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과 부산 ‘초일류’ 합작 로비
  • 부산·金芳熙 기자 ()
  • 승인 1995.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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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상공인이 털어놓는 ‘삼성 승용차 진출 작전’ /“정치권 공략이 주효했다”
지난 93년 7월 부산시청 지역경제국장실에 세 사람이 들어섰다. 부산기계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이던 金 志 동신유압 사장과 현지 언론인 2명이었다. 당시 蘇尙譜 지역경제국장(현재 강서구청장을 사직한 상태다)과 안면이 있던 이들은, 하나같이 3장으로 된 서류를 들고 있었다.

맨 첫장은 이들 중 한 언론인이 작성한 `‘삼성그룹의 승용차시장 진출 전략과 부산 경제에 미칠 영향’이라는 제목의 A4 용지 1장 분량의 보고서. 나머지 2장은 <시사저널> 93년 7월1일자(192호) 기사였다. 이 기사가 삼성그룹의 승용차 공장을 부산에 유치하려는 이 지역 상공인들의 노력에 불을 지핀 것은 이유가 있었다.

당시 승용차시장 진출을 염두에 두고 논리와 전략을 개발하던 삼성그룹 관계자들의 말을 빌린 이 기사는, 공장 입지와 관련해 부산 상공인들이 주목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 삼성그룹은 승용차 공장 입지 세 군데를 놓고 저울질하고 있었다. 삼성그룹의 연고지이자 노태우 전 대통령이 유치 희망을 밝힌 대구직할시와, 이미 상용차 생산 라인이 들어서 있던 경남 창원시, 그리고 삼성그룹내 석유화학 업체들이 입주해 있는 대산 종합화학단지가 그 후보지였다.

부산은 유력 후보지에서 제외돼 있었다. 현 정권의 기반이 되는 지역이라는 부담 때문에 승용차 공장을 부산에 유치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 삼성그룹의 판단이었다. 더욱이 대구와 창원의 경우 해당 지역 고위 기관장들의 승용차 공장 유치 로비전이 이미 시작돼 있었다.

공장 유치 열망·승용차 생산 ‘이해’ 맞아

‘삼성 승용차 부산 유치 작전’의 숨은 주역이 된 김 지 사장은 “부산 상공인들은 이 기사에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라고 회고한다. “그 기사 하나로 시작된 승용차 공장 유치 노력이 지금과 같은 결과를 가져 온 것이다.”

이들이 제시한 보고서와 기사를 본 소국장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고사 직전인 부산 경제를 살려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떠맡고 있는 그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다고 판단했다. 3명과 의기투합한 그는 내친 걸음에 鄭文和 당시 부산시장(현 지방행정연구원장)을 만나 상황을 설명했다. 부산 상공회의소 같은 경제 단체가 아니라 몇몇 기업인과 언론인이 나서서 유치 작전을 벌인 데는 사정이 있었다. 각 경제 단체에는 기존 승용차 제조업체들이 회원으로 소속돼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이해를 배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삼성 승용차 공장 부산 유치 작전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됐다.

지난 4월13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북경 발언 가운데는 이에 대한 평가가 들어 있다. 삼성그룹의 승용차시장 진출과 관련해 그는 “부산 시민이 들고 일어나 해준 것이지, 정부에 빚진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부산 상공인들의 유치 작전이 성공해 삼성그룹이 승용차 시장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흔히 경쟁사들의 반대를 막으려고 부산의 여론을 이용한 것으로 알려진 부산과 삼성의 혈맹 관계는 재평가돼야 하지 않을까.

“삼성의 승용차 공장을 부산에 유치하려고 하면서 물론 삼성과 접촉했다. 회장 비서실을 통해 그들에게 여러 가지 의견도 제시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공작에 놀아난 것은 아니다.” 유치 작전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의 말이다. 그는 삼성그룹의 승용차시장 진출 여부가 고비에 달했던 지난해 말, 부산 상공인들이 현지 언론에 왜 삼성그룹이 승용차시장에 진출해야 하는지에 관한 광고를 낼 때의 예를 든다. 당시 삼성그룹이 광고비를 대겠다고 제안하자 부산 상공인들은 이를 거절했다.
94년 4월께 부산 상공인들의 유치 작전은 일단 실패로 돌아가는 듯했다. 삼성그룹이 기술 도입 신고서를 제출하려 하자, 상공자원부가 이를 반려하겠다는 뜻을 분명히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산업연구원(KIET)도 비록 분명히 드러내진 않았지만, 삼성의 승용차시장 진출을 유보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런 기류를 감지한 삼성그룹은 아예 기술 도입 신고서를 제출할 수가 없었다.

