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먹여살릴 혁신기술 현장을 가다 ⑤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2004.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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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전략 컨설팅 업체인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시장 성장률과 점유율을 지표로 한 기업의 사업을 네 가지로 나누었다. 성장률과 시장 점유율이 높은 사업은 ‘스타’(별), 성장률은 낮지만 점유율이 높은 사업은 ‘캐시카우’, 성장률은 높지만 점유율은 낮은 사업은 ‘문제아’, 성장률과 점유율이 모두 낮은 사업은 ‘개’로 분류했다. BCG매트릭스라고 불리는 이 방식에 따르면, 캐시카우에서 창출한 현금을 문제아 사업이나 혁신 사업에 투자해 차세대 스타나 캐시카우를 양성해야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주식회사 한국’의 캐시카우로 분류할 만한 산업은 반도체와 휴대전화 단말기 산업이다. 한국 업체들은 경쟁 업체들을 하나씩 제압하며 해마다 수조원에 이르는 현금 흐름을 창출해가고 있다.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갈 차세대 주자, 즉 스타나 문제아 산업으로 꼽히는 분야가 디지털TV다. 해마다 두 배가 넘게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디지털TV 시장에서 한국 업체들은 주요 원천 기술과 제품 개발력을 앞세워 시장 지배력을 키워가고 있다.

세계 디지털TV 시장의 40%를 차지하는 북미 지역의 디지털TV 전송 방식은 VSB(잔류측파대역변조). LG전자가 100% 지분을 소유한 미국 제니스가 VSB의 원천 기술을 갖고 있어 해마다 1억 달러가 넘는 로열티 수입을 거둘 것으로 기대된다. LG전자는 자회사가 가진 원천 기술을 기초로 하여 5세대 칩을 개발해 기술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시사저널>은 ‘혁신 기술 현장을 가다’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편으로 세계 디지털TV 기술을 주도해 가는 LG전자 디지털TV 연구소를 찾았다. 디지털 TV ‘황금 열쇠’를 쥐다
VSB 원천기술 소유한 LG전자, 5세대 고화질 칩도 개발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되어 날아올랐다.’ LG전자가 1995년 수억 달러를 들여 인수한 미국 텔레비전 제조업체 제니스를 일컫는 말이다. 제니스는 브라운관(CRT) 텔레비전 시장이 크게 위축되고 차세대 텔레비전으로 바뀌는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유럽이나 아시아의 경쟁 업체에게 안방인 미국 시장까지 내주어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LG전자에게는 애물이 된 셈이다. LG전자는 미국 시장에서 자사가 개발한 고부가가치 제품은 LG 브랜드를 쓰고, 저가 보급형 제품에 제니스라는 브랜드를 제한적으로 활용했다.

국제 기구 ATSC(Advanced Television System Comittee)가 1997년 제니스가 보유한 지상파 디지털TV 전송 방식인 VSB를 북미 지역 디지털TV 전송 방식으로 결정하면서 상황은 크게 변했다. 제니스를 통해 원천 기술을 확보한 LG전자는 1990년대 초부터 시작한 디지털TV 연구·개발(R&D)을 가속화해 디지털TV와 관련해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기술을 잇달아 발표했다. LG전자가 거둔 연구·개발 성과는 올해 초 5세대 고화질 디코더 칩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LG전자는 차세대 성장 산업으로 디지털TV를 꼽는다. LG전자는 핸드셋(hand set)·어플라이언스·디스플레이와 함께 디지털TV를 1등 전략 사업군으로 분류하고 연구·개발 부문에 해마다 6천억원을 쏟아 붓고 있다. 디지털TV 연구 인력만 2천명 가량. 디스플레이 기술까지 포함하면 3천명이 넘는다. 서울·평택·구미에 산재한 디지털TV연구소의 두뇌는 서울대학교 연구공원 내 연면적 2천5백60평에 자리 잡은 LG전자 디지털TV연구소다. 지상 5층 지하 1층인 이 연구소에는 3백명이 6~7개 그룹으로 나뉘어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핵심 칩·시스템·소프트웨어 모듈 등으로 세분된 그룹에는 40~50명이 속해 있다.

LG전자 연구원들은 1990년 초까지만 해도 제니스로부터 핵심 기술을 이전받았으나 1998년을 지나면서 오히려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제니스는 LG전자가 인수할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앞선 디지털TV 전송 기술을 갖고 있었다. 특히 디지털TV의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칩 기술을 축적하고 있었다. 1~2세대 칩 개발 과정은 제니스가 주도했다. 하지만 3세대 칩부터는 LG전자가 이끌어 왔다.
수신율·문제점 극복하고 생산원가 낮추기 주력

순풍에 돛 단 듯 순항하던 LG전자의 디지털TV 연구가 암초를 만난 것은 1999년. 미국 방송국 싱클레어가 VSB 기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싱클레어는 제니스 방식이 유럽식 디지털TV 전송 방식보다 수신율과 화질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디지털TV 방송을 순차적으로 도입하던 국내 방송사들도 싱클레어 주장에 동조했다. 문화방송(MBC)이 2000년 실시한 미국식과 유럽식 전송 방식을 비교하는 시험에서 VSB 송출 방식의 도심 지역 수신율이 유럽 방식보다 떨어진다는 결과가 나왔다.

VSB 방식이 도심 지역 같은 밀집 지역에서 수신율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방송 송출을 택배 서비스와 비교하자면 VSB 방식은 수송량이 많은 기차나 선박에 비유할 수 있다. 수송량이 많다 보니 고화질 구현에는 유리하지만 집앞까지 일일이 찾아가는 침투성에서는 뒤떨어진다. 반면 유럽 방식은 소형 트럭에 비유할 수 있어 수송량은 적으나 집앞까지 배달하기에는 유리하다. 밀집 거주 지역에 디지털 방송을 송출할 때 유럽식이 낫다는 평가는 이에 근거한다. 이와 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방송사를 비롯해 방송 관련 기관들이 VSB 방식 도입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들고 일어났다.

LG전자 디지털TV 연구팀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논란이 증폭되자 디지털TV연구소에 도심 지역 수신율을 높일 수 있는 핵심 칩셋을 개발하라는 특명이 부여되었다. 칩셋 연구 그룹은 4세대 칩까지 개발하면서 축적한 기술력을 총동원해 5세대 칩셋 개발에 나섰다. 고작 20명에 불과했던 LG전자 칩셋 연구팀은 올해 초 VSB 기술이 가진 한계를 극복한 칩셋을 개발해냈다.

싱클레어는 올해 중순 5세대 칩이 장착된 제니스 제품을 다시 실험했다. 실험 결과 유럽 방식 못지 않은 수신율을 보인다고 결론을 내렸다. 싱클레어가 이의를 거두어들이자 국내 방송사들도 한 발짝 물러났다.

디지털TV연구소는 이제 칩셋 성능을 높여 가면서 생산 원가를 낮추는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전자 제품에서 차별화와 함께 생산원가 우위가 제품 경쟁력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조택일 LG전자 디지털TV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경쟁 업체인 삼성전자나 파나소닉보다 생산 원가가 낮은 제품을 얼마나 빨리 만드느냐가 디지털TV 시장에서 승부를 가르므로 이 분야에 연구개발력을 집중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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