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시장, 흥청대던 날은 가고…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6.12.1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장 점유에 집착, 앞으로 남기고 뒤로 밑져…완전경쟁으로 업계 판도 변화 임박
직장인들 가운데는 퇴근 시간만 되면 술 한 잔 생각이 간절해지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 유혹을 뿌리치고 곱게 집에 들어간 뒤에도 텔레비전 광고에서 흘러 나오는 맥주 따르는 소리에 무심코 냉장고를 열어 보는 경우도 있다.

주당들 가운데는 퇴근 후 음주를 즐기려고 저녁이 되면 커피라든가 차 같은 음료를 일체 입에 대지 않는 이들도 있다. 갈증을 극대화해 몸이 술을 갈구하는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다. 이쯤 되면 ‘파블로프의 개’가 되려고 작정한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술에 완전히 빠져들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이런 이들조차도 잘 모르는 사실은 자신이 얼마나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소비자인가 하는 점이다. 자신이 즐기려는 것이 술 그 자체라기보다는 술자리 상황이라든가 분위기, 또는 당시의 심리 상태라는 점 역시 의식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명예 퇴직한 사람들 가운데는 유독 술 맛이 없다거나 술 상표간의 차이를 예전처럼 느낄 수가 없다는 사람이 많다. 이런 점에서 퇴근 뒤 한 잔의 만족감은 술 자체보다는 하루를 열심히 땀 흘려 일했다는 자족감에서 말미암는 듯하다.

지극히 안정적인 독과점 시장이었던 술 시장이 불안해진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올해처럼 이 시장이 불확실하게 느껴진 적 또한 없다는 게 주류업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소비자는 ‘어떤 술이 좋다더라’라는 말에 금방 현혹되어 쉽게 신제품을 찾았고, 이 때문에 주류 제조업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신제품을 내놓아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고가화 전략은 제살 깎기 경쟁

주류 시장에 각종 유언비어와 흑색 선전이 난무하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사실 이런 상황은 선진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레몬을 띄워 먹는 것으로 유명한 멕시코산 맥주 ‘코로나’가 유럽 시장에서 붐을 일으켰던 90년대 초반 코로나에 발암 물질이 들어 있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신상품들이 하나같이 품질 차별화를 선언하고 나오는 것도 소비자들 사이에 도는 미묘한 평판이 이 시장에서 승부를 좌우하는 요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쏟아져 나오는 술의 품질에 어떤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지, 또 소비자들이 이를 식별해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서울 강남 룸살롱에서 나온 평판이 제품의 수명을 좌우한다는 고급 위스키를 보라. 폭탄주까지 불사하는 룸살롱 음주 문화를 고려할 때 소비자들이 술 맛의 차이를 제대로 느끼고 있겠는가.” 박진형 대신경제연구소 연구원의 말이다.

위스키 시장이 급성장하는 것도 과거 주류 시장을 이해하던 시각만으로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현상이다. 경기가 나쁠 때는 값싼 술이 호조를 보이고 경기가 좋아지면 비싼 주류가 많이 팔린다는 업계의 경험은 올해도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지만, 위스키 시장만큼은 늘 예외였다.

올해 위스키 시장은 판매액 기준으로 30% 이상의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내년 초부터는 소주 시장보다 규모(매출액 기준)가 더 커지게 될지도 모른다(<도표 1> 참조). 소득 규모가 올라가면서 소비자들이 점차 고급 술을 선호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국내 위스키 시장의 경우에는 도가 지나치다.

위스키 시장 내에서도 원액 숙성 연수가 12년 이상인 프리미엄급 위스키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물론 이는 91년 2백%에 달했던 위스키에 대한 주세가 1백%로 떨어져 가격이 크게 내렸기 때문이다. 현재 7백㎖ 들이 프리미엄 위스키 출고 가격은 1만5천∼2만3천원 선으로, 종전 위스키 가격 수준이다. 한국에 위스키 원액 전량을 공급하는 유럽연합(EU)의 통상 압력이 위스키 주세 인하의 주요 원인인데, 올해 말 우리나라와 EC 사이에 주세 협상이 열릴 예정이어서 위스키 값 인하 요인이 또 생길지도 모른다.

이른바 프리미엄 주류의 인기는 주종과 상관 없이 확산되고 있다. 조선맥주가 93년 하이트를 출시하면서 프리미엄 맥주 시장은 급격히 커졌다. 가격 차가 조금 있긴 하지만, OB라거(OB맥주)·하이트·카스(진로쿠어스) 중심의 준프리미엄 맥주, 카프리(OB맥주)와 수입 맥주 중심의 프리미엄 맥주를 합친 고급 맥주가 올해 전체 맥주 시장의 60%를 넘어설 것으로 업계는 내다보고 있다.

올해 초 보해양조가 김삿갓을 내놓으면서 형성된 프리미엄 소주 시장 역시 참나무통맑은소주(진로)와 청산리벽계수(두산경월)의 가세로 올해 전체 소주 시장의 8%를 차지할 전망이다. 더욱이 각사의 생산 계획에 따르면, 내년 고가 소주 시장은 전체 시장의 25%에 육박하게 된다.

