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들의 '심상찮은 반란'
  • 김은남·고제규 기자 (ken@e-sisa.co.kr)
  • 승인 2001.0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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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적 관행에 누적된 부란 잇달아 터져… 연세대에서는 실명으로 교수 비판


"대한민국 교수는 현대판 노예주."
불만에 가득찬 대학원생의 발언이 아니다. 비록 한국인은 아니지만 한국의 대학에 한때 몸 담았던 교수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경희대 노어노문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 재직하는 박노자 교수(본명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는, 지난해 11월15일 <한겨레>에 실린 칼럼 '조교들이여, 일어나라'를 통해 대학 사회의 전근대적인 교수·학생 관계를 이렇게 꼬집었다.

박교수의 비유가 과장되었을 수는 있다. 그가 한국적인 '사제 관계'의 전통을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대학원생이 교수 앞에 절대 약자라는 사실만은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최근에는 집단적인 반란 움직임이 나타났다. 지난 1월20일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는 한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 11명이 실명을 내걸고 자기 전공 분야의 특정 교수 ㄱ씨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실명을 내건 11명은 인터넷 학과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자신들의 절박한 처지를 이렇게 호소했다.

'우리나라에서 대학원생이 자기 학과 교수, 그것도 자기 전공 분야의 교수에게 정면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내걸고 반발한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모든 분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중략)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자칫 잘못하면 자신에게 얼마나 큰 불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압니다. 하지만 저희들로서는 다른 어떤 방법도 찾을 수 없었고, 그래서 이런 방법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교수 임용 문제에 연세대 국문과 대학원생 반발

이들이 반란을 도모한 직접적인 계기는 교수 임용 문제였다. 연세대 국문학과는 오는 2월 정년 퇴임하는 한문학 전공 ㄴ교수 후임으로 같은 전공자 1명을 신규 임용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12월 임용 공고가 나갔고, 모두 4명이 여기에 지원했다. 그런데 1월16∼17일 고전문학 분과 교수회의 및 학과 전체 교수회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이번 학기 임용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자 학생들이 즉각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학생들은 이런 결론이 나오게 된 원인 제공자로 ㄱ교수를 지목했다. ㄱ교수가 '심사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지원자 전원이 연세대 출신이다'처럼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들어 나머지 3명의 분과 교수와 대립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이번 임용이 틀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학생들의 상황 인식이었다. 이들은 채용 심사가 학교 전체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유독 국문학과만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은 말이 안되며, 다른 대학 출신이 임용에 지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ㄱ교수가 연대 국문과의 폐쇄성을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논리 비약이라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학과측의 공식 대응이 나온 것은 지난 2월1일이다. 이 날 전체 교수회의를 소집한 연세대 국문과는 학과 입장을 밝히는 성명서를 채택함과 동시에 한문학 인사와 관련된 회의록 일부를 공개하는 이례적인 조처를 단행했다. 여기에는 학생들의 주장과 상반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회의록에 따르면, ㄱ교수는 학생들이 제기한 임용 기피 의혹과 달리 1999년 2학기부터 한문학 교수를 특채로라도 채용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주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번 임용의 경우 고전분과 인사위원회에서 이견이 발생하게 된 최초의 이유는 퇴임을 앞둔 ㄴ교수가 1월16일 '인사 분야를 (애초에 공고한 한문학이 아닌) 시화·비평으로 하자'고 제안했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ㄱ교수와 또 다른 교수 한 사람이 '공고 내용과 다르다' '특정 지원자를 염두에 두었다는 의혹을 살 수 있다'(이번 지원자 가운데 시화·비평 전공자는 2명이었다)며 반발했다는 것이다. 공개된 회의록 내용대로라면 파행 원인 제공자는 ㄱ교수가 아닌 원로 ㄴ교수였던 셈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회의록에 따르면, 다음날 열린 고전문학 분과회의에서 ㄱ교수는 현재 응모자를 대상으로 심사를 다음 학기까지 연장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반해 ㄴ교수와 나머지 두 교수는 이번 학기에 심사를 진행하자는 종래 입장을 고수했다. 이때 이미 ㄴ교수는 시화·비평 부문을 뽑자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지원자 전원을 상대로 심사를 진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학과장 최유찬 교수는 말한다.

