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양’의 모순
  • 최재천 (변호사, 법무법인 한강 대표) ()
  • 승인 2003.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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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의 친구 강금원씨가 수감되기 직전 자신을 ‘속죄양’이라고 표현했는데, 만일 진실이 그렇다면 우리 법의 근간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일이 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친구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혐의로 구속되었다. 서울구치소로 가기 직전 강씨는 “내가 속죄양이 됐으니 정치권도 이제 그만 싸우고 용서하라”고 했다. 스스로 ‘속죄양’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사람을, 그것도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치던 시대가 있었다. 미개 시대의 가나안·메소포타미아·북아프리카 일대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소원 성취를 위해, 또는 우상을 즐겁게 하기 위해 가장 소중한 자신의 자식을 죽여 제단에 올렸던 것이다.

‘자기 책임의 원리’는 근대 법의 기본 원리

구약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장작더미 위에 쓰러뜨린 다음 목에 칼을 겨누어 막 찌르려는 순간, 하늘이 열리며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부르는 소리가 울렸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 아무 것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주변 숲에는 수양 한 마리가 풀섶에 걸려 몸부림치고 있었다. “보아라, 하나님이 내리신 희생이로구나.” 아브라함은 이삭을 부축하여 일으킨 다음 양을 잡아 번제를 드렸다. 아브라함은 그날 이후 사람을 희생으로 드리는 것은 아브라함의 가계, 나아가 인류에게 금지된다는 점도 깨달았다. 이로써 ‘희생인’은 사라지고 ‘희생양’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종교적 의미에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금지되듯 법률적 측면에서 사람이 희생당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근대 법의 3대 기본 원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자기 책임의 원리’이다. 이 말을 풀어 설명하면, 합리적 이성을 가진 개인이 스스로 판단해 어떤 행위를 한 이상 그 행위에 대한 모든 책임, 즉 법률적 책임은 그 개인의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원칙이 존재하는 한 희생양 또는 속죄양이나 연좌제는 존립할 여지가 없다. 조직 폭력 세계에서 간혹 수괴는 도망가고 단순 조직원을 피의자로 대신 출석시켜 자신의 범죄라고 허위 진술케 한 다음 처벌을 받게 하는 사례가 있다. 법률적으로 이런 행위는 형법 제151조 범인은닉죄에 해당할 뿐이다. 그런데도 강씨가 자신을 속죄양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디엔가 문제가 있다는 말인데, 검찰이 몸통을 두고도 주변에 불과한 강씨를 대신 집어넣었다면 직무 유기에 해당할 것이다. 만일 진실이 그렇다면 이는 우리 법의 근간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일로 비판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강씨의 발언이 그야말로 종교적인 견지에서 정치권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간다는 일종의 속죄양 의식을 표현한 것일지라도 강씨로서는 억울한 일이 될 것이다. 물론 구약에서 이삭은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아브라함이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하지만 희생당하는 사람의 마음을 우리가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법률가의 처지에서 볼 때 강씨의 억울함은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강씨 구속에는 분명 여론의 압박에 따른 구속이라는 한 측면이 있다.또 한편으로는 정치 자금이나 측근 비리라는 본래의 수사 목적과는 관련성이 약한 배임 혐의로 구속한 것이 일종의 별건 구속이라는 측면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자칫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이 없다’거나 ‘미운털 박혀서 그렇다’는 말이 나와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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