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총학생회장 선거 ‘治校 平天下’ 강풍
  • 成耆英·崔寧宰 기자 ()
  • 승인 1996.1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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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학생회장 선거, 정치·이념보다 학내 문제에 관심…한총련 주류 퇴조, 비운동권 약진
학생운동은 변할 것인가. 11월 한 달 동안 전국에서 실시된 각 대학 총학생회장 선거 결과가 속속 드러나면서 학생운동의 변화 가능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연세대 사태 이후 한총련 지도부가 대량 검거되면서‘학생운동 위축론’이 대두되었던 데다 학생운동 내부에서도 한총련식 통일 운동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어느 해보다 강하게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변화 조짐은 서울의 주요 대학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서울대·고려대 등에서 한총련의 통일 운동과 투쟁 방식을 강력히 비판하고 나선 ‘비NL계’운동권 후보들이 잇달아 당선했다. 연세대에서는 아예 ‘외부 간섭 불허’를 내세운 비운동권 후보가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했다. 이로써, 민족해방 계열이 승리한 서강대·성균관대·한양대 등을 제외하고는, 학생운동의 전국 판도를 좌우할 수 있는 서울 주요 대학에서 기존 한총련의 주도 세력인 민족해방 계열 후보가 모두 몰락했다. 한총련 사태 이전인 지난해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서울대에서‘21세기진보학생연합(21세기)’을 대표한 이석형(고고미술사학 4) 후보가 당선한 것은 눈여겨 볼 만한 점이다. 21세기 그룹은 94년 서울대를 중심으로 민족해방과 민중민주라는 학생운동의 양대 노선을 모두 거부하고 시민 운동에 가까운 합리적인 학생운동을 표방하고 나선 단체이다.

“민족해방 계열의 한총련 지배 계속될 것”

이 그룹이 그간 학생운동 노선과 이론의 핵심 생성지인 서울대에서 당선했다는 사실이 갖는 상징성은 꽤 크다. 21세기 그룹의 약진은 서울대에 그치지 않았다. 이화여대에서도 지난해에 이어 21세기측 후보가 당선했고 경북대에서도 지난 11월13일 치른 선거에서 21세기측과 민중민주 진영이 공동으로 낸 후보가 3년간 총학생회를 석권해 온 민족해방 계열 후보를 물리치고 승리했다.

고려대에서 6백67표라는 적지 않은 표차로 민중민주 계열의 지현찬군(서문 3)이 당선한 것도 내년 학생운동 진영에 만만치 않은 변화를 예고한다. 더구나 지군은 전국 70여 개 대학 민중민주 계열 후보들이 모여 만든‘대학과 학생운동 재구성을 위한 전국 공동후보단’ 단장으로, 자신이 당선될 경우 한총련 의장 선거에 출마할 것을 공약으로 내걸고 나와 당선했다. 민중민주 계열은 고려대말고도 한성대·동덕여대와 지방의 강원대·부산대·전북대 등 10여 개 주요 대학 총학생회를 석권해 무시할 수 없는 세력임을 입증했다.

한총련 사태의 진원지인 연세대 선거에서 비운동권인 한동수(법학 4) 후보가 승리한 것은 더 큰 이변에 속한다.‘대학다움’을 전면에 내걸고 나온 한후보측은 △장애인 환경 문제 개선 △도서관 앞 집회 때 스피커 사용 금지 △생활 스포츠 센터 건립 같은 현실적 공약을 제시해 유권자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조직력이 약한 한·유 후보측은 네 후보 가운데 가장 적은 8백25명의 추천을 받아 출마했다. 5천2백28명의 추천을 받고 나온 민족해방 계열 후보와 견준다면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연 결과는 예상과 정반대였다.

그렇다면 서울 주요 대학의 이같은 변화가 실제로 학생운동 전반에 얼마나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인가. 이에 대해 기존 한총련 주류 세력은, 주요 대학에서 민족해방 계열이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97년 한총련은 여전히 민족해방 계열이 장악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한총련 의장을 선출하는 대의원 1천8백 명 가운데 민족해방 계열 대의원이 과반수를 훨씬 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한총련 대변언론실장 전영석군은 “현재 차기 한총련 집행 간부를 인선 중이고 내년 1월이면 한총련 임시 집행부를 구성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총련측은 한양대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민족해방 계열로 당선한 정영훈군(법학 4)을 한총련 임시 의장에 출마토록 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역대 한총련 의장 선거에서 임시 의장은 곧바로 정식 선거를 통해 의장에 선출되어 왔다).‘21세기 그룹’ 영향력은 미지수

