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지원, 닷컴 기업에는 ‘그림의 떡’
  • 소성민 기자 smso@e-sisa.co.kr ()
  • 승인 2000.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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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4조원 융자 약속…인터넷 기업에 실효 있을지 의문
지난 9월 주가가 대폭락하자 진 념 재경부장관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금난에 빠진 벤처 기업에 4조원을 지원하겠다”라고 공언했다. 지원 내용인즉 기술신용보증기금을 통해 벤처 기업에 융자 기회를 넓혀 주겠다는 것이다. 코스닥 시장이 1/4분기부터 폭락을 거듭해 벤처 기업 자금난이 도무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나온 대책이다.

벤처 기업들의 반응은 대체로 시큰둥하다. 이름 밝히기를 꺼린 한 벤처 기업 사장은 “보증기관에 가면 기업의 기술력만 평가해 보증서를 주지는 않는다. 연대 보증이나 뚜렷한 영업 실적을 드러내는 서류들을 요구한다. 그런 것이 있으면 은행에 직접 가지 무엇하러 보증기관까지 가겠는가”라고 말했다. 보증을 통한 융자 지원은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기술신용보증기금(기보)의 이야기는 다르다. 경영홍보실 김기훈 차장은 “보증 근거는 기업의 기술력이 65∼70%, 그 기술의 시장성이 30∼35%이다. 다만 ‘필수 입보 대상’이라 하여, 최고 경영자가 둘이거나 가족이 임직원일 경우 등 특수한 경우에만 연대 보증을 요구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기보가 벤처 기업에 자금을 지원해 온 것은 사실이다. 9월28일 현재 기보가 보증을 유지하고 있는 잔액은 11조7천억원. 이 가운데 3조6천억원이 ‘벤처형 보증’에 속한다. 메디슨·핸디소프트·비트컴퓨터·휴맥스·한글과컴퓨터 등 많은 우량 벤처 기업들이 기보의 보증 덕을 보았다. 기보에 따르면, 코스닥에 등록된 벤처 기업 가운데 기보가 보증을 섰던 회사만 70%가 넘는다.

하지만 정부의 이번 대책이 실효를 거둘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벤처 산업 위기의 본질과 너무도 동떨어진 대책이기 때문이다. 벤처 기업이라고 다 같은 벤처 기업이 아니다. 기술력과 시장성이 검증된 벤처 기업들은 여전히 융자 지원이 전혀 필요 없을 정도로 ‘잘 나가고’ 있다.
9월27∼29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COEX)에서는 ‘2000 벤처기업 전국대회’가 열렸다. 대회장 한켠에 부스를 설치한 (주)매크로영상기술은 고화질텔레비전(HDTV) 셋톱박스와 칩셋 등을 개발한 유망 기업이다. 대회장에서 만난 이 회사 한광진 기획경영실 과장은 “지난 7월에 30배로 투자를 유치했다. 요즘도 투자하게 해달라고 은행·창투사 들로부터 문의가 끊이지 않지만 추가 자금이 필요하지 않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현재 자금난에 허덕이며 위기의 복판에 몰려 있는 벤처 기업은 주로 ‘닷컴 기업’이라 불리는 인터넷 기업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듯, 닷컴 기업 경영자의 80% 이상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데, 그들은 주된 원인으로 자금난을 꼽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기술력이나 시장성만을 평가해 융자 보증을 서기가 현재로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 기보측 관계자도 “인터넷 기업들의 보증 신청이 늘고 있지만 뚜렷한 평가 모델이 없어 보증이 쉽지 않을 것 같다”라고 밝혔다.

그동안 기보가 보증을 서 온 벤처 기업은 주로 정보통신 관련 장비나 소프트웨어를 생산하는 제조업체였다. 기보에 따르면, 1998년 15%에 달했던 ‘사고율’(보증을 선 대출금이 회수되지 않는 비율)이 올해는 3.7%로 뚝 떨어졌다. 그만큼 수익 기반이 분명한 벤처 기업에 보증을 섰기에 나온 결과이다.

자금난에 허덕이는 닷컴 기업을 좀더 구체적으로 지목하면 포털·컨텐츠 사이트 또는 B2C·B2B 등 전자 상거래 사이트를 운영하는 온라인 업체들이다. 오락·게임 등 비교적 수익 모델이 뚜렷한 일부 온라인 업체들은 아직도 직접 투자를 유치해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그에 비해 앞서의 기업들은 투자자의 발걸음이 끊긴 지 오래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가 추산하는 닷컴 기업 수는 4천∼5천 개. 이 업체들이 줄줄이 도산할 경우 이들에게 장비나 솔루션 등을 제공하는 벤처 기업들의 영업 기반까지 무너질 수 있고, 그럴 경우 벤처 캐피탈도 투자 자금을 회수하지 못해 함께 몰락하게 된다는 것이 벤처 위기론의 핵심이다.