주류 시장 전반의 고가화에도 불구하고 이 추세가 주류업계의 수익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주류 제품의 고가 차별화 전략이 술 시장 자체가 완전경쟁 체제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염경섭 선경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시장 내에서 경쟁이 가열되면 주류업체들은 당장 시장점유율을 늘리는 전략에 치중할 수밖에 없게 된다”라고 말한다.
조직 폭력 연계된 유통 체계 통제 불능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존 제품의 수명 주기를 단축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신제품을 내놓고 요란한 홍보와 판촉 활동을 벌여야 한다. 주요 주류업체들이 모두 이런 전략을 구사하는 바람에 히트 상품의 수명 주기가 1년을 넘기기도 힘든 상황이 되어 버려, 업체들은 수익성에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증시에 상장된 주요 주류업체들이 내놓은 올해 추정 매출액은 지난해에 비해 적게는 8%에서 많게는 36%까지 늘어난 금액이다. 그렇지만 실제 수익성이 그처럼 늘어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완전경쟁 체제로의 이행은 주류 산업과 관련된 주요 정부 규제가 폐지되면서 불가피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93년 희석식 소주(시중에 판매되는 대부분의 소주)의 면허가 개방되자 두산그룹이 지방 소주사인 경월을 인수했다. 또 지난해 소주 첨가물료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자 올해 벌꿀이나 올리고당 등의 천연 감미료를 첨가한 프리미엄 소주가 상당수 출현했다.

특히 97년과 98년에는 주류업계 전체가 들썩일 만한 메가톤급 조처들이 발표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 가장 논란이 되는 현안은 내년에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헌법재판소의 자도주(自道酒) 의무구매제에 대한 판결과 그 이듬해에 있을 주류 시장 완전 개방이다. 자기 지역에서 생산되는 소주와 탁주를 50% 이상 우선적으로 판매하게 하는 자도주 의무구매제는 91년 일시 폐지했다가 지난해 10월 부활돼, 현재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신제품을 중심으로 하는 완전경쟁 체제가 불가피하며, 일단 사운을 걸고 내놓은 신제품이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당하면 회사 전체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더욱이 주류 시장이 완전 개방되면 외국 업체가 국내에서 술을 만들어 팔 수도 있게 된다.

주류업체간 벽도 완전히 허물어지고 있는 추세다. 소주 시장을 이끌어왔던 진로가 맥주 시장에 뛰어드는 것에 맞서 두산이 경월을 사들여 소주 시장에 진입했는가 하면, 94년에는 진로와 조선맥주가 위스키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주류업계의 ‘빅3’로 통하는 OB와 진로, 조선맥주 사이의 경쟁에서 마지막 시나리오로 여겨졌던 조선맥주의 소주 시장 진출도 이미 기정 사실이 되고 있다. 조선맥주측은 진출 시기만을 저울질하고 있다고 밝혔다.

주로 교포들이 실질적인 소유주이긴 하나, 외국 주류업체들 역시 국내 소주 시장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야타이’라는 상표로 일본에 진출한 미국 누택인터내셔널이 한국 상륙을 모색하고 있는 가운데 역시 미국 알렉산더디스틸러스는 ‘님바스’라는 소주를 우리나라에서 판매하기로 하고 대리점을 모집하고 있다. 더욱이 젊은 소비자들의 입맛은 코로나·밀러·버드와이저같이 병행수입시장(grey market)을 통해 흘러 들어온 외국 맥주에 길들여져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경쟁력 있는 신상품을 개발할 여력이 없는 지방 주류업체들은 도태되거나 합병·인수(M&A)될 수밖에 없게 된다. 지난해부터 이들은 M&A 전문가의 조언을 얻어 ‘빅3’의 주식을 매집하는 역공을 펴왔는데, 현재 이들이 공동으로 매집한 주식의 권리 행사를 둘러싸고 OB측과 법정 공방을 벌이고 있다.

비록 외견(재무제표)상으로 드러나지는 않고 있으나, 또 하나 주류업체들을 괴롭히는 것은 낙후한 주류 유통 체계다. 기존의 주류 유통 경로를 장악하고 있는 주류 도소매상들은 다른 산업과 달리 제조업체들도 완전히 통제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한때 철옹성처럼 여겨졌던 이런 조직들 가운데 상당수는 금융 실명제와 경기 침체의 영향으로 무너져 내리면서 주류업체에 피해를 안겨 주기 시작했다. 주류업계의 한 관계자는 “주류 도소매상들은 조직폭력배와 긴밀히 연계돼 있어 이들에게 받을 외상매출금을 떼이는 경우도 허다하다”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모든 변화 뒤에는 까다롭고 변덕스러우며, 특별히 비싸고 유명한 것을 선호하는 술 소비자들이 있다. 독한 술로도 이들을 어쩔 수는 없는 셈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