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갈 이유 없어졌어요”
  • 장영희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3.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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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일 근무자들 ‘삶의 질’ 높아져…여가 즐길 인프라·돈 부족이 문제
신한은행 조강엽 과장(33)에게 지난해 7월부터 시행된 주5일 근무제는 ‘엔돌핀’이다. 처음 몇 달 간은 그저 집에서 쉬는 것 자체가 좋았는데, 점점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숙집 같았던 집, 짐처럼 느껴졌던 아이들이 다르게 다가왔다. 아이들과 뒹굴며 소통하다 보니 이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동향’이 파악되었다. 자연히 애정이 싹텄다. 집안 구석구석에도 눈길이 갔다.

조과장이 무슨 대단한 여가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한 달에 두 번쯤 경기도 파주에 있는 주말 농장에 가고, 당일치기 여행을 두어번 갈 뿐이다. 조과장이 부인과 20평 남짓한 밭에 콩 가지 오이 고추 상추 쑥갓 치커리 무 배추 등속을 심고 가꾸는 사이 아이들은 잠자리와 달팽이를 잡고 개구리를 쫓아다녔다.

조과장은 아이들이 ‘녹색’ 그 자체에 흥분하는 것을 보며 행복을 떠올렸다.“세상과 인생, 가족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삶이 풍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토요일이 온전히 주어졌다는 것 하나가 이렇게 큰 변화를 가져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조과장은 최근 몇 해 전부터 꿈꾸어 오던 호주 이민 계획을 접었다.

제일은행 박기수 차장(43) 역시 삶이 윤택해졌다고 말한다. 그는 스포츠 마니아이다. 올해 들어서만 마라톤을 세 번 완주했고, 철인3종 경기(수영·사이클·마라톤)에도 도전했다. 주5일 근무제가 실시된 이후 수영·마라톤·자전거 타기를 기본으로 하면서, 여름에는 윈드서핑으로 겨울에는 스키로 심신을 단련했다.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토·일 요일 오후이지만, 그에게 불만을 내비치는 식구는 없다. 부인 역시 수영과 마라톤에, 딸(고1)과 아들(초등 5)도 각자의 관심사에 몰입한다.

지난 8월 말 근로 시간을 44시간에서 40시간으로 줄이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주5일 근무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내년 7월이 되어야 1000인 이상 사업장부터 의무적으로 실시되고, 모든 사업장이 토요일에 쉬게 되는 시점은 2011년이다. 하지만 이미 1주일에 5일만 근무하는 직장인을 주위에서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비록 연월차 휴가를 상쇄하는 식의 변형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지난해 7월 은행권이 ‘선도투’를 한 이후 증권사 등 금융기관으로 이어졌으며, 올 들어서는 삼성·포스코·한화·SK 등 대기업이 뒤따랐다.

이들 유경험자들은 주5일제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을까. 시행 1주년을 맞아 신한은행이 직원 4백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이들은 늘어난 주말 시간을 주로 가족과 함께 보내고 있다(51%). 앞으로 어떻게 활용하겠는가라는 질문에는 ‘가족과 함께’ 비중(31%)이 줄어든 반면 ‘자기 계발’ 비중이 월등히 높아졌다(24%→54%).

가장 최근 조사라 할 수 있는, <시사저널>의 9월5∼9일 온라인 조사에서는 다소 다른 흐름이 발견된다. 총 응답자 5백73명 가운데 취미 생활과 공부 등 자기 계발 항목이 가장 응답률(27.9%)이 높았고, 그 다음은 외식과 여행 등 가족과 함께 하겠다(19.0%)는 항목으로, 다른 조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늘어난 여가 시간이 오히려 부담스럽다(18.0%)거나 적당한 여가 활용법을 찾지 못했다(14.0%)는 응답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5일 근무에 대한 준비가 덜 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는 응답도 12.4%나 되었다. 소비 규모가 늘어나 부업을 갖거나 가질 생각이라는 응답률이 8.7%인 것도 눈에 띈다.

SK텔레콤 송광현 과장(33)은 지난 7월 주5일제가 도입되었지만, 마음의 준비가 안되어 헤맸다고 한다. 주말이 다가올수록 무엇을 해야 할까 두려웠다는 것이다. 삼성 계열 회사에 다니는 김 아무개 과장(39) 역시 5월부터 토요일을 쉬고 있지만, 이렇다할 활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김과장이나 송과장의 모색 기간이 길어지는 것에는 맞벌이하는 부인이 ‘주6일 엄마’인 탓도 크다. 아내 눈치가 보여 이제는 슬슬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돌본다.

LG 경영개발원 김대현 부장(40)은 토요일에 완벽한 주부로 변신한다. 아침밥을 지어 아내(교사)를 출근시키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후 오후 2시 자기 취미인 축구를 하러 나가기 전까지 청소와 다림질 등 집안일을 도맡는다. 김부장은 모든 직장이 주5일 근무를 하고 학교도 주5일 수업을 해야 비로소 토요일 휴무의 진가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젊은 세대일수록 혹은 취미 활동에 일찍 눈을 뜬 직장인일수록, 자기 계발 욕구가 높을수록 주5일제를 선용한다. 신한은행 홍석우 과장(33)과 유유정 대리(32)는 주말 이틀이 확보된 지난해 7월부터 공부에 박차를 가해 올 8월 국제재무분석사(CFA) 자격증을 땄다. SK텔레콤 배성호 과장(35)의 취미는 스키와 스노보드 같은 겨울 스포츠. 그는 날이 추워지면 매주 강원도로 달려갈 계획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주5일제 유경험자들이 여가를 선용하기가 꽤 어렵다고 말한다. 우선 교통 사정이 최악이고 갈 데가 많지 않으며 가족이 두루 즐길 프로그램이 빈곤하다고 토로한다. 여가를 즐기기 위한 사회적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여가를 즐기는 데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점도 지적된다. 이들은 중앙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싸게 이용할 수 있는 시설과 프로그램을 많이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여가와 관련된 인프라가 취약한 것은 사실이며 대책 또한 강구되어야 하지만, 여가 사회학자들은 발상을 바꾸라고 주장한다.

학자들은 주5일 근무제의 취지를 근본적으로 살리지 못하게 하는 최대의 적으로 ‘마인드’를 꼽는다. 여백을 행복하게 채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쉬는 시간만 늘어났다고 해서 그것이 ‘삶의 질’ 높이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서울시 대안교육센터 김찬호 부센터장). 삶의 질 측면에서 보면 주말의 ‘시간적 길이’보다는 주말의 ‘내용’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고동우 교수(경주대·여가심리학)는, 여가 측면에서 보면, 1970∼1980년대 압축 성장 과정에서 뼈빠지게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40대 후반 이후 세대와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구호 속에 성장했던 386세대는 불행한 세대라고 규정한다. 즐기는 법을 배우지 못했거나, 심지어 노는 것을 혐오하는 세대라는 것이다.

인간은 흔히 호모 파베르(공작인)와 호모 루덴스(유희하는 인간)로 나뉜다. 여가를 단지 노동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호모 파베르와, 여가를 위해 노동한다고 생각하는 호모 루덴스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호모 루덴스는 인생의 의미를 노동을 통한 성취에서 찾지 않는다. 이들은 여가를 즐기며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주5일 근무제는 단순한 정책 변화가 아니다. 노동을 위한 여가에서 적극적 여가를 위한 노동으로 인식이 전환되는 강력한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5일제는 노동자들에게 삶의 이유와 삶의 질적 수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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