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커들의 놀이터’ 된 서초동
  • 나권일 기자 (nafree@sisapress.com)
  • 승인 2003.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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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관’ 변호사와 손잡고 일감 싹쓸이…창원지검 적발 사건은 빙산의 일각
제헌절을 하루 앞둔 지난 7월16일, 창원지검 특수부(부장 김해수)는 이례적으로 법조 비리 사건 수사 결과를 내놓았다. 경찰 출신 법조 브로커 정우기씨(가명. 46·구속)에게 형사사건 수임 알선료로 2억∼3억원씩을 건넨 현직 변호사 2명을 구속하고, 수천만원대 알선료를 지급한 변호사 2명을 불구속 기소한 것이다.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4명 가운데 3명은 노른자위 법관직으로 통하는 서울지법 부장판사를 지냈고, 다른 1명은 인천지법 부장판사를 마치고 퇴임한 중견 법조인이다.

이들 부장판사 출신들은 2000년부터 2001년 사이에 변호사로 개업한 뒤 ‘전관’으로서 외근 사무장 1∼2명을 고용해 형사 사건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창원지검은 서초동을 3년 동안 휘젓고 다녔던 경찰 출신 브로커 정씨를 집요하게 추적해 대형 법조 비리를 밝혀낸 것이다.

하지만 웬일인지 이 사건은 언론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아무개(50·사법고시 19회)·한 아무개(46·사법고시 23회) 변호사는 구속된 지 닷새 만인 7월21일 창원지법에 구속적부심을 신청한 뒤 2천만원씩 석방 보증금을 내고 모두 풀려났다.

그러나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이 커질 수도 있다고 본다. 정우기씨가 가지고 있던 사건 수임 장부를 비롯해 정씨의 수첩과 통화 기록에는 정씨가 관리해온 현직 경찰 수십명과 연락처, 그리고 평소 친분을 유지해온 법원·검찰 직원의 이름이 빼곡이 적혀 있었다. 한때 창원지검 주변에서는 법조 브로커로부터 상당액을 받은 현역 경찰관이 70여명이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수사기관이 제대로 파헤친다면 서초동 법조타운 전체가 발칵 뒤집힐 정도로 인화성이 큰 사건이기 때문에 그 실상이 일부만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도 돌았다.

<시사저널>이 추적한 결과 이번 사건에는 법조계 현직 거물들이 개입하거나 직간접으로 연관된 정황이 드러났다. 법조 비리의 전형처럼 회자되었던 5년 전 대전 이종기 사건은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등장 인물들 면면이 화려하다.

구속되었다 풀려난 이 아무개 변호사는 지난 3월 검찰 현직에서 물러난 법무부 차관 출신 거물 변호사 ㅎ씨를 변호인으로 선임했다. ㅎ변호사는 이씨로부터 상당한 수임료를 받기로 약속하고 수사 단계에서부터 뛴 것으로 알려졌다. 역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한 아무개 변호사는 사법고시 23기 판사 출신으로 강금실 법무부장관도 잘 아는 사이다. 이번 사건으로 불구속 기소된 이 아무개 변호사(55)는 사법부의 수장인 최종영 대법원장 집안과 사돈간이다(40쪽 상자 기사 참조).

정씨 사건을 들여다보면 법원과 변호사·경찰·브로커가 두루 얽혀 있는 서초동 법조타운의 카르텔이 그대로 드러난다. 형사 사건 전문 외근 사무장 정우기씨는 검찰에 구속되기 전까지도 법조타운에서는 유능한 사무장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검찰과 법원 직원을 비롯해 함께 일했던 사무장들과도 관계가 좋았다. 정씨의 가족에 따르면, 정씨는 ‘남의 애경사라면 한밤중이라도 달려갈 정도’로 인맥 관리에 적극적이었다.

