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인신구속제 피의자는 웃고 피해자는 울고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1997.03.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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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인신구속제 ‘악용’ 사례 잇따라…“형평성 잃은 법 적용이 문제”
전철역마다 퇴근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던 시각인 지난 1월10일 저녁 6시20분께 서울 신도림역. 퇴근길에 경기도 부천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가기 위해 전철을 탄 윤 아무개양(19·회사원)은 인천행 전철 안에서 끔찍한 봉변을 당했다.

출퇴근 무렵 사람이 많이 몰리기로 유명한 국철 1호선, 전동차 안은 붐비는 승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승객들이 한데 뒤엉켜 이리저리 떠밀리는 사이, 윤양의 등뒤로 누군가 따라붙어 엉덩이를 만지기 시작했다. 이른바 지하철내 성추행이 벌어진 것이다.

윤양이 자신을 성추행하는 사람을 쏘아보며 전동차 안쪽으로 몸을 피하자 남자는 그를 따라가며 성추행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윤양의 등에 매달린 가방까지 손으로 밀어내가며 자신의 성기 부위를 윤양의 엉덩이에 밀착하고 비벼댔다.

성추행은 전동차가 개봉역에 도착할 때까지 10여 분간 계속됐다. 그러나 이 날 그 남자는 ‘불운했다’. 자신의 성추행이 때마침 현장에 잠입해 지하철내 성추행 실태를 추적하던 한 방송사 취재진 카메라에 포착되어, 동행 수사를 벌이던 지하철수사대가 전동차가 역에 멈춰서기 무섭게 그를 덮쳤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가 경찰서로 연행된 이후 발생했다. 검찰이 공무원 지 아무개씨로 밝혀진 이 40대 남자에 대해 ‘성폭력 범죄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예전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담당 판사가 적시한 기각 사유는 ‘피의자의 주거가 일정하고 도주 우려가 없으며 범행 사실을 시인하여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토록 잡기 힘들다는 성추행 현행범을 모처럼 잡아놓고서도 경찰은 법원의 판결에 따라 범인을 놓아주고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합의 거부·진술 번복 등으로 피해자 ‘두 번 설움’

영장실질심사제를 비롯한 새 인신구속제에 대해 가시 돋친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죄를 저질러도 구속되지 않으니 이제 범죄도 해볼 만한 직업’이라는 불만 섞인 농담 외에, ‘귀찮아서라도 영장 청구는 안하겠다’는 등 수사 기피 풍조를 반영하는 온갖 푸념이 일선 수사기관 종사자들의 입에서 새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지하철수사대의 한 대원은 성추행범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 사건에 대해‘공인의 처지에서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없다’고 말을 삼가면서도 뼈 있는 촌평을 잊지 않았다. “법 집행에 대한 국민 감정이란 준엄한 것인데, 성추행범을 풀어주게 한 법원이 이같은 법감정에서 예외가 될지는 지극히 의문이다.”

경찰·검찰 등 일선 수사기관이 겪는 당혹감은 영장실질심사제 실시 이후 범죄 피해자들, 특히 교통사고·폭행 등 단순 형사 사건 피해자들이 사건 처리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에 견주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주거나 신원이 분명하고, 범죄 혐의에 대해 부인하지 않는 한 구속영장이 집행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게 된 일부 피의자들이, 수사 당국에서 풀려난 뒤 피해자와 합의하기를 거부하거나 아예 혐의 인정 진술마저 번복하고 나섬으로써 피해자에 대한 조속한 피해 구제를 지연시키고, 수사를 혼선에 빠트리는 일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버스 운전 기사의 과실로 사고가 나는 바람에 목숨까지 잃은 이종임씨(65)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경북 봉화에서 딸네집을 다니러 서울에 올라왔던 이씨가 졸지에 참변을 당한 때는 지난해 12월30일. 이씨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 강서구청 쪽에서 화곡역 방면으로 가는 버스에 손자를 태워주고 내리다가 운전기사가 차문을 열어둔 채 차를 출발시키는 바람에 땅에 넘어져 병원으로 실려갔다가 끝내 숨을 거두었다. 수사를 맡은 서울 강서경찰서가 문제의 운전 기사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우발적 과실에 의한 사고라도 사람이 숨질 정도의 중대한 사안이 발생한 이상 피의자 구속 수사가 옳다고 경찰은 판단했다. 더욱이 피의자는 초기 수사 때 자신의 실수를 시인했던 터이다.

서울지법 남부지원은 검찰이 청구한 구속 영장을 기각했다. 기각 사유는 역시 영장실질심사 기준에 따른‘증거 인멸과 도주 우려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법원에 의한 구속영장 기각 이후 사태는 한층 더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검찰에 따르면, 애초 자신의 과실을 시인했던 피의자가 허위 목격자를 내세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등 태도를 완전히 바꾼 것이다. 피해자 가족은 창졸간에 당한 교통 사고의 충격 외에, 피의자측의 배신에서 말미암는 분노로‘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다. 피해자의 외아들인 김종완씨는 “영장이 기각된 이후 가해자측은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형사라고 밝힌 가해자 친척이 전화를 걸어와 자기네가 정한 합의 조건을 받아들이라며 반협박조로 나왔다”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무릎을 꿇고 빌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오히려 피의자가 불구속 처리된 상황을 악용해 사건 뒤집기를 시도한다는 것이었다.

