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로동선’ 제철 만났다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3.0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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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기·유인태 등 국민통합추진회의 인맥, 노당선자 신뢰 업고 “날자, 날자꾸나”



문희상 의원과 유인태 전 의원이 청와대 비서실장과 정무수석으로 내정된 것을 계기로, 국내 정치사에서 ‘비주류 중의 비주류’로 취급되던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가 새삼 부각되고 있다. 1월8일 이 사실을 발표한 이낙연 당선자 대변인은 또한 김원기 고문의 실명을 거론하며, 노무현 대통령의 정무 라인이 김원기-문희상-유인태 체제로 짜일 것임을 시사했다. 노무현 정부의 사실상 첫 인선이 통추와 직·간접 인연을 맺은 인사들로 채워지게 된 것. 김고문과 유인태 내정자는 통추 출신이고, 문희상 내정자도 현정권 초반 청와대 정무수석 시절 통추 인사들과 함께 민주대연합 구상을 가다듬은 바 있다.



통추의 출발점은 1995년 7월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지역등권론을 앞세운 김대중씨가 정계 복귀와 신당 창당을 시도하자, 이에 반발하던 민주당 내 개혁파는 ‘구당과 개혁을 위한 모임’(구당모임)을 결성했다. 그러나 결국 야당은 국민회의와 민주당으로 갈라졌고, ‘3김식 지역주의 극복’을 기치로 내걸고 저항하던 이들은 15대 총선에서 대부분 낙선했다. 이후 민주당 안에서 당권파에 맞서 정치 개혁을 주장하던 이들이 결성한 것이 통추다.



대표(김원기)와 사무총장(제정구), 정책위원장(김원웅), 상임위원(노무현 김정길 이 철 유인태 박석무 원혜영 홍기훈 황의성 김홍신 이수인 이미경 등)을 두었지만, 통추는 중앙선관위에 정식 등록한 정당은 아니었다. 오히려 신경림 시인, 백낙청 서울대 교수, 소설가 송기숙·이호철 씨, 김진홍 목사, 박찬석 경북대 총장 등 문화 예술계와 학계·종교계 인사들도 참가한 정치 결사체에 가까웠다.



당시 이들이 거처로 삼았던 곳이 여의도 교원공제회관 15층에 있던 한백정치경제연구소다. 이곳은 지금도 김원기 의원 후원회 사무실로 쓰이는데, 노당선자는 후보 시절에 ‘통추에 간다’면서 이곳을 자주 찾고는 했다. 노당선자는 김의원을 ‘대표님’이라고 부르는데, 이 또한 통추 시절의 직함이다.



이 사무실은 통추가 결성되기 직전에는 구당모임 사무실로 쓰이기도 했다. 그 때는 이부영·김근태·이호웅 의원과 박계동 전 의원도 자주 출입했다. 그러나 이부영·박계동 씨는 이기택씨 중심의 민주당 당권파와 손잡은 뒤 발길을 끊었고, 나중에 한나라당과 합당했다. 김근태·이호웅 씨는 초반에 DJ의 정계 복귀에 반대하며 구당모임에 참가했지만 나중에 국민회의 창당에 합류했다.





통추 멤버들의 정치 실험은 식당을 직접 운영한 데서도 나타난다. 15대 총선에서 떨어진 후 이들은 유인태씨의 제안으로 식당을 하기로 한 뒤, 각자 2천만원씩 지급 보증을 서는 식으로 4억원을 모아 식당을 냈다. 모임의 사랑방 구실도 할 겸, ‘정치 자금을 직접 조달할 겸’하자는 취지에서였다. 김원기 대표는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박석무 전 의원의 보증을 서서 ‘심정적인 주주’가 되었다. 식당 이름은 당장은 쓸모없이 보이지만 때가 되면 긴요하게 쓰일 물건이 되자는 뜻에서 하로동선(夏爐冬扇, 여름 화로 겨울 부채)으로 정했다.



