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축의 보복’ 계속되는가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3.04.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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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 대부분 동물에게서 발원…전문가들 “사스, 오리·돼지가 전파했을 수도”
또가축인가. 지난 4월8일 중국 광둥성에 대한 역학 조사를 마친 세계보건기구(WHO)가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의 원인 균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잠정 결론지었다. 감염 경로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전문가들은 사스가 광둥성의 가축들에서 출발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닭·돼지·소 같은 가축의 몸 안에 있던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로 옮으면서 변형을 일으켰으리라 의심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또다시 ‘가축의 보복’이 시작된 셈이다.

가축이 전염병을 통해 인류를 괴롭힌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42쪽 사진 참조). 김의석 교수(인제대 감염내과)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대부분의 전염병은 동물로부터 전파되었다”라고 말했다. 두창이나 페스트까지 거슬러올라갈 필요도 없다. 많은 사람이 걸리는 감기, 끊임없이 변종을 만들어내며 지난 100년 동안 가장 많은 인명을 앗아간 인플루엔자(독감 바이러스)도 가축에서 인간에게 옮겨졌다.

수백 종의 서로 다른 바이러스들이 일으키는 감기를 인간에게 처음 옮긴 것은 말이다. <전염병의 문화사>를 쓴 아노 카렌은 “사람과 말만이 감기에 걸리기 때문에 이 바이러스들은 4천~5천 년 전쯤 가축화한 말로부터 사람들에게 옮겨온, 모든 감기 바이러스의 ‘증조 할머니’로부터 내려왔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원래 철새의 창자 속에 있었다. 그러나 물에 사는 날짐승에게는 병을 일으키지 않았다. 철새의 배설물로 물 속에 나왔던 인플루엔자는 뭍의 생물들에게 옮겨오면서 골칫덩어리가 되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뭍으로 끌어올린 주범은 오리 같은 물새들이다. 오리는 물에서 놀다 바이러스의 침투를 받았고, 뭍에서 사는 짐승들에게 이 바이러스를 옮겼다. 닭은 오리와 같은 날짐승이지만 뭍에서 살기 때문에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병에 걸린다. 돼지도 오리가 옮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쉽게 감염된다(중국은 유라시아와 호주를 오가는 철새가 지나가는 길목이고, 중국의 농가에서는 오리와 돼지를 한 우리에서 기르는 경우가 흔하다). 특히 인간과 유사한 유전적 특징을 가진 돼지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생산 기지가 되곤 한다. 날짐승에게만 익숙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돼지 몸속에서 적응 훈련을 받은 뒤 사람에게 침투하는 것이다.

돼지 몸속에서 바이러스가 새 모습을 갖추면 사람은 거기에 대항할 면역이 없어 속수무책으로 쓰러질 수밖에 없다. 지난 100년 동안 가장 많은 인명을 앗아간 1919년 스페인 독감, 1957년 아시아 독감, 1968년 홍콩 독감, 1977년 소련 독감 등이 좋은 예이다. 특히 스페인 독감이 유행할 때에는 세계 인구 2명 중 1명이 이 병에 걸렸고, 2천만명이 넘는 사람이 희생당했다. 지금도 독감이 한번 유행하면 세계에서 약 2만명이 사망한다.

말레이시아에서 발생한 니파 바이러스(일명 말레이시아 뇌염)를 인간에게 옮긴 것도 돼지였다. 이 병원체는 박쥐에게 있었는데, 박쥐가 쪼아 먹은 과일을 사료로 먹은 돼지가 감염된 것이다. 병든 돼지는 기침을 통해 사람에게 바이러스를 넘겨주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 전염병 관리에 1천2백만 달러 이상을 지출해야 했고, 수출길이 막힌 돼지 농가는 1억1천만 달러의 손해를 보았다. 당시 이 말레이시아 뇌염에 걸린 환자는 2백60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40%가 사망했다. 살아 남은 환자의 절반은 후유증으로 고생했다.

오랜 세월 인간의 일용할 양식으로 사랑받아 온 소 역시 적지 않은 전염병으로 인간에게 ‘보복’했다. 멀게는 두창이나 결핵을 꼽을 수 있고, 가깝게는 변형 크로이츠펠트 자콥병(인간광우병)이나 탄저병을 들 수 있다. 결핵균은 야생 소의 몸안에서 살 때는 거의 증상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소를 가축화한 사람에게 옮겨오면서 치명적인 질환을 일으켰다. 인간광우병은 소를 속성으로 키우기 위해 폐기된 소나 양의 부산물로 만든 동물성 단백질을 첨가해 먹이는 과정에서 나왔다. 지난해 생물학 무기로 살포되어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던 탄저균 역시 소와 같은 초식 동물이 인간에게 옮긴 것이다. 흙 속에 사는 탄저균을 풀과 함께 섭취한 소와 양 고기를 섭취하면 인간들도 감염된다. 지난 2000년 한국에서도 죽은 소를 도살한 사람 둘이 이 병에 걸려 죽었다.

지난해 멸균 처리하지 않은 생우유를 마신 사람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브루셀라병에 걸려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브루셀라병도 소나 양 같은 가축이 인간에게 옮긴 전염병이다. 1990년대 중반 일본을 비롯한 전세계를 공포에 떨게 하며 햄버거에 대한 경계심을 일깨웠던 O-157 역시 소가 인간에게 날린 ‘직격탄’이다.

개는 공수병을 인간에게 옮긴다. 공수병은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려서 생기는 질병으로, 드물기는 하지만 매우 치명적이다. 닭 역시 숱한 바이러스와 전염병을 인간에게 옮기는데, 특히 살모넬라와 같은 식중독 균은 인간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양·개·새도 이 병에 걸리지만, 사람들은 주로 살모넬라증에 감염된 닭고기나 달걀을 먹음으로써 이 병에 노출된다. 가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원숭이도 인간과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전염병을 옮긴다. 에이즈와 에볼라가 대표적이다. 이 질병들은 인간이 아프리카 밀림에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 인간과는 무관한 질병이었다. 하지만 벌목과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원숭이들의 공간을 공격하다가 원숭이들에게 ‘복수’를 당한 것이다.

이처럼 가축을 통해 인간에게 옮겨온 전염병은 셀 수 없이 많고, 산업 사회가 발전하면서 발생 빈도와 피해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 오명돈 교수(서울대 감염내과)는 “유목 시대에는 많지 않았던 전염병이 농경 사회, 산업 사회로 오면서 늘고 피해가 커진 까닭은 짐승들을 가축화해서 사람 옆에 두었기 때문이다. 또 인구 집단이 커져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새로운 숙주를 찾기 쉬워진 것도 한 원인이다”라고 말했다.

인간과 동물의 비사교적인 접촉이 늘어나면서 화를 부르기도 한다. 황상익 교수(서울대·의사학)는 “인간은 지구상의 어떤 생물 종보다 다양한 동물과 만난다. 그것도 우호적으로 접촉하는 게 아니라 마구잡이로 먹고 학대하지 않는가”라고 지적했다. 인간들은 지금도 세상 곳곳에서 동물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주고 있다. 그 같은 동물 학대가 멈추지 않는 한 가축들의 처절한 복수는 계속될지 모른다. 인간광우병이나 사스는 그 ‘예고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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