현 상황은 장비나 솔루션을 제공하는 벤처 기업들에게도 ‘강 건너 불’이 아니다. 올해 초 40배 프리미엄을 받고 20억원을 유치한 인터넷 솔루션 개발 업체 ‘줄라이넷’. 뛰어난 웹스트리밍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벤처 기업이지만, 요즘 들어 부쩍 매출 압박을 받고 있다. 김준석 대표는 “연초에 펀딩을 충분히 해 놓아 아직 자금 문제는 없지만 매출에 대한 부담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라고 밝혔
벤처 기업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들도 마찬가지다. 한 벤처 전문 홍보회사 대표는 “벤처 기업 경영난 때문에 2개월 전부터 외상 채권이 부쩍 늘고 있어 우리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력 감축 등 구조 조정이 불가피할 것 같다”라고 털어놓았다.

만약 닷컴 기업이 줄줄이 도산하면 벤처 산업 전반에 큰 주름살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정부가 제시하는 대책은 닷컴 기업들과는 거리가 멀다. 9월1일 정부가 내놓은 중장기 벤처·코스닥 지원 대책도 ‘정보통신·생명공학·환경’ 분야 벤처 기업에 집중된 것이어서 닷컴 기업들의 실망이 더욱 컸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 김상호 홍보팀장은 “미국의 예를 보아도 인터넷 기업이 수익을 거두는 데에 대개 3∼4년 넘게 걸렸다. 그런데 한국은 인터넷 기업이 생긴 지 이제 1∼2년인데도 너무 빨리 기대를 거두는 분위기이다. 대표적인 인터넷 기업인 옥션만 해도 2년 반쯤 지난 요즘에야 수익을 거두고 있지 않은가”라고 답답해 했다.

이에 한국인터넷기업협회는 정부에 두 가지 사항을 요구하고 있다. 첫째는, 인터넷 기업이 코스닥에 진입할 때 장벽을 낮추어 달라는 것. 둘째는, 정부가 앞장서서 ‘인터넷 전용 펀드’를 조성해 달라는 것이다.

코스닥 진입 장벽이 강화되는 추세여서 인터넷 기업들의 건의가 수용되기는 앞으로도 힘들 것 같다(74쪽 상자 기사 참조). 하지만 인터넷 전문 투자 분위기를 조성해 달라는 건의는 많은 전문가들이 공감하고 있다. 벤처 산업이 발전하려면 코스닥 활성화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벤처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벤처 캐피탈의 역할이 필수이다. 은행에서 자금을 차입하기가 힘든 인터넷 기업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벤처 기업 - 코스닥 - 벤처 캐피탈’로 구성된 벤처 산업의 삼각축 가운데 현재 가장 위축되어 있는 곳이 벤처 캐피탈이다. 지난해 하반기와 올해 1/4분기에 이어진 과잉 투자로 장외 시장에 30조원이 묶여 있는 것으로 추산될 만큼 투자금이 선순환되지 않아 곤욕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증권연구원 최원근 연구위원은 “신기술사업 금융회사(현재는 여신 전문 기관으로 명칭이 통합됨)와 달리 창업투자회사는 여신이 금지되어 있어 수익 구조가 불안정하다. 안전한 투자 수익처가 있어야 모험적인 투자도 가능한 법이다. 창투사에도 여신 업무를 제한적으로 허용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 곽성신 부회장(우리기술투자 대표)은 9월28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00 벤처 포럼’에 참가한 자리에서 “벤처 캐피탈이 유통 시장, 즉 코스닥과 너무 가까이 있어서는 안된다. 짧게는 2∼3년, 길게는 4∼5년을 내다보고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다. 거품 투자가 일어난 것은 창투사 자본금 중에서 개인이나 기업의 비중이 너무 큰 데다 미국처럼 벤처 캐피탈이 경영 파트와 투자 파트로 분리되어 있지 않아 독립성이 없는 데서도 연유했다”라고 지적했다.

닷컴 기업들은 포털·전자 상거래 등에서 방송·게임 등 엔터테인먼트 분야로 방향을 넓혀 계속 생겨나고 있다. 한 달 평균 5백여 개씩 벤처 기업이 생길 정도로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서는 도전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73쪽 도표 참조). 벤처위기론이 무색할 정도이다. 하지만 자금 순환이 경색될 경우 이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그렇게 되면 이들을 기반으로 삼아 돈을 벌어들이는 연관 벤처 기업들의 경영까지 악화할 것이 뻔하다.

정부가 뒷감당할 준비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벤처 입국(立國)’만 서두르다 보니 그 후유증이 갈수록 경제 전반에 주름살을 더하고 있다. 벤처 캐피탈 제도를 정비하는 일 못지 않게 제3 시장 같은 장외 시장 육성, 합병·매수(M&A) 활성화 방안 등 실질적인 제도적 지원책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 전시 효과만 화려한 ‘4조원 지원’ 같은 미봉책으로 한숨을 돌리려고 할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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