이들은 일일 마담을 자청하며 식당 일에 동참했다. 노무현 당선자는 정중하게 큰절을 하고는 해서 손님을 놀라게 했고, 작고한 제정구 의원은 주문한 음식을 손수 들고 날랐다. 김홍신 의원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여성 테이블에 앉으면 일어날 수 없었다. 원혜영 전 의원은 식품회사 창업자답게 음식마다 자상한 설명을 곁들였고, 유인태 정무수석 내정자는 손님들과 기탄 없이 술잔을 주고받기로 유명했다. 덕분에 스타 정치인들을 보러 사람들이 몰렸다. ‘사장’ 역을 맡았던 김원웅 의원은 당시 한 경제 주간지에서 ‘이 달의 기업인’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우애도 1997년 대선 정국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정권 교체를 위해 김대중씨를 지지해야 하느냐, 아니면 원래 뜻대로 3김 지역정치 극복을 위해 대안을 찾아야 하느냐를 두고 이들은 갈라졌다. 노무현 당선자는 회원들 사이에서 ‘이인제 대안론’이 퍼지자 독자 출마 선언을 하기도 했다. “3당 야합에 책임 있는 사람이 차세대 지도자로 등장하는 부당함을 지적하기 위해 출마하겠다”(당시 <시사저널> 인터뷰)라는 것이 그의 출마 이유.



결국 그의 출마 선언이 통추가 이인제 지지로 기우는 것을 막았다고 당시 통추 부대변인을 지냈던 김찬호씨(현 김원기 의원 보좌관)는 기억했다. 유인태 전 의원은 통추 분열을 반대하는 단식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통추는 김대중 지지와 이회창 지지로 끝내 양분되었다. 김원기 노무현 김정길 유인태 원혜영 박석무 전 의원 등이 국민회의에 합류했고, 제정구 김홍신 이수인 의원과 이 철 김원웅 전 의원 등은 한나라당을 택한 것.



이렇게 그들은 흩어졌고, 잊혔다. 그렇지만 그들은 매년 정기 모임을 가지며 우의를 다져왔다. 대선 때 이들 다수가 노무현 당선을 위해 힘을 합칠 수 있었던 것도 애증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민주당 선대위에서는 이강철 정무특보·이미경 대변인·임종인 법률특보 등이 통추 출신. 유인태씨는 마포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노후보를 도왔다. 김원웅 의원이 한나라당을 탈당한 것이나, 정몽준씨가 지지 철회를 선언한 직후 이 철 전 의원이 통합21 당직자들을 규합해 노무현 지지 선언을 한 것도 통추 정서가 통했기 때문이었다.



퉁추는 또한 노당선자 주변의 386 세대 참모들을 길러낸 배양소이자 위탁소이기도 했다. 김만수 대통령직인수위 부대변인은 원혜영 의원 보좌관 출신이며, 정책 보좌를 담당했던 배기찬씨는 이수인 의원 보좌관 출신, 인터넷 선거운동을 담당했던 천호선씨는 유인태 전 의원 보좌관 출신이다. 또한 황이수·김소영 씨는 김홍신 의원 보좌관을 지냈고, 백원우씨는 제정구 의원 보좌관을 지냈다.



“통추 정신이 노무현 시대의 화두 될 것”



통추 출신인 민주당의 한 인사는 노당선자가 통추 출신들을 신뢰하는 가장 큰 이유로 ‘정치 코드가 서로 같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임채정 인수위원장이 노당선자와 삐걱거리는 이유도 평민련 출신인 그가 노당선자의 정치 신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평민련은 김대중 대통령이 수혈 차원에서 영입한 재야 출신들로서 같은 재야 출신이면서도 DJ에 맞서 잡초처럼 자란 통추 출신들과는 사고 방식이 다르다는 것.



노당선자는 지난 연말 다른 모임은 다 사양하면서 통추의 송년회에는 참석해 넥타이를 푼 채 회포를 풀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통추 시절 같은 정치를 해보고 싶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대선 기간에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개혁국민정당에 몸 담은 김원웅 의원은 ‘통추 정신이야말로 노무현 시대의 화두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나라당에도 김홍신·김부겸 의원과 홍기훈 전 의원 등 통추 출신이 많다. 노무현 시대를 맞아 통추가 정신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부활할 수 있을까. 정치권은 노당선자의 의중을 기대 반 우려 반으로 나뉜 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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