또 다른 학생운동 관계자들은 지난 94년의 사례와 올해를 비교해 큰 변화가 없으리라는 점을 주장하기도 한다. 당시 서울대에서 21세기, 고려대에서 민중민주 계열, 연세대에서 비운동권 후보가 올해와 똑같은 양상으로 당선돼, 민족해방 계열이 주도한 한총련 활동의 위축이나 퇴조를 전망하는 시각이 적지 않았지만 실제 나타난 양상은 예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민중민주 계열은 내년 2월에서 3월로 예정된 한총련 및 각 지역 총학생회연합 의장 선거에 자파 진영 후보를 적극 내세운다는 방침을 세워 놓고 있다. 이들은 자파 후보가 강원도와 대구·경북 등 일부 지역에서 총학생회연합 의장 직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민중민주 계열측은 또한 서울에서도 한성대와 동덕여대 등에서 자파 후보들이 당선한 점을 들어 서울 북부총련(각 지역 총련과 같은 발언권을 가짐) 의장을 차지할 수도 있다고 조심스레 전망하고 있다. 이번 선거를 통해 민중민주 진영 일부에서 한총련과는 별개 조직으로 제2 한총련 격인 ‘전국총학생회협의회’를 결성하자는 목소리가 강력하게 나온 것도 한총련에게는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서울대·이화여대 등 5∼6개 대학에서 당선한 21세기 그룹의 영향력도 관심사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 그룹이 아직까지는 전국적인 조직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학생운동 전반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이들과 일부 지역에서 공동 후보를 낸 민중민주 계열에서도 21세기 그룹에 대해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고 있다. 고려대 차기 총학생회 관계자는 “21세기측과 공통 분모가 꽤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탈정치화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라고 말했다.

아무튼 한총련 주류의 기본 노선은 변하지 않더라도 대중투쟁 방식 등에서 변화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데 대체로 시각이 일치한다. 한총련 주도 세력인 민족해방 계열에서조차 비판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올해 성균관대 총학생회 선거에 민족해방 계열로 나와 당선한 정기철군(정외 3)도 선거 기간 내내 연세대 사태 당시 한총련의 폭력 시위를 강도 높게 비판해 눈길을 끌었다.

학생 85% ‘등록금 협상·교육 여건 개선’ 원해

학생운동이 어떠한 변화를 모색하든 그 주체는 다름아닌 ‘학우 대중’이다. 일반 학생들은 기존 학생운동의 지나친 정치 투쟁을 비판하며 총학생회가 학원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 줄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학가 선거가 본격 개막되기 이전인 지난 11월12일 <한국대학신문>이 연세대·서강대 등 신촌 지역 4개 대학 학생 5백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차기 총학생회가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사안으로 응답자 46.1%가 등록금 협상을 우선으로 꼽았다. 이밖에도 교육 여건 개선(38.8%), 학생 복지(9.9%) 등에 많은 기대를 보여 대선 투쟁(4.7%)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를 나타냈다.

<고대신문>이 지난 11월14∼15일 이틀간 학생 1백83명을 상대로 실시한 선거 관련 설문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공약을 보고 투표를 한다는 학생이 33.3%로 1위를 차지했고, 정치적 견해에 따라 선택한다는 응답은 25%에 그쳤다.

그러나 실제로 선거 과정에서 이러한 학생들의 요구는 크게 쟁점화하지 못했다. 연세대 선거에서 기독교학생회 등 일부 학생들이 후보자 4명을 상대로 자치 공간 부족, 장애인 특례 입학자 권익 문제 등 10개 항에 대한 질문서를 보냈지만 답변서를 낸 곳은 한 후보뿐이었다. 고려대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각 후보들의 정책 공청회에 참석했던 고려대 김철원군(신방 1)은 “학원 문제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사전 준비가 안된 후보들이 한결같이 당혹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점점 학생들이 정치 노선보다는 각 후보의 세부 공약에 관심을 기울여 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총학생회더러 학내 문제에 더 신경을 쓰라는 주문이다. 이러한 여파 때문인지 내년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음에도 이에 대한 학생운동 진영의 입장이 이번 선거에서는 별로 쟁점화하지 못했다. 이는 92년 대선을 앞두고 치러진 91년 가을 총학생회 선거에서 대선 전략이 선거의 주요 쟁점으로 떠오른 것에 비하면 크게 달라진 양상이다. 학원내 문제에 대한 일반 학생들의 요구와 대통령 선거라는 대형 정치 이슈를 적절히 조화해 나갈 ‘솔로몬의 지혜’를 짜내기 위해 학생운동 진영은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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