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직자들, 동맹 결성해 거리로 나섰다
  • 朴晟濬 기자 ()
  • 승인 1998.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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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자들, 동맹 결성해 거리로… 사회 안정 좌우할 뇌관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한 영세 사업장에서 프레스 기능공으로 일했던 조일영씨는 벌써 보름 넘게 서울 삼선동에 있는 ‘국민승리 21’ 사무실을 드나들고 있다. 아직 미혼인 조씨는 낮에는 인력은행 등 노동부 산하 구직 관련 창구를 돌아다니며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지만, 저녁 나절만 되면 서둘러 국민승리21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조씨는 얼마 전 이 단체가 조직한 ‘실업자 동맹 준비 모임’(준비모임)에 정식 회원으로 입회한 실직자이다.

조씨가 일자리를 잃고 서울로 올라온 때는 지난해 10월 중순이었다. 종업원이라야 모두 12명인 회사가 부도를 내고 사장까지 구속되는 바람에 월급 한푼 받지 못했다. 몇달째 이렇다 할 일자리를 얻지 못한 조씨는 얼마 되지 않는 전세 보증금마저 생활비로 날려 버린 채 현재 거리로 나앉은 상태이다.

생산직·비정규직 출신 중심으로 조직화

밤이 깊으면 어김없이 서울역 노숙자 대열에 합류하는 조씨는 “같은 처지인 사람들끼리 뭉쳐야 산다는 생각에서 준비모임에 참여했다. 앞으로는 직장을 알아보는 틈틈이 실직자 모임이 주최하는 집회나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 우리 요구를 바깥 세상에 알리겠다”라고 밝힌다. 조씨와 비슷한 생각으로 준비모임에 들어간 실직자 20여 명은 5월12일 저녁 국민승리21 사무실에 모여 첫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이들은 앞으로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실업 대책을 토론하고, 소식지를 발간하며, 일정이 잡히는 대로 여러 실직자 집회에도 적극 참여하기로 했다.

지난해 연말부터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실직자들이 ‘모든 실업자에게 실업 급여를! 일자리를! 교육 훈련을!’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집단화·조직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실업 사태 초기에 실직자 대부분은 당장 발등에 떨어진 생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는 데 급급했다. 그러나 당분간 재취업이 어림없다는 현실이 갈수록 분명해짐에 따라, 그들은 구직 창구를 기웃거리는 대신 집단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지난 4월18일 오후 부산에서 열린 실직자 거리 행진 대회는 실직자 스스로가 뭉치고 있음을 전국 최초로 알린 사례로 꼽힌다. 부산·경남 지역 실직자 5백여 명이 참가해 시내를 행진하며 ‘우리는 일하고 싶다’고 외쳤던 이 날 행사는, 부산 새날교회 안하원 목사가 중심이 되고, 부산·경남 지역 시민·사회 단체가 다수 참여한 ‘실직자 거리 행진 준비위원회’가 주최했다. 부산에서 전국 최초의 실직자 거리 행진이 성사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주최측은 ‘전국 최고 수준을 보이는 부산·경남 지역 실업률 탓’이라고 분석한다. 안하원 목사는 특히 “부산 지역 일용직 노동자 80%가 실직 상태이다. 이들이야말로 누구보다 현재의 상황에 실망하여 조직화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한다.

부산의 예에서 보듯 최근 벌어지고 있는 실직자들의 조직화는,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 사무직보다는 생산직 노동자 출신이 중심이다. 비정규직은 근로기준법상 최저 기준인 법정 휴가·수당·퇴직금 등을 받지 못하거나, 사회 보험 적용 대상에서도 제외되기 일쑤여서 실업에 따른 고통이 매우 심각하다. 그만큼 불만도 누적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실직자 조직화의 범위와 속도가 넓고 빨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5월에 접어들면서 이들의 집단화·조직화 움직임이, 노동계의 공동 대응 노력 및 총파업 분위기와 맞물리면서 한층 더 뚜렷해지고 있다. 지난 4월 국민승리21측이 준비모임을 띄워 ‘실업자 동맹’을 결성하겠다고 선언한 데 이어, 5월 들어서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국민승리21의 작업에 적극 가세해 실직자 조직화 작업에 박차를 가할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민주노총측은 이를 위해 곧 ‘실업대책본부’라는 별도 기구를 출범시킬 예정이다.

민주노총측은 5월13일 서울 숭실대 사회복지관에서 모임을 갖고, 실업 대책과 실직자 조직화 문제를 깊이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논의된 실업 대책의 핵심 내용은 실업자 동맹을 중심으로 △고용 안정 및 실업 대책 기금 20조원을 확보하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법정 근로 시간을 현행 주당 44시간에서 40시간으로 줄이며 △일자리 나누기 특별법 제정을 촉구한다는 것이다. 아직 세부 일정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민주노총은 이를 위해 5월 말부터 명동성당 등에 주요 거점을 마련해 농성을 하고, 격주 1회씩 거리 행진을 벌이며, 실업자전국대행진도 치른다는 계획을 논의하고 있다.

