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PX 가려고 이 땅에 태어났다”
  • 주진우 (ace@sisapress.com)
  • 승인 2003.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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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특권층의 ‘미군 PX 사랑’ 현장 추적
전국에 산재한 미군 PX는 20여 개. 간이 매점 ‘쇼펫’을 포함한 PX 수는 60여 개에 이른다. 그러나 미군은 PX 상품이 군수 화물에 포함된다며 내용을 세관에 신고하지 않아 정확한 통계를 내지는 못하고 있다. 관세청은 PX의 전체 매출액이 1993년 2억3천여만 달러, 1997년 2억여 달러로 집계했다. 올해는 PX 매출액을 2억∼3억 달러로 예상하고 있다.

미군이 PX를 단순히 미군들을 위한 편의 시설이 아니라 영리 사업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한·미 양국이 1990년 체결한 용산기지 이전 양해각서(MOU)에 따르면, 용산기지 이전에 따른 미군 매점(PX) 영업 손실을 한국측이 보상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군이 필요 이상으로 많은 물품을 들여온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주둔 미군의 수를 고려할 때 반입되는 미군 물품의 양은 2배 이상이라는 것이 관계 당국의 분석이다. 한 PX 종사자는 “시바스리갈 등 양주와 맥주 소비량은 전세계 미군 기지 가운데 한국 기지가 독보적이다. PX 내 한국인 점원들의 급여가 영업 실적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부정을 키우는 한 요인이다”라고 말했다.

이같은 미군의 돈벌이에 춤을 추는 사람들은 비뚤어진 한국의 특권층이다. 특히 일부 정치인과 여론 주도층은 미군 기지에 출입할 수 있다는 것을 대단한 특권으로 생각하고 있다. 천 달러 가량 기부금을 내야 나오는 미군 부대 출입증을 받기 위해 지금도 신청자가 수천명이나 줄을 서 있다. 가짜 미군 가족 신분증과 PX 물품 구매 카드를 위조해 판매하는 일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두 카드를 손에 쥐는 데는 5천만원 가량 든다. 한국 전쟁이 끝난 지 50년이 흘렀지만 PX는 시간의 흐름을 잃어버린 듯하다.
한거물 조직폭력배는 술집에 갈 때마다 자기가 마실 술을 싸가지고 간다. 항상 안주만 주문하고는 아랫사람에게 자신의 차에서 술을 꺼내오게 한다. “시중에 나온 발렌타인 30년산은 전부 가짜야. 돈을 많이 주고 먹는 것은 괜찮지만 가짜를 먹으면 골병 들어. 미군 부대에서 나온 것이라야만 믿을 수 있어.” 그는 미군 부대에서 나온 술을 차 트렁크에 가득 싣고 다닌다. 그에게는 ‘미군 PX=진짜’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있다.

한 중소기업체 사장 김 아무개씨(46)는 1주일에 두 번 미8군 용산기지로 장을 보러 간다. 그때마다 영내 식당에서 외식을 하고 야채와 고기 등 먹거리를 사온다.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부대 안의 고기는 질이 완전히 달라. 한번 먹어보면 PX 고기를 먹지 않을 수 없어. 야채도 진짜 유기농 야채인 데다 아내가 좋아하는 다이어트 음식이 많아. 의약품도 싸고 믿을 수 있어. 미군 부대에 들어온 제품은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검증을 거친 거야.” 그는 지난해 아예 미군 부대와 가까운 서울시 동부이촌동으로 이사까지 했다. 그에게는 ‘미군 PX=최고’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있다.

PX(Post Exchange). 우편교환국. 우리 식으로는 우체국이다. 원래 우체국이던 PX가 물건과 음식을 팔면서 지금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1945년 미군과 함께 이 땅에 들어온 PX는 우리의 생활과 의식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6·25 전쟁을 거치면서 이렇다할 생산품이 없던 시절 PX에서 통조림과 초콜릿은 최고의 간식이었고, 군복은 최고의 외출복이었다.

1950년대는 물론 1980년대까지만 해도 미군 PX를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기도 했다. 미국은 인맥을 관리하는 데 PX 출입증을 교묘하게 이용하기도 했다. 1970년대 청와대 정세분석팀 멤버였던 고려대 이 아무개 교수는 미국대사관이 여는 세미나에 정기적으로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미국대사관은 소액의 연구비와 PX 출입증을 보상으로 내걸었다. 이교수는 거절했다. 그런데 훗날 알아보니 다른 정세분석팀 멤버들은 대부분 그 조건을 수용했다. 그 멤버들은 5공과 6공을 거치며 외무부장관과 안기부장 등을 역임했다.
PX가 한국에 뿌리를 내린 지 근 60년이 되어가지만 PX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최근 서울 강남에서는 ‘미국산 분유 씨밀락을 먹은 아이는 미국인처럼 롱다리와 통뼈가 된다. PX에서 나온 씨밀락은 군인의 아이들을 위해 고급 영양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당시 PX에서 나온 씨밀락은 정상으로 수입된 제품보다 2∼3배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기현상이 빚어지기도 했다. 남대문 시장의 한 수입상은 “아직도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씨밀락은 인기 상품이다. 수십 통씩 사가는 사람이 있다”라고 말했다.

최근 골프채와 전자제품 등 PX 반출 품목이 다양화·고급화하고 있다. 와인이 인기를 끌면서 새로운 PX 밀수 품목에 추가되었다. 술 중에서도 대표적인 품목은 단연 맥주와 양주. PX 내부는 대형 할인 매장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 중에서도 주류 코너는 특히 크고 다양한 제품을 갖추고 있다.

PX에서 판매되는 미국 맥주 ‘밀러’ 한 상자(24병)는 14.85달러(약 1만8천원)이다. PX에서 수집된 맥주는 남대문 등지의 수집상을 통해 전국 소매점으로 나간다. 서울 소매점의 경우 밀러·버드와이저 등은 한 상자에 2만7천원, 하이네켄·코로나 등은 4만1천원, 1리터 짜리 위스키 짐빔·잭다니엘 등은 2만5천∼3만2천 원에 공급된다.

최근 서울 종로와 홍대 거리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수입 맥주 전문점의 맥주 가운데 PX 맥주가 차지하는 비율은 80∼90%에 이른다. 주류 업계에서는 PX를 통해 국내에 유출되는 맥주가 전체 맥주 점유율의 1∼2%, 금액으로는 1백50억∼3백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홍대에서 맥주바를 운영하는 이 아무개씨(36)는 “값이 싼 데다 세원이 노출되지 않아 PX 맥주를 팔지 않는 집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렇듯 미국 국방부 예산으로 운반 및 관리비 등이 지원되는 PX의 면세 맥주는 한국의 암시장을 키우고 있다. 한 주한미군 관계자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구매하는 제품을 컴퓨터로 등록하는 RCP 시스템을 가동해 술·담배·화장품 등 반출량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소규모 구매는 월 할당 금액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여러 번 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들은 이런 규정을 악용해 자가용이나 택시를 타고 PX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조금씩 여러 번 사기도 한다. 속칭 ‘뺑뺑이 돌기’이다. 최근에는 PX로 통하는 땅굴을 판 뒤 면세 맥주 등을 시중에 빼돌린 조직적인 밀수업자들이 세관에 적발되기도 했다. 이들은 무려 석달에 걸쳐 영내로 통하는 가로 65㎝, 세로 80㎝ 크기 땅굴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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