그렇다면 ㄱ교수는 자신의 입장이 받아들여졌는데도 무엇 때문에 심사 연기를 제안한 것일까. 그 이유를 ㄱ교수는 함구하고 있다. '개인적인 대응은 일체 하지 않는다는 것이 교수회의의 결론'이라며 그는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학과장인 최교수는 심사 대상 전공 분야에 대한 이견이 좁혀진 뒤에도 ㄱ교수가 시간 제약 및 지원자들의 출신 학교 문제 등을 거론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ㄱ교수가 임용 연기를 주장한 이유가 항상 일관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인사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ㄱ교수가 심사 대상자나 심사 과목·시기에 대해 이견을 제기할 수 있다고 본다"라는 것이 최교수의 말이다.

교수 임용을 둘러싼 시비는 대학원 사회에서 가장 흔하게 불거지는 갈등 가운데 하나이다(45쪽 상자 기사 참조). 이번 연세대 사태를 둘러싸고도 이를 파벌간 대립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있다. 곧 'ㄴ교수가 퇴임 전에 자기 사람을 심어 놓으려고, 모집 분야를 바꿔 가며 채용을 강행하려 한다'는 음모론과 'ㄱ교수가 자기 사람을 끌어오기 위해 ㄴ교수가 퇴임한 이후로 임용을 연기하려 한다'는 또 다른 음모론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셈이다.

흔하지 않은 것은, '과거 같으면 이럴 때 눈치나 보고 있을' 대학원생이 사태에 적극 개입하고 나섰다는 사실이다. 이는 1차적으로 연세대 국문과의 특수한 상황에서 기인한다고 한문학 박사 과정 ㄷ씨는 설명했다.

연세대 국문과는 지난해 내내 '흉흉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마광수 교수의 재임용 문제가 불거지고, 불문학을 전공한 문학 평론가가 국문과 교수로 특채되는 과정에서 교수와 학생 간에 불신이 덧쌓였다. 교수·학생이 장장 5시간에 걸친 간담회를 갖기도 했지만 '모든 일을 절차대로 처리했다'는 교수와 '임용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왜곡되어 있다'는 학생 사이에 인식 차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이렇듯 학생들의 불만이 팽배한 상태에서 이번 사건이 터진 것이다. 진화에 나선 교수회의가 '한문학 인사는 현재 진행 중'이라며 현재 접수된 지원자를 대상으로 한문학 분야 인사를 계속하겠다고 밝혔지만 학생들의 분노가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는 않다.

역설적인 것은, 이번에 문제가 된 ㄱ교수 또한 5년 전 격심한 임용 파동을 겪으며 연세대에 입성했다는 사실이다. ㄱ교수가 연세대 교수 임용에 지원했을 당시 국문과의 현직 교수 몇몇이 전공이 다른 지원자를 내정자로 점찍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건은 시작되었다. 내정 사실을 알게 된 동문·학생은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전국 각지의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연세대 동문 20여 명은 유례 없는 집단 행동을 개시했다. 공정한 인사를 요구하는 성명서에 서명하고, 이를 대학 당국 및 학과에 제출한 것이다.

사진설명 사상 초유의 사태 : 교수 임용 문제와 관련해 연세대 국문과 대학원생(한문학 전공)들이 실명을 내결고 특정 교수를 비판했다.

결과적으로 이 인사는 무산됐고, 동문 교수들은 이를 '골리앗에 맞서 거둔 승리'라고 자평했었다. 그런데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입성한 ㄱ교수가 오늘날 인사 혼탁의 주범으로 몰려 학생들의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이를 두고 5년 전 서명에 동참했던 한 교수는 '개혁 주체'가 '개혁 대상'이 되어 버린 현실을 개탄하기도 했다(최근의 국문과 사태와 관련해서 동문 교수 17명이 '총장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채택했다).

"지난 1년 동안 우리는 교수들이 말을 바꾸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아 왔다. 인사를 계속한다는 정도로는 안된다. 인사 심사 결과를 2월 중에 반드시 발표한다는 확약이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 한문학 전공생 ㄷ씨의 주장이다. 요구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이들은 시민단체와의 연대 투쟁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아니더라도 대학원생들은 조만간 분노를 폭발시킬 출구를 찾아내고야 말았을 것이다"라고 연세대 국문과의 한 교수는 말했다. 이는 비단 이 학과의 특수 상황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대학원 정원은 1990년대 중반에 비해 2배 이상 폭증했는데 강사·교수 수요는 제자리를 맴돌아 대학원생의 불만이 위험 수위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연세대 국문과의 경우 대학원 학생 수가 2백여 명인 데 반해 강사 채용 여력은 교양·전공 과목을 합쳐 30명 남짓하다). 그런 의미에서 "국문과가 겪은 일련의 사태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학교 당국이 져야 한다"라고 연세대 국문과 대학원 학생회장 이대성씨(박사 과정)는 주장한다. 지난해 연세대 국문과 사태가 악화한 데는 교수 임용뿐 아니라 장학금 배분·강사 선정 절차 및 기준 따위 문제도 기폭제가 되었다.