민주노총과 함께 노동계를 양분하고 있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역시 실직자 조직화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당초 한국노총의 실업 대책은 민주노총과 달리, 대체로 ‘실업 부조 제도 활성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한국노총은 이미 지난 3월 말부터 실업대책본부를 가동하며, 내부적으로는 각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부당 해고 사례를 수집해 고발하고 실직자 취업을 알선하며, 실업 부조 제도 확충과 고용 보험 제도 수혜 폭 확대를 정부에 요구해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한국노총도 변하고 있다. 김종각 기획위원은 “조직화할 우선 대상자는 노총 산하 조합원으로서 실직한 사람들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실직자 조직을 전국 차원으로 확대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실업자 동맹, 지방으로 확산

전국 조직인 양대 노총이 적극 나섬에 따라 실직자 조직화 움직임은 지방으로 급속히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미 지난 4월 일부 실직자가 한 차례 거리 행진을 감행한 부산 지역 외에, 최근에는 대구·대전 등 여러 대도시 지역에서 실직자 모임을 결성하려는 시도가 잇달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비 도시로서 다른 도시에 비해 비정규직 근로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대전 지역 실직자들은, 민주노총 산하 대전·충남 지역본부 주선으로 최근 1차 모임을 가진 데 이어, 5월23일에는 대전 시내에서 대규모 실업자 대회를 열기로 했다.
민주노총과 함께 노동계를 양분하고 있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역시 실직자 조직화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당초 한국노총의 실업 대책은 민주노총과 달리, 대체로 ‘실업 부조 제도 활성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한국노총은 이미 지난 3월 말부터 실업대책본부를 가동하며, 내부적으로는 각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부당 해고 사례를 수집해 고발하고 실직자 취업을 알선하며, 실업 부조 제도 확충과 고용 보험 제도 수혜 폭 확대를 정부에 요구해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한국노총도 변하고 있다. 김종각 기획위원은 “조직화할 우선 대상자는 노총 산하 조합원으로서 실직한 사람들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실직자 조직을 전국 차원으로 확대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실업자 동맹, 지방으로 확산

전국 조직인 양대 노총이 적극 나섬에 따라 실직자 조직화 움직임은 지방으로 급속히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미 지난 4월 일부 실직자가 한 차례 거리 행진을 감행한 부산 지역 외에, 최근에는 대구·대전 등 여러 대도시 지역에서 실직자 모임을 결성하려는 시도가 잇달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비 도시로서 다른 도시에 비해 비정규직 근로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대전 지역 실직자들은, 민주노총 산하 대전·충남 지역본부 주선으로 최근 1차 모임을 가진 데 이어, 5월23일에는 대전 시내에서 대규모 실업자 대회를 열기로 했다.

실직자들이 집단화·조직화를 서두르는 이유는 분명하다. 재취업 전망이 보이지 않고, 실업 사태가 장기화함에 따라 일정한 일자리 없이 생계를 지탱해야 하는 상태가 한계점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대전·충남 지역본부의 한 관계자는 “특히 비정규직 출신 실직자의 상황이 심각하다. 특단의 조처가 없는 한 실직자들이 실직 상태의 고통을 참을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6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6개월이 지나면 대부분의 비정규직 출신 실직자는 그나마 벌어 놓은 돈을 죄다 써버리고 그야말로 완전 파산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정부의 실업 대책, 실효성 의문

이들의 조직화 움직임은 현재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실업자 구제 대책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이미 △실업기금 7조9천억원 확보 △고용 보험 적용 범위 확대를 골자로 한 추가 실업 대책을 내놓았지만, 대다수 실직자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결과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정부가 실업 구제 대책으로 추진하는 ‘실직자 대상 취로 사업’이 대표적이다. 지난 5월1일부터 서울 강서구청이 마련한 취로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실직자 변성민씨는 “취로 사업이 3개월짜리 한시적인 사업인데다, 가족의 생계를 해결하기에는 보수가 턱없이 낮아 벌써 여러 명이 일을 그만두었다. 그나마 꼬박꼬박 나오는 사람들도 최근에는 정부 정책에 대한 불만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라고 말한다.

실직자 자신이나, 이들을 도와 ‘확실한 조직’을 만들겠다는 관련 단체는 정부의 실업 대책이 전혀 맥을 짚지 못하고 있다고 이구 동성으로 비판한다. IMF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고통을 나누자는 정부의 호소가 실직자 또는 노동자의 일방적인 ‘고통 전담’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직자들은 특히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를 내세워 일부 사업장에서 저질러지는 부당 정리 해고와 임금 체불 관행에 분노하고 있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대량 실업 사태는 실직자 조직화 움직임을 계기로, 경제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사회 전체의 안정을 좌우할 뇌관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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