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조작'' 인혁당 사건 재조명
  • 丁喜相 기자 ()
  • 승인 1999.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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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건 재조명/박정희 정권, ‘빨갱이’로 조작 8명 사형… 진상 규명 절실
국제법의학자협회가 한국 대법원이 한 사건을 판결한 날을 ‘사법 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규정했다. 75년 4월8일의 일이었다. 이른바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연루자 8명은 이 날 대법원의 상고 기각 판결이 내려진 지 10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24년이 흐른 지난 4월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는 이들의 억울한 희생을 추도하는 추도식이 천주교인권위원회 주관으로 열렸다. 이 사건을 만들어냈던 옛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가정보원은 이 날 행사장에 조전을 보내 왔다. 이튿날 대구에서 열린 24주기 옥외 추도식은 사건 이후 처음으로 경찰과 구청이 집회 허가를 내주어 치러졌다. 94년 대구지검이 인혁당 관련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사업을 벌이는 사람들을 소환 조사했던 것에 견주어 변화라면 큰 변화다. 그러면 도대체 인혁당 사건이 어떤 사건이기에 이처럼 오랜 세월 금기의 영역에 묻혀야 했을까.

인혁당 사건은 유신 독재가 절정에 달하던 74년에 중앙정보부가 야심작으로 만들어낸 공안 사건이다. 북한 주장에 동조하는 이들이 학생·재야 인사를 배후 조종해 정부가 타도될 때까지 투쟁을 선동한 ‘반(反)국가 조직 사건’이라는 것이 중앙 정보부가 발표한 사건 개요였다. 이 일로 구속된 23명은 74년 5월27일 내란 예비 음모 및 내란 선동 혐의로 군법회의에 기소되어 그 중 8명이 대법원으로부터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이 터지기까지는 10년이라는 세월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64년 봄 정부가 진행하던 한·일 회담을 굴욕 외교로 규정한 재야 인사와 학생 들은 전국적으로 이를 규탄하는 시위를 가졌다. 박정희 정권은 이런 움직임에 비상 계엄으로 맞선 뒤 도전 세력에게 쐐기를 박기 위해 중앙정보부(김형욱 부장)로 하여금 ‘북괴의 지령을 받은 대규모 반국가 단체인 인민혁명당이 국가 전복을 꾀하려 했다’는 요지의 엄청난 사건을 터뜨리게 했다. 이것이 이른바 1차 인혁당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중앙정보부가 고문으로 조작한 것이었음이 검찰을 통해 확인되었다. 사건을 넘겨받은 서울지검(부장검사 이용훈)은 관련자들이 심한 고문 끝에 허위 자백한, 날조된 사건임을 밝혀내고 기소를 거부했다. 검사 3명은 이와 함께 사표를 제출했다. 이렇게 되자 검찰 수뇌부와 중앙정보부는 발칵 뒤집혔고, 결국 숙직 담당 검사를 시켜 억지로 기소토록 했지만 여론에 밀려 결국 일부 관련자만 가벼운 형량에 처한 뒤 마무리했다.

중앙정보부의 사건 조작이 실패로 끝난 지 10년이 지난 74년 8월 박정희 정권은 학생과 재야의 대규모 유신 독재 반대 투쟁을 봉쇄하고자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그러나 이 조처만으로 독재에 대한 항거를 제압할 수 없다고 판단한 유신 정권은 분단 상황에서 숙명적으로 존재하는 국민의 레드 콤플렉스를 적극 활용했다.

박정희 “8명 처형한 것은 크나큰 실수”

유신 체제에 격렬하게 반대하던 학생들을 ‘민청학련 사건’으로 엮은 뒤 그 배후 세력으로 명망가와 비교적 이름 없는 사람들 두 그룹을 만들었다. 윤보선·지학순·김지하·김동길·김찬국 씨 등과 같은 명망가와 도예종·서도원·하재완 씨 등 잘 알려지지 않은 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가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이른바 2차 인혁당 사건이었다. 이 철·유인태 등 당시 학생들이 주도한 반유신 투쟁을 민청학련으로 엮어 사형 선고를 내리면서 그 배후가 반국가 지하 조직인 인혁당이라고 발표한 중앙정보부는 그럴듯한 배후 세력으로 사형시켜도 별 관심을 끌지 못할 무명 인사들과 ‘손 좀 봐줄’ 유명인들로 구분했던 것이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은 함께 구속되었지만 재판은 따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인혁당 사건 관련자 가운데 도예종(삼화토건 회장) 서도원(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하재완(양조장 경영) 이수병(학원 강사) 김용원(경기여고 교사) 우홍선(중소기업 상무) 송상진(양봉업) 여정남(전 경북대 학생회장) 8명이 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를 시작으로 사건은 10개월 만에 대법원 확정 판결까지 났는데, 당국은 놀랍게도 판결이 난 날 밤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서둘러 8명을 처형했다. 명백한 증거가 있는 남파 간첩이라 하더라도 사형 선고 이후 적어도 3∼4년은 형 집행을 미루는 관행에 비추어 이들에게는 사법 사상 유례 없는 가혹한 조처가 취해진 것이다.

