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이 포기했을 때 그들은 뛰었다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2.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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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모 ‘정치 개혁 대장정 31개월’/ 절체절명 위기 때마다 노무현 육탄 방어



2002년 12월19일 밤 8시38분 서울 광화문. ‘와, 와’ 하는 함성이 터졌다. 그리고 ‘노무현, 노무현’이라는 연호가 뒤따랐다. 폭죽이 밤하늘을 갈랐고, 노란 풍선이 물결쳤다. 개표 시작부터 줄곧 이회창 후보에게 뒤졌던 노무현 후보가 앞서갔다. 2분 동안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하다, 8시42분부터 노후보가 이후보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광화문은 축제의 광장으로 변했다. 광장을 메운 주인공은 노사모.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든 일등공신인 노사모는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노란 모자, 노란 목도리, 노란 점퍼, 노란 가방으로 온몸을 노랗게 치장한 최정아씨(30)도 펄쩍펄쩍 뛰었다. 최씨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라고 말했다.


전날인 12월18일 밤 10시40분 서울 신림역 근처 한 호프집. 최정아씨는 노사모 회원들과 맥주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명동과 종로 그리고 신림역 마지막 유세까지 따라 다닌 뒤였다. 그런데 그녀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정몽준이 노무현 지지를 철회했다.’ 최씨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했다. 그녀는 텔레비전 속보를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서울 강서구 방화동 집까지 최씨는 어떻게 갔는지도 몰랐다. 집으로 돌아간 그녀는 컴퓨터를 켰다. 노무현 홈페이지 ‘노하우’에 접속했다. 게시판에는 글이 폭주했다. 1초에 수십 개씩 글이 올라왔다. 정몽준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에 휩싸인 글들이었다.


12월19일 새벽, 1만여 노사모 ‘밤거리 감시’


같은 시각 노사모 초대 회장 김영부씨는 민주당사에 있었다. 김씨는 “정(몽준)폭탄을 맞은 당직자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었다”라고 말했다. 모두 게임은 끝났다며 자포자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노사모는 달랐다. 노사모의 힘은 위기의 순간에 폭발했다. 차상호 회장을 비롯해 전국의 대표 일꾼 60명이 온라인 채팅을 가졌다. 지도부는 긴급 지침을 마련했다. ‘정확하게 상황을 알리자, 젊은층의 투표율을 높이자,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을 설득하자.’ 인터넷 노무현 라디오(라디오노)가 상황실 구실을 했다.





오전 1시45분 라디오노 방송에 ‘정폭탄’을 잠재울 특급 소방수가 투입되었다. 명짱(명계남) 과 문짝(문성근). 노사모 상임고문인 두 사람은 유세를 마치고 자축하는 술을 마시다가 중앙당으로 달려왔다. 음주 방송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노사모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카리스마가 필요했다. 명짱과 문짝은 ‘노무현은 우리가 지키자’라고 호소했다. 문성근씨는 방송 중에 눈물을 흘렸다. 문씨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인터넷 전파를 타자, 상황은 반전했다. ‘그래 노무현은 우리가 지키자’는 의지가 담긴 글이 게시판을 뒤덮었다. 예비군이라고 불리던 노사모가 특공대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노사모는 1차 행동을 개시했다. 오전 2시 정몽준 지지 철회를 알리는 흑색선전물이 전국에 뿌려진다는 제보가 잇달았다. 라디오노 진행자 김갑수씨(36)가 특별 생방송으로 노사모를 진두 지휘했다. ‘전국의 네티즌과 노사모는 흑색선전물 감시 활동에 들어가자.’ 인터넷 게시판에 핸드폰 번호를 남기고 지역 별로 모이는 번개(즉석 모임)가 이루어졌다. 전국적으로 1만명 이상이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서울 관악구에 사는 정경일씨(32)도 새벽에 뛰어 나갔다. 정씨를 비롯한 관악구 노사모 30명은 승용차 7대에 나누어 타고 감시 활동에 들어갔다. 그는 아침 6시까지 꼬박 밤샘을 했다. “흑색선전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위기에 처한 노짱을 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서로 확인했다”라고 정씨는 말했다.


날이 밝자 노사모는 2차 행동에 돌입했다. 투표 참여 운동을 벌였다. 밤을 꼬박 새웠지만 정경일씨는 하루 종일 전화통에 매달렸다. 핸드폰 문자도 보내며 정씨는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에게 호소했다. “이번에는 노무현을 밀어달라, 그러면 다음에는 민노당을 지지하겠다.” 7만 노사모가 젊은층을 투표장으로 끌어들이는 데 안간힘을 썼다. 인터넷과 핸드폰으로 무장한 노사모의 괴력은 오후 2시부터 발휘되었다. 방송 3사 출구 조사 결과 오전까지 밀리던 노후보가 오후 들어 역전하기 시작했다. 젊은층이 투표장에 줄을 서기 시작한 것이다.


2000년 5월7일 오후 2시 대전 고속터미널 옆 레스토랑. 당시 4·13 총선에서 낙선한 ‘바보 노무현’을 위해 전국의 네티즌이 모였다. 10대에서부터 40대까지 40여 명이 첫 모임을 가졌다. 이 날 모임은 노사모판 도원 결의였다. 노사모 최초 제안자는 광주에 사는 이정기씨(35). 이씨는 총선 이틀