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경기, 죽었나 죽였나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4.09.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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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값 안 내리고 거래만 ‘뚝’…유동자금 많아 언제든 ‘광풍’ 불 가능성
집값이 오르면 당신은 행복한가, 아니면 괴로운가. 수도권의 주택 보급률은 92.8%, 서울은 86.3%이다. 그렇다면 수도권 가구 열에 아홉, 서울시 열 가구 가운데 여덟 가구는 집값이 오를수록 즐거운 비명을 질러야 할 것이다.

현실을 보자. 건설교통부 자료에 따르면, 2000년 전국에서 자기 집을 소유한 가구 비율은 54.2%이다. 도시로 가면 이 수치는 더 떨어진다. 서울시 자가점유가구율은 40.9%, 수도권은 47.6%이다. 집을 가진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많고, 나머지 집은 한 가구가 2~3채씩 소유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집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것을 반길 수만은 없다. 이왕이면 더 넓고 좋은 집에서 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지금 살고 있는 작고 낡은 집을 팔고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하기 위해 한푼 두푼 열심히 모으지만, ‘내 집’의 가격 오름세는 내 집보다 크고 좋은 ‘남의 집’의 오름세를 따라잡지 못한다.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 현대아파트 26평형 시세는 4억2천만원인데, 34평형은 6억8천만원이다. 2억6천만원을 모아 8평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하려면 한 달에 100만원씩 꼬박꼬박 적금을 부어도 20년은 족히 걸린다. 아파트값이 오를수록 큰 평형과 작은 평형 사이의 가격 차는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또 하나, 집이 주거 목적이 아닌 머니게임의 수단으로 이용되면서 이 게임에 뛰어들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까지 일할 의욕을 잃게 만들었다. 전업주부였던 유선희씨(가명)는 2001년부터 천만원을 가지고 부동산 투자에 뛰어들어 2년 동안 8천만원의 수익을 얻었다. 주상복합 아파트의 분양권을 사고 파는 식으로 몇 천만원씩 시세 차익을 남겼던 것이다.

유씨는 “한 달에 며칠만 움직이면 웬만한 월급쟁이 연봉을 벌었다”라고 말했다. 부동산 투기 붐이 한창이던 최근 몇 년 동안 유씨 같은 사람을 주변에서 만나기는 어렵지 않았다. 어쩌다 한탕 뛰는 것으로 1년 연봉을 벌 수 있다는데 누가 하루 열 시간씩 아둥바둥 일하고 싶겠는가. 한국은행 김태동 금융통화위원이 지적했듯, 최근 3년 동안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면서 최소 5백조원의 불로소득이 생겼다. 이 돈의 대부분이 50만명 정도의 주택과 땅 소유자에게 집중되었다.

‘10·29 대책’ 등 정부가 부랴부랴 부동산 규제 정책을 내놓으면서 이런 현상은 주춤해졌다. 그런데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일각에서는 부동산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어가고 있다. 일부 주류 언론들은 ‘강남 집값이 10% 이상 빠졌다’ ‘지나친 부동산 규제로 경기가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며 규제 완화를 은근히 유도하고 있고, 정부 역시 ‘부동산 시장이 오버킬되었다’며 부동산 정책의 틀을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언론에서 호들갑 떠는 것처럼 아파트 가격이 큰 폭으로 떨어진 것은 아니다. 내 집을 마련하려는 실수요자 처지에서 볼 때 서울 시내 아파트는 여전히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다. 예컨대, 10·29 대책이 발표되기 직전인 2003년 10월 강남구 압구정동의 신현대아파트 35평형은 6억8천5백만원이었는데, 2004년 9월 현재 6억9천만원이다. 오히려 5백만원이 올랐다. 2000년 1월 이 아파트의 거래 가격은 3억1천5백만원이었다. 물론 재건축 아파트 가격은 떨어지고 있다. 2000년 1월 2억3천만원에 매매되다가 지난 6월 8억7천5백만원까지 올랐던 강남구 대치동 도곡 주공 1차 13평형 아파트는 9월 현재 시세가 8억6천5백만원이다.