피의자가 고자세로 나오고 피해자가 합의를 보기 위해 오히려 피의자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상황은 특히 술자리에서의 말다툼이나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어 폭력이 오가는 폭행 사건에서 흔히 벌어진다고 수사 관계자들은 말한다. 피해자 쪽은 당장 다친 사람을 치료하기 위한 입원비·검사비 따위 돈이 필요한데, 피의자 쪽은 대부분 불구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진료비 지불에 소극적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법원은 영장실질심사제를 엄정히 운용하기 위해 이미 지난해 12월 ‘인신구속 사무처리 요령’이라는 예규를 제정·발표한 바 있다. 구속영장을 심사할 경우, 반드시 영장 전담 법관을 지정하며 수사 기록만으로 범죄 사실에 대한 소명 여부를 판단할 수 없으면 반드시 피의자를 불러 심문하도록 한 것이 주요 내용이다. 법원은 아울러 피의자 구속 사유 중 ‘증거 인멸 및 도주 우려’를 판단할 때에는 △피의자측이 피해자 등 증인에 대해 어느 정도 압력이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범죄 사실의 경중·동기·회수·규모·결과 등 범죄 사실에 대한 사정 파악 등을 골자로 한 ‘구속 사유에 관한 판단 기준’까지 세분화해 마련했다. 피의자건 피해자건 구속영장 처리 과정에서 선의의 피해를 보아서는 안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최근 행해진 일련의 영장 실질 심사 과정에서 법원이 과연 이같은 기준을 충분히 고려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지난 2월 초 서울 시내 한 경찰서 관할 지역에서 발생한 차량 절도범 사례가 그런 의문을 갖게 하는 본보기이다.

지난 2월7일 서울 시내 한 경찰서에 승용차 절도범 한 사람이 붙잡혀 왔다. 열여덟 살 난 공업고등학교 학생인 이 피의자에게는 특수 절도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법원은 곧 그에 대해 기각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피의자는 풀려난 뒤 사흘 만에 이번에는 아예 택시를 훔쳐 달아나다 붙잡혔다. 사건이 발생하자 담당 수사관들은 “법원측이 정해진 기준에 따라 피의자를 좀더 깊이 있게 심문한 뒤 영장을 발부했더라면 피해자가 생계 수단인 택시를 잃어버려 생계를 위협받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며 어이없어 했다. 말하자면 법원측이 재범할 우려를 소홀히 판단하여 영장을 기각함으로써 무고한 범죄 피해자만 한 사람 더 늘려 놓았던 것이다.

새 인신구속제가 무죄 추정 원칙과 불구속 수사 원칙을 확립함으로써 수사 당국의 불필요한 권한 남용을 방지하고, 자칫 발생할지 모를 인권 침해를 막을 수 있는 매우 유효한 장치라는 데에는 이론이 없다. 하지만 법원이 국민의 법감정, 범죄의 중대성과 범행 동기, 수법, 범죄 전력, 재범 가능성 따위의 고려 사항을 제쳐 두고 지나치게 원칙만 강조함으로써 부작용을 낳는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게 나오고 있다. 범죄 피해자의 권리 보장에 새 인신구속제가 취약하다는 비판이 대표적이다.“피의자 진술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

물론 법조계 일각에서는, 법원측이 법정 구속 제도와 단기 자유형 수단을 적극 활용하여 사건의 신속 처리와 피해자 구제를 최대한 보장하겠다고 공표한 사실을 내세워 반박 논리를 펴기도 한다. 손동근 교수(건국대·법학과)는 지난 2월27일 서울 서초동 서울지방변호사회관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 참석하여 “법원이 단기 자유형을 적극 활용할 경우, 피의자가 실형을 선고받을 확률이 크기 때문에 ‘처벌’을 바라는 피해자 감정은 충족될 수 있으며, 합의 지연 문제에서도 ‘반의사 불벌 원칙’이 있으므로 해결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법이 형평성을 잃고 있다’는 주장은, 특히 울분이 섞인 일반 형사 사건 피해자의 하소연에서 설득력이 보태진다. 버스 사고로 노모를 잃은 김종완씨는 “예기치 않은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나도 당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사람을 무조건 구속하고 보는 관행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그러나 피의자측 진술 하나만으로 구속영장 발부 여부를 판단하는 현행 영장실질심사제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본다. 피의자측은 법원의 판단을 악용하여 증거를 인멸하고 사건의 본말 자체를 뒤집으려 시도하는 등 우리를 두 번 죽였다”라고 말한다. 현행 인신구속제가 가해자(피의자)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행 초기 영장실질심사제 등 바뀐 인신구속제의 최대 걸림돌은 검·경 등 일선 수사기관의 저항감이었다. 양상은 달라지고 있다. ‘가해자만 감싸고 돈다’는 범죄 피해자들의 의문이 제기되면서 새 인신구속제는 심각한 도전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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