검찰 수사에 따르면, 정씨는 수임료 2천만원짜리 사건은 알선료를 6백만원 받았다. 정씨가 변호사 2명으로부터 챙긴 공식 알선료만 6억여원이다. 정씨는 30%를 알선료로 받은 뒤 자신의 옛 경찰 동료나 법조 브로커들에게 소개료로 10∼20%를 건넸다. 서초동 ㅇ변호사 사무실에 근무하는 사무장 ㄱ씨는 “브로커 정씨가 부장판사 출신 개업 변호사만 골라가며 사건을 알선한 것은 의뢰인들에게 ‘전관’을 강조하면 잘 먹히기 때문이다. 부장판사 출신이고 금방 개업했다고 말하면 지금도 열이면 아홉이 다 넘어온다. 검·경에 발이 넒은 정씨에게는 돈 버는 것이 땅 짚고 헤엄치기였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번 사건으로 변호사회 사무직원협회의 회원 관리 업무가 부실하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브로커 정씨는 1999년 서울 용산경찰서 경찰관으로 재직하면서 폭행 사건을 수사하다가 피의자들에게 유흥업소의 윤락 행위 사실을 눈감아주는 조건으로 유흥주점 업주로부터 5백만원을 받아 챙겨 특가법상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되었던 인물. 그 때문에 경찰서에서 추방된 정씨는 사무장으로 일할 수 없는 무자격자인데도 2000년 3월부터 서초동에서 사무장으로 일해왔다. 심지어 2001년 당시 서울지방변호사회 사무직원협회 회원 명부에는 버젓이 정씨의 얼굴 사진과 연락처가 기재되어 있다.

법조계 원로들은 정씨를 고용했던 변호사들이 하나같이 현직 법관 시절에 유능한 인물들이었다는 점 때문에 더 개탄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이 아무개 변호사는 서울지법 부장판사 재직 때 법원 내에서 신망이 높았던 법관이다. 이변호사는 2001년 1월부터 2002년 4월까지 1백18차례에 걸쳐 정씨를 통해서만 11억원의 수임료를 벌어들였다. 브로커 정씨가 사건 알선료 외에 접대비·활동비·판공비를 따로 요구하자 돈 문제로 정씨와 심하게 다투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변호사와 함께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한 아무개 변호사도 경기고·서울대를 졸업하고 인천지법 부장판사를 지냈다. 한변호사는 불구속 기소된 이 아무개 변호사가 월 천만원씩 주기로 하고 정씨를 고용하자 15일 만에 거액의 웃돈을 주고 정씨를 빼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변호사 한씨는 정씨를 형사 사건 전담 외근 사무장으로 스카우트한 뒤 올해 5월까지 1년 동안 형사 사건을 83건 수임했다. 사건에 연루된 변호사 4명은 현재 변호사 사무실을 정상 운영하고 있다.

법조계는 이번 추문이 빙산의 일각이라고 보고 있다. 현재 유능한 사건 브로커들은 많게는 수임료의 40∼50%까지 알선료를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서초동에서 활동하고 있는 변호사 ㅂ씨는 “지금 서초동은 1999년 대전 법조 비리 때보다 더 부패했다. 부끄러워 변호사를 못하겠다는 변호사가 한둘이 아니다”라고 개탄했다.

서초동에서는 ‘전관예우 믿다가는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한다’ ‘갓 개업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가 첫달에 겨우 3건을 수임했다더라’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고 있다. 개업한 지 두 달째인 유 아무개 변호사는 불황 속에서 벌어지는 서초동의 생존경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돈 되는 경제 사범 사건은 지검장이나 법원장 출신 거물들이 위임장도 안 내고 가져간다. 될 만한 사건은 부장판사·검사 출신 전관들이 사건 브로커를 고용해 싹쓸이한다. 연수원 출신 변호사들은 수임료 3백만∼5백만 원을 받고 돈 안되는 복잡한 사건이나 인권소송·민사소송에 몇 달간 시달리는 형편이다.”

법조 브로커 정우기씨 사건은 약육강식의 정글이나 다름없는 서초동의 부패 구조를 뿌리째 드러낸 추문으로 밝혀지고 있다. 대검 중수부(안대희 검사장)는 뒤늦게 지난 7월25일 전국 일선 지검과 지청 특수부에 ‘법조 브로커’ 부조리 사범 단속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서초동에서는 칼을 휘두르는 검찰도, 재판정의 판사들도 ‘전관’ 경력을 들이대는 변호사들 때문에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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