서울 시내 대부분 아파트 가격이 부동산 투기 붐이 일기 전은 물론이고 지난해 하반기 가격만큼도 떨어지지 않았다(표1 참조). 물가 변동률과 도시근로자 가구 소득 추이와 비교해보면 아파트 가격은 지나치게 상승했다(표2 참조). 지난 3년 동안 아파트 가격 상승률은 경상GDP 성장률보다 4배 이상 높았다.
분양가 역시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닥터아파트 조사에 따르면, 9월7일부터 분양한 서울 8차 동시분양 아파트의 평당 분양가는 9백84만원이다. 지난 7차 동시분양(1천4만원)보다는 평당 20만원 낮아졌지만, 분양가가 비싼 강남권 물량이 적었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구의 경우 올해 상반기 평균 분양가는 지난해 상반기에 비해 약 30% 상승했다. 게다가 지역별 분양가 편차는 여전히 크다.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의 ‘한강로 e-편한세상’은 평당 1천6백58만원으로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부동산 시장이 꽁꽁 얼어붙었다는 지적은 사실이다. 부동산 활황기 때 가장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졌던 서울 강남과 목동 일대 부동산중개업소는 파리만 날리고 있다. 만나는 공인중개사마다 ‘거래 성사는커녕 손님 구경하기도 힘들다’고 토로했다. 목동에서 10년 넘게 부동산 중개업을 해온 공인중개사 이명희씨는 “한 달에 매매 1건, 전세 5건 하기도 어렵다. 사무실 유지비도 못 건져 그동안 모았던 돈만 까먹고 있다”라고 말했다. 비인기 지역에서 분양하는 아파트들은 청약 신청자가 적어 미달되기도 한다.

‘거래 마비’라고 부를 만큼 부동산 경기가 침체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정부의 강력한 부동산 규제 정책에 있다. 건설산업연구원 김현아 박사는 “취득세·등록세·양도소득세와 같은 거래세가 과중하고, 실거래가 신고제 같은 제도로 인해 투기자든 실수요자든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도록 만들어 부동산 시장의 동맥경화를 불렀다”라고 주장했다.

부동산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매도자와 매수자와의 기 싸움’이다. 강남의 한 부동산중개업자는 “급매물이 쏟아져야 아파트 가격이 떨어지는데, 아직은 급매 물량이 많지 않다. 2~3년 전 부동산 활황 때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산 사람들이 아직은 매물을 내놓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팔려는 사람이나 사려는 사람 모두 관망세여서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사례를 보자. 이규선씨는 2001년 가을 경기도 죽전에 있는 59평짜리 아파트를 4억1천만원에 분양받았다. 미분양 아파트여서 계약금은 2천만원에 불과했다. 당시 이씨는 이 아파트 분양권을 도중에 팔아 시세차익을 챙길 생각이었다. 2천만원을 은행에 넣어두는 것보다는 낫다는 계산이었다. 중도금은 은행에서 자동 대출되는 아파트였고, 입주 시점까지는 3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이 아파트 분양권 프리미엄은 1억원까지 치솟았지만 이씨는 좀더 오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부동산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분양가 프리미엄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입주 시기가 다가오면서 이씨는 고민에 빠졌다. 프리미엄 5천만원을 받고 지금이라도 팔아버리든지, 아니면 잔금 1억6천만원을 내고 등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씨는 “대출받은 중도금 이자와 세금 등을 따지면 프리미엄으로 5천만원을 받아봤자 별로 남지도 않는다. 게다가 1억원까지 올랐던 아파트인데 지금 와서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파트 가격은 언젠가 반드시 오르게 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부동산 활황기에 이씨처럼 시세 차익을 노리고 수중의 1천만~2천만 원만으로 아파트를 샀던 이의 상당수는 아직 급매물로 내놓을 만큼 자금 압박을 받고 있지 않다. 은행 금리가 워낙 싸고, 제2 금융권에서 아파트 가격의 90%까지 대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팔 사람들은 가격이 오르기를 기대하며 버텨보겠다는 것이고, 살 사람들은 이제나저제나 가격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다 보니 아파트 가격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고, 거래 또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현 상황의 주된 원인을 ‘매수자와 매도자의 기싸움’보다는 ‘과다한 규제로 인한 거래 위축’이라고 진단한 듯하다. 재정경제부 박병원 차관보는 “투기 수요를 억제해 집값을 안정시키겠다는 의지와 부동산을 경기 조절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정부 의지는 분명하다. 다만 동맥경화 상태에 놓인 거래만큼은 숨통을 터줘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보유세 부담은 높이고 거래세는 낮추어, 투기도 잡고 부동산 경기에도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것이다. 투기과열지구나 주택·토지 투기지역, 주택거래신고제 등을 손질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한탕’을 기다리는 시중 부동 자금이 여전히 많고, 분양가나 아파트 가격이 거의 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규제를 완화했다가는 아파트값만 더 오르지 않겠느냐고 우려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 시장이 침체한 상황에서도 건설사들은 여전히 분양가를 높게 책정해 인근 아파트값까지 끌어올리고 있고, 그런 곳에는 어김없이 투기 수요가 몰려들고 있다.

건설산업연구원 김현아 박사는 “거래 활성화를 위해 숨통을 열어줄 필요는 있지만, 투기꾼과 실수요자 구분이 모호한 현실에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정책 카드는 많지 않다”라고 말했다. 규제 완화가 곧바로 투기로 이어질 가능성은 잔존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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