현대문학 분과의 한 교수는 박사 학위 논문 심사 과정에서 한 학생에게 F학점을 주어 학생들의 감정을 악화시켰다(학위 논문 심사에서 받은 F학점은 평생을 따라다닌다. 그만큼 학생에게는 치명적이다). 학부생보다 훨씬 비싼 등록금(학기당 3백만원 상당)을 꼬박꼬박 내는 대학원생이 20∼30명씩 한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받고, 논문 지도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현실을 방치하다가 학생에게만 최종적인 책임을 묻는 것은 학교 당국의 명백한 직무 유기라는 것이 이대성씨의 주장이다.


공부 의욕 잃게 하는 '신 칠거지악'

<모색> 편집장 권경우씨(31)에 따르면, 연세대 국문과 사태는 오늘날 대학원 사회가 공통으로 안고 있는 난맥상의 '축소 집약판'이다. <모색>은 대학원 사회의 새로운 전망을 말 그대로 '모색'하려는 대학원생 7명이 모여 지난 1월 창간한 무크지이다.

대학원 교육이 대중화했음에도 대학원 내부에 여전히 전근대적인 제도와 관행이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데서 대학원 사회의 각종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 권씨의 지적이다. 1990년대 중반 이른바 '대학원 중심'으로 표방되는 교육 개혁 이후 대학원은 급팽창했다. 1990년대 배출된 박사 인력만 6만여 명이다. 그러나 취업 기회는 여전히 제한되어 있고, 취업 부문은 고전적이다. 극단적으로 지난해 서울대 등 전국 21개 대학에서 역사학·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28명 가운데 대학에 자리를 잡은 사람은 단 1명도 없다(48쪽 상자 기사 참조).

지난해 ㄱ대 신문방송학과 대학원에 입학한 이 아무개씨(29)는 수업 첫 시간 전공 교수로부터 '신(新) 칠거지악론'을 듣고 공부할 의욕을 잃었다고 한다. 다른 대학·다른 학과 출신이거나, 돈이 없거나, '백'이 없거나, 국내 박사 출신이거나, 여성이거나, 인문사회 계열이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교수 임용은 하늘의 별 따기라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BK21 도입후 '도제 시스템' 오히려 강화

그럼에도 교수·대학원생 간에 형성된 '도제 시스템'은 여전히 위력적이다. 박노자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의 대학원생은 설거지·화분 물 주기·책상닦이 따위 잡일을 묵묵히 순식간에 해치우는 '하급 노동자'이자, 영문 원서 번역에서 논문 정리·출판사 섭외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일이 없는 '교수의 만능 기기'이다.

1999년 '두뇌 한국(BK21)' 프로그램이 도입된 이후 이같은 도제 시스템이 오히려 강화되었다는 것이 성균관대 대학원 박사 과정 김 아무개씨(27)의 지적이다. BK21은 본래 교수 중심으로 연구를 지원하는 한계에서 벗어나 이른바 '학문 후속 세대'(차세대 연구자)를 지원하려는 프로그램이다. 그렇지만 프로젝트 중심으로 연구비 지원이 이루어지다 보니, 이공계뿐 아니라 인문·사회계까지 프로젝트를 잘 따오는 교수에게 줄을 서는 문화가 유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등록금을 해결할 수 있는 월 40만원(박사 과정 60만원) 연구비는 대학원생들에게 달콤한 유혹일 수밖에 없다. "BK21 사업단에 뽑히면 장학금은 물론 방학 때 단기 연수 명목으로 9박10일 해외 나들이까지 보장된다. 그러니 학생마다 교수 눈에 들기 위해 알아서 기게 된다"라는 것이 ㄱ대 이 아무개씨의 말이다.

오늘날 대학원과 대학 교수에 대한 대학원생들의 불만은 '오작동된 시한 폭탄' 수준이라는 것이 <모색> 편집위원 오창은씨(중앙대 박사 과정·국문학)의 지적이다. 근본적이고 획기적인 '대학원 살리기' 정책이 나오지 않는 이상 시한 폭탄이 언제, 어디서 다시 터질지는 누구도 예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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