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최씨 종회, 영혼 결혼시킨 일본 ‘보수원’에 요구
지금으로부터 23년 전인 76년 7월25일(음력 6월29일) 일본 후쿠오카(福岡) 현 다카와(田川) 군에 자리잡은 히코산(英彦山) 기슭. ‘보수원(寶壽院)’이라는 한 작은 사당에서 한·일 교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특이한 추모제가 거행되었다. 임진왜란 때 기생 신분으로 위장해 진주 남강 의암(義巖)에서 적장을 껴안고 순국한 주논개(朱論介: 충의공 최경회의 부실. 1574∼1593)와, 그에 의해 살해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추모하는 합동 진혼제가 열린 것이다.게야무라의 가족 사당인 보수원을 조성한 우에쓰카 하쿠유(上塚博甬·69)씨가 주최한 그 행사에는 당시 후쿠오카 주재 한국총영사와, 이명길 경남 진주시 문화원장 등 진주 지역 문화·언론계 인사 10여 명이 부부 동반해 참석했다.
부부 금실 좋게 만드는 ‘잡신’으로 전락시켜
그 행사는 겉으로는 ‘의기(義妓) 주논개’를 추모하는 추모제였지만, 실제로 우에쓰카 씨가 게야무라와 논개를 영혼 결혼시킨 뒤 보수원 사당에 나란히 봉안함으로써, 자신이 흠모해온 사무라이 게야무라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보수원 준공식 뒤 논개의 영정과 위패는 적장 게야무라의 위패와 나란히 모셔졌고, 그 옆으로는 게야무라의 아내와 처제 위패가 놓였다. 보수원에 조성된 논개 가묘 역시 게야무라의 묘와 나란히 놓인 채 묘비까지 세워졌다. 4백여 년 전 서로 ‘원수’였던 역사 속의 두 인물이 한 일본인의 계략에 의해 부부로 둔갑한 것이다.
‘보수원의 논개’ 는 그 뒤부터 일본인들에게 부부 관계를 좋게 만드는 쾌락의 상징이나 아들을 점지하는 잡신으로 여겨져 왔다. 엄연히 유부녀였던 주논개 부인이 적장 게야무라와 영혼 결혼한 뒤 수십 년 동안 일본의 잡신으로 모셔져온 이 괴이한 사건은 도대체 어떻게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일까?
지난해 <위대한 한국인 - 논개> 라는 책을 펴낸 작가 정동주씨와 최경회 장군의 후손인 최재양씨(70) 등이 사건을 추적해 재구성한 내용은 이렇다.
건축가였던 우에쓰카 씨는 70년 히코산 기슭에 있는 자기 땅에서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부장(副將)이었던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묘비 조각을 발견했다. “일본의 전통극인 가부키에도 등장하는 사무라이 게야무라의 비극적 인생을 흠모하게 된 그는, 게야무라의 원혼을 달랠 방법을 궁리하다가 논개와 게야무라를 부부로 만들어 준다는 기괴한 발상을 하게 되었다”라는 것이 정동주씨 분석이다. 우에쓰카 씨는 ‘논개 추모 사업을 통해 한·일간 역사적 화해를 도모하겠다’는 명분으로 73년 5월 진주를 처음으로 방문한 뒤로 수년 동안 진주시 문화·언론계 인사들을 접촉했다.
우에쓰카 씨는 또 75년 머리를 깎고 승려로 신분을 위장해, 논개와 게야무라의 넋을 건지는 초혼 행사를 벌였다. 우에쓰카 씨는 마지막으로 논개의 가묘를 조성하기 위해 주논개의 고향인 전북 장수에서 구입한 화강암에 ‘朱論介之墓’라는 글씨를 새겨 진주의 모래·나무·흙과 함께 일본으로 가져갔다. 우에쓰카 씨는 76년 4월19일 5백만 엔을 들여 논개 묘를 완성했다.
그 뒤부터 매년 음력 6월29일 보수원에서 개최되는 두 나라 군·관·민 합동 위령제 때 진주의 유력 인사들이 참석했고, 진주시장이 화환을 보냈다. 후쿠오카 한국총영사관은 82년까지 부영사를 파견했고, 매년 위령제 때마다 화환을 보냈다.
논개의 영정이 보수원에 왜장과 나란히 놓여 있다는 사실이 국내에 처음 알려진 것은 82년. 그 뒤 우에즈카 씨는 한국의 비난 여론을 의식해 재일 교포 재력가 양승호씨에게 논개 묘비 관리를 맡아 달라고 설득했다. 양승호씨는 95년 10월 광복 50주년 기념 사업의 하나로 ‘주논개 묘비 영구 보존회’를 결성해 사재 4백만 엔을 들여 기념비를 세우고 논개 추모 사업을 도맡았다.
“영정 돌려줄 수 있지만 영혼은 안돼”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최홍진 ‘해주최씨 광주·전남 종회’ 대표와 최경진·최길주·최재양 씨 등 ‘해주최씨 화순 종회’ 대표단 4명은 지난해 8월 일본 후쿠오카 보수원 현장을 방문해, 이같은 사실을 직접 확인하고 우에즈카 씨를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논개 부인 영정과 초혼해 간 논개 부인 영혼 반환 △장수와 진주에서 가져간 묘비석과 모래·흙 반환 △한·일 합동 위령제 폐지 등을 요구했다(오른쪽 인터뷰 참조).
그러나 우에쓰카씨는 “논개가 최경회의 부실(副室)인지 몰랐다. 논개 묘비 보존회가 동의한다면 영정을 돌려줄 수 있으나, 논개 영혼은 반환할 수 없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후쿠오카 이즈카(飯塚) 시에 사는 양승호씨(73·재일본 히코산 의암 주논개 열사 묘비 영구 보존회장)는 <시사저널>과의 전화 통화에서 “논개와 게야무라 영혼 결혼은 낭설이다. 후쿠오카 총영사까지 찬성한 일을 한국의 종친회가 문제 삼을 수는 없으며, 재일 동포들의 정신적인 위안처이자 구심점이 된 만큼 돌려줄 수 없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작가 정동주씨는 “게야무라를 사무라이의 전형으로 흠모하는 우에쓰카는 은퇴한 건축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후쿠오카의 야쿠자 출신이다.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재일 동포 출신 야쿠자들을 끌어들여 교묘하게 논개 부인 영정 반환을 거부토록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라고 말했다. 진주시와 장수군은 “민간 단체들끼리 협의할 사안이므로 관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라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심지어 김상두 장수군수는 지난해 “논개 영정이 문제가 된다면 보수원에 최경회 장군의 영정까지 모시면 되지 않느냐”라고 실언해 한동안 구설에 올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통상부와 후쿠오카 총영사관 역시 영정 반환이나 일본인이 행하고 있는 위령제 폐지와 위령비 철거 문제는 민간 단체들끼리 해결할 사안이라는 입장이다.
작가 정동주씨는 “적장을 살해한 논개 부인이 4백년 뒤에 적장의 부인으로 둔갑해 있다는 사실은 우리 국민의 수치다. 진주시 유력 인사들이 뒤늦게 사실을 알고 후회했다지만 아무리 무지의 소치라고 해도 변명할 근거가 없다”라고 비판했다.
보수원 논개 문제를 추적해 온 <진주신문>의 한 관계자도 “만약 지리산 골짜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흠모해 그 영정을 이순신 장군의 영정과 함께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한국인이 있다고 치자. 이것을 한·일 친선의 모습으로 볼 한국인이 얼마나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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