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 기지 노동자들이 웃다가 우는 까닭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4.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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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5천여 한국인 직원, 근무 환경 좋지만 40% 감원설에 ‘벌벌’
“한·미 동맹 흔들린다. 주한미군 감축 반대한다.” 지난 6월24일 오후 4시,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만여 명에 달하는 집회 참가자들이 한목소리를 냈다. 집회 열기는 더운 날씨만큼 뜨거웠지만 구호를 외치는 모습이 낯설었다. 어설픈 장면이 빈발했다. 구호나 모양새만 보면 영락없는 보수 단체 집회처럼 보였다.

그런데 참가자들이 쓴 종이 모자에 ‘생존권 보장’이라는 구호가 쓰여 있었다. 주한미군이 떠나면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 바로 주한미군 기지에 근무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이었다. 전국주한미군한국인노동조합 소속 13개 지부 전 조합원이 집단으로 하루 휴가를 내고 상경 투쟁을 벌인 것이다. 참가 인원을 5천여 명으로 예상했던 노동조합 지도부마저 참여 열기에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었다. 모래알이었던 이들을 한데 묶은 것은 실업 공포다. 현재 기지 안에는 주한미군 감축에 따라 ‘40% 감원설’이 퍼지고 있다.

기능직 직원, 수당 포함해 월 7백만원 받기도

현재 주한미군 기지에 근무하는 한국인 노동자는 1만5천2백30명(2003년 12월 기준). 1970년대까지만 해도 4만명을 웃돌았다. 그때에 비하면 숫자는 크게 줄었지만 발언권은 세졌다. “우리가 일손을 놓으면 기지가 안 돌아간다.” 20년째 용산기지에 근무하는 한 한국인 노동자의 말이다. 결코 허풍이 아니다.

실제 기지 안을 들여다보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한국인 노동자들이 주한미군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인 것이다. 생살여탈권은 주한미군이 쥐고 있지만, 그 주한미군도 평균 2년이면 떠나가는 ‘손님’이다. 반면 한국인 노동자들은 대부분 20년 이상 장기 근속한 ‘터주 대감’ 격이다.

멋모르고 주인 행세를 하려다 납작코가 되는 경우가 있다. 1993년 한국 땅을 처음 밟은 한 영관급 장교의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그가 영어 실력을 트집 잡아 한국인 노동자의 직종을 변경하려 하자, 노동조합이 ‘한국에 왔으면 한국말부터 배우라’고 거세게 반발했다. 직종 변경은 물거품이 되었고 이 장교는 노동조합에 사과까지 해야 했다.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한국인 노동자들은 기능직(KWB) 7천6백92명과 사무직(KGS) 7천5백38명으로 나뉜다. 1단계부터 13단계까지 등급이 있고 각 직급마다 차이를 둔다. 13직급의 13단계가 최고 급여를 받는 셈이다. 전국적으로 13단계 노동자는 2003년 기준으로 14명이다. 대부분은 5~7급에 포진해 있다. 5급 기능직 1단계가 월 1백82만원이고, 같은 직급 사무직은 2백3만원 정도. 기능직의 최고 월급은 월 3백80여만원 선이고 사무직 최고 월급은 월 5백70여만원이다. 하지만 기능직은 토요일 근무수당 등 특별수당이 있어 월 7백만원을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실업 급여 타는 것말고 대안 없다”

자녀의 대학 학자금도 보조된다. 지난해 임금협상 결과 올해부터 대학 학자금을 연 5백2만원씩 4년간 지급하게 했다. 자녀를 유학 보낸 한국인 노동자도 많은데, 이들도 학자금 혜택을 받게 했다. 한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은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에서 지급된다.

무엇보다 주한미군 기지가 ‘꿈의 직장’이 된 데는 정년 보장이 큰 몫을 했다. 큰 잘못이 없는 한 60세까지 정년이 보장되고, 최대 63세까지 계약직으로 연장 근무를 할 수 있다.

주한미군측이 한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구조 조정에 들어가면, 해고 순서는 60세 이상의 계약 연장자, 그 다음이 연차가 짧은 순서로 진행된다. 일반 기업체와 달리 경험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6월24일 집회에서 나이 든 연장자보다는 젊은층이 목소리를 높였던 이유다.

목소리는 크지만 이들은 뚜렷한 대안이 없어 고민하고 있다. 서울지부노동조합 남효신 사무장은 “주한미군 감축 협상도 좋지만, 적어도 정부는 한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대책도 논의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속내는 답답하다. 동두천 미군기지에서 16년째 근무하는 한 노동자는 “실업 급여 타는 것말고 대안이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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