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인큐베이터의 두얼굴
  • 李文煥 기자 ()
  • 승인 2000.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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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 인큐베이터 난립…단기 차익 노리는 ‘거머리’도 활개
벤처 붐에 이어 한국에 ‘벤처 인큐베이션 붐’이 일어난 것은 지난해 말부터이다. 기술을 가진 벤처 기업에 자본과 경영 노하우를 제공하며 ‘양육’하는 벤처 인큐베이션은 이미 미국에서는 ‘비즈니스 인큐베이션’이라고 불리며 보편화한 산업이다. 벤처 기업이 한 달에 수백 개씩 새롭게 태어나는 한국에서 벤처 인큐베이션 사업이 각광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벤처 인큐베이터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벤처 기업을 키워야 할 인큐베이터가 도리어 벤처 기업을 울리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현재 서울 테헤란 밸리에서 인터넷 관련 벤처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김 아무개씨가 지난 2월 한 투자설명회에서 만난 ㅇ씨 역시 ‘벤처 인큐베이션’을 해주겠다는 이였다. 당시 김씨는 사무실 임차료를 낼 돈도 없어 PC방을 전전하며 제품을 개발하는 처지였다. 그런 김씨에게, 비즈니스 모델 특허 출원만 하면 투자자를 연결해 주고 법인 설립 절차를 밟아줌은 물론 경영까지 돕겠다는 ㅇ씨는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법인 설립 절차가 끝나고 난 뒤, 김씨는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ㅇ씨가 등기부 등본·사업자 등록증 같은 서류를 보여 주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김씨가 빨리 서류를 보여 달라고 재촉하자 ㅇ씨는 마지못해 서류를 보냈다. 하지만 주주 명부가 빠져 있었다. 김씨는 법무사 사무실로 직접 찾아가 서류를 확인했다.

낯선 외국인이 주주 겸 이사로 둔갑

김씨는 주주 명부를 보고 당황했다. 자신 및 자신과 함께 제품을 개발하는 동료의 지분 그리고 벤처 인큐베이터의 지분이 각각 33%씩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사전 합의 없이 ㅇ씨 멋대로 나눈 것이었다. 게다가 낯선 외국인이 주주 겸 이사로 서류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김씨는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신제품 개발이 자꾸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ㅇ씨는 곧 본색을 드러냈다. 김씨에게 인터넷 주식 공모를 요구한 것이다. 김씨는 “제품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무슨 주식 공모냐”라며 거부했다. 그러자 ㅇ씨는, 지금까지 김씨의 회사에 투자된 돈은 자기와 자기 친지들의 돈이니, 주식 공모를 하지 않겠다면 전부 회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ㅇ씨는 인터넷 주식 공모 요건이 엄격해지는 4월이 되기 전에 인터넷으로 자금을 끌어모아 한몫 챙기려는 심산이었다. 김씨는 지금 다른 투자자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또 있다. 국내 유수의 ㄱ연구소 연구원 출신인 김 아무개씨와 이 아무개씨는 인터넷 보안 회사를 차리기 위해 투자자를 물색했다. 기술에는 훤했지만 기업 경영에 까막눈이었던 두 사람에게 벤처 인큐베이터 ㅎ씨가 접근했다. 자본과 경영 노하우를 제공하는 대가로 ㅎ씨는 지분 65%를 요구했다. 김씨와 이씨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보안 기술을 다른 회사에 팔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ㅎ씨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ㅎ씨는 법인 설립에 필요한 서류를 모조리 만들어 와서 김씨와 이씨에게 서명해 달라고 내밀었다. 서류를 제대로 검토할 틈도 없었다. 법인이 설립된 뒤 알고 보니, ㅎ씨가 대표 이사로 올라 있었다. 김씨와 이씨는 이사였다. 게다가 보안 기술을 다른 회사에 팔지 않겠다는 약속은 명문화되어 있지 않았다. 이제 대표이사인 ㅎ씨가 다른 업체에 보안 기술을 팔아넘긴다고 해도 김씨와 이씨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다.

사실 ㅇ씨나 ㅎ씨 같은 이들을 진정한 인큐베이터로 보기는 힘들다. 벤처 기업 붐이 한창 일고 있을 때 세인들의 입에 올랐던 ‘먹튀’나 ‘블랙 엔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자본을 유치해 주고 경영 노하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날 뿐, 해당 기업이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고 짧은 시간에 크게 한몫 잡아보겠다는 목표는 동일하다. 비즈니스 인프라부터 갖춰야

이런 일이 일어나는 직접적인 이유는 벤처 기업인들 중에 아직도 순진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벤처법률지원센터 정영훈 변호사는 더 근본적인 이유로 벤처 기업을 바라보는 시각에 아직도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꼽는다. 벤처 기업의 본질은 기술 발전과 제품 개발에 자신의 인생 전부를 거는 모험이다. 하지만 투자자들 중에는 여전히 ‘벤처 기업=떼돈’이라는 사고 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현재 창투사나 투자조합 들이 앞다투어 만들고 있는 벤처 인큐베이터 역시 벤처 기업에 대한 뚜렷한 철학이 없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많다. 코스닥 시장의 열기가 예전과 같지 않자, 주식 시장으로 몰린 자금이 지분을 값싸게 취득할 수 있는 벤처 기업 설립 초기 단계로 눈을 돌린 것뿐이라는 말이다. KTB 네트워크에서 분사한 벤처 인큐베이터 KTBi의 송낙경 대표이사는 “그래도 벤처 인큐베이팅만큼은 유행하지 않을 줄 알았다”라고 말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벤처 인큐베이션이란 벤처 기업을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송씨에게 진정한 벤처 인큐베이션이란 최소 2년 이상 앞을 내다보며 잠재력 있는 신생 기업과 ‘동업자 정신’으로 함께 일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한 경영 지원 서비스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벤처기업협회가 지난해 12월에 설립한 서울벤처인큐베이팅 이장우 소장은 “벤처 인큐베이션 업체가 갖춰야 할 것은 비즈니스 인프라이다. 자금을 모으고, 비즈니스 모델을 잡고 경영을 돕는 일은 돈만 갖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벤처 인큐베이션 산업이 한국에 알려진 것은 미국의 아이디어랩이나 가라지닷컴 등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인큐베이션 기업을 통해서이지만, 미국에서 벤처 인큐베이션은 이미 1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벤처 인큐베이션 업계 사람들은, 만약 인큐베이터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실리콘밸리의 영광은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요즘 시대에, 벤처 기업에 동업자이자 동반자가 되어 줄 수 있는 벤처 인큐베이터의 역할은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벤처 인큐베이터에게도 벤처 산업에 대한 뚜렷한 철학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벤처 산업은 ‘눈앞의 돈’이 아니라 ‘도전과 모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당장의 과실에만 연연한다면, 벤처 인큐베이터는 벤처 기업을 키우는 ‘양육자’가 아니라 오히려 피를 빨아 먹는 ‘거머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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