이후 부산 상공인들과 삼성그룹의 상황 판단은 엇갈렸다. 삼성그룹은 승용차시장에 진출하려던 최초의 시도가 좌절된 이유는 상공부를 공략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기술도입 신고서를 반려할 수 있는 권한은 형식상 상공부 실무자에게 있었고, 그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당시 주로 외곽에서 말을 흘려왔던 삼성그룹으로서는 상공부 관료들을 무마하는 것이 만만찮다고 판단했다. 삼성그룹의 승용차시장 진출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해온 金喆壽 당시 상공부장관(현 세계무역기구 사무차장 겸 외무부 국제통상대사)이 경질될 때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됐다. 그러나 김장관이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에 입후보해 쉽게 경질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초조해졌다.

공단 땅값 놓고 삼성과 부산시 ‘마찰’

반면에 부산 상공인들은 상공부보다는 부산에 대해 더 우호적일 수밖에 없는 고위층을 설득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부산 출신 국회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탄원서를 돌리고 협조를 구했다. 특히 朴寬用 전 대통령 비서실장(현 대통령 정치 특보)과 崔炯佑 전 내무부장관은 이 문제에 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다. 당시 부산 상공인들과 삼성그룹의 연락책은 아예 부산에 내려와 승용차시장 진출을 진두 지휘하던 삼성중공업 李庚雨 전무(현 21세기 기획단 부사장)였다.

결국 삼성그룹은 초기의 전략을 바꿔 승용차시장 진출 전략과 공장의 부산 입지 계획을 연계하는 방법으로 부산 상공인들의 유치 작전을 거들기 시작했다.

결국 이들의 전략은 맞아 떨어졌다. 지난해 12월 드디어 난공불락의 철옹성 같던 상공부가 손을 든 것이다. 특히 부산 사람들과는 악연인 것처럼 보였던 당시 김철수 상공부장喚?朴雲緖 차관이 입장을 선회한 것은 뜻밖이었다. 부산 상공인들은 두 사람이 막판에 권부의 의중을 읽고 이를 중시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정작 부산과 삼성의 밀월 관계에 이상 기류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상공부가 삼성그룹의 기술 도입 신고서를 수리하고 나서부터였다. 승용차 공장이 들어설 신호공단과 부품 업체들이 입주할 녹산공단의 땅값을 놓고 부산시와 삼성측이 마찰을 빚고 있는 것이다.

삼성그룹은 98년에 25만대, 2000년대에 50만대 생산 능력을 가진 공장을 신호공단 55만평 부지에 세우고, 녹산공단 지역에는 삼성전기를 비롯해 협력 업체들을 입주시키려 하고 있으나, 평당 백만원을 웃도는 땅값에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또 해당 공단의 개발 상태가 부실해 공장 건설 계획이 3개월 이상 늦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북경에서 “부산시가 땅장사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난한 바 있다.

부산 상공인들은 부산시와 삼성그룹 간의 이 논란에도 개입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은, 부산에 기반을 둘 삼성 승용차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땅값을 내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노력으로 현재 녹산공단의 평당 땅값은 50만원대로 떨어졌고, 신호공단의 경우 60만원 수준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렇다면 부산 상공인들은 왜 삼성그룹의 승용차 공장 문제를 자기 일처럼 생각할까. “술 한잔 얻어 먹은 적 없다.” 이번 작전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김 지 사장은 삼성그룹이 승용차 시장에 진출하게 된 대가로 당장 얻을 것은 없다고 말한다. “다만 97년 이후 우리 공장에서 생산하는 기계가 삼성 덕에 많이 팔릴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다. 모든 부산 지역 상공인들이 아마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활력을 잃어가는 부산 경제를 감안하면 고용 창출 효과가 더욱 중요한지도 모른다. 삼성그룹이 2월 말부터 부산 지역 대학·전문대·공업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실시한 취업 설명회에 따르면, 삼성자동차는 2000년까지 부산 지역에서 신규 인력을 1만6천명 채용할 계획이다. 내년에 전문대 졸업생 천명과 대졸자 백명을 선발하는 것을 시작으로, 매년 천명 이상 뽑게 된다. 유치 작전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소상보 당시 부산시 지역경제국장은 “삼성 승용차 공장 부산 유치가 취업률이 낮은 부산 지역 고급 인력들에 숨통을 터줄 것이다”라고 기대한다.

삼성그룹은 애당초 승용차 공장을 세우기에는 정치적으로 민감해 부적절하다고 판단했던 부산에서 4월26일 공장 건설을 향한 첫 삽을 뜰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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