이는 사건을 조작한 전모가 밝혀질 것을 두려워한 박정희 정권과 중앙정보부에 의한 만행이자 한국 사법부의 비극이었다. 인혁당 사건 연루자 8명에 대한 신속한 사형 집행에 얼마나 문제가 많았는지는 훗날 박정희 전 대통령도 알았던 것 같다. 윤보선 전 대통령이 생전에 전한 바에 따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집권 기간 중 크나큰 실책이 있었는데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을 처형한 것이 그것이다’라면서 정부 요인들 앞에서 후회했다고 한다.

사건 당시 인혁당 관련 피해자들에 대한 구명 여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신 치하의 공포 분위기 아래서 이들에 대한 ‘사법 살인’을 중지하라고 호소한 사람들은 주로 국내에 들어와 있던 외국인 선교사였다. 조지 오글 목사와 제임스 시노트 신부가 그들이다. 이들은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 적극적인 구명운동을 벌였다. 이에 대해 정부는 사형 집행 직후 이들을 추방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인혁당 사건이 잔인한 고문을 통해 조작되었음을 알리고 사형수 8명을 구명하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 기도회를 열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는 이들의 활동 역시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문정현 신부는 당시 사형수 8명을 구명하기 위해 동분 서주하다가 당국의 만행으로 다리를 다쳐 지금도 목발을 짚고 다닌다. 중앙정보부, 희생자 부인도 고문

현재 이돈명 변호사와 함께 ‘인혁당 사건 진상 규명 및 명예 회복을 위한 대책위’(대책위)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문신부는 당시의 폭압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사형이 집행되던 75년 4월9일 아침 사제단은 김수환 추기경과 상의해 시신을 명동성당내 지하 성당에 안치하기로 하고 유족들과 함께 서대문구치소 정문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박정권은 이들의 시신을 뒤로 빼돌려 화장했다. 겨우 송상진씨 시신만 확보했는데, 응암동 로터리에서 중앙정보부가 동원한 크레인이 장의차를 강제로 끌고가고 말았다. 그것을 막다가 차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함께 엮여 조작된 두 사건 가운데 민청학련 사건은 역사적으로 재평가받아 복권이 되었지만 유독 인혁당 사건 관련 희생자들만 지금까지 철저히 논의의 금기 대상으로 남은 것은 ‘살아 있는 양심의 직무 유기’라는 것이 문신부의 주장이다.

중앙정보부에서 참혹한 고문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희생자들의 가족이 겪었던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남편들이 조작 사건에 희생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뛰던 부인들은 전부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어 ‘구명 운동을 않겠다’ ‘내 남편은 간첩이다’라는 진술서를 쓰도록 강요받았다. 육체적·정신적·성적 폭력에 못이겨 그런 자술서를 쓴 부인들은 가책을 느껴 유서를 쓰고 자살을 시도하거나 사제단에 양심 선언서를 맡기기도 했다.

지난 24년간 한없는 고통 속에 몸부림쳐 왔다는 희생자 하재완씨 부인 이영규씨는 “아무도 우리의 억울함과 고통을 헤아리지 않아 사건 진상을 아는 윤보선 전 대통령 부인 공덕귀 여사가 생존해 있을 때는 유족들이 매년 그분 집에 찾아가 눈물로 밤을 지샜다”라고 말했다. 현재 이들 희생자 8명의 부인은 국회 앞에서 1백60일이 넘도록 계속되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의 농성에 돌아가면서 참여한다.

지난해 8월 결성된 인혁당 사건 대책위는 현재 이 사건 진상 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사건 관련 책자 발간 작업을 진행 중이고, 독립 영상 단체 ‘푸른영상’은 인혁당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또 대책위는 이 사건의 법률적 무죄 선고를 받아내기 위해 재심 청구 작업도 벌이고 있다. 이밖에도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각계 인사 1천인 선언을 이끌어냈는가 하면 사건 희생자 추모비 건립 운동도 벌이기로 했다.

사건 당시부터 인혁당 문제에 온몸으로 부딪쳐 온 문정현 신부는 “인혁당 사건이 아직까지 초보적 진상 규명마저 안되고 있다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악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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