서울올림픽 유치에 버금가는 성과를 올렸다는 칭송을 받았던 부산시와 조직위는 요즘 욕을 너무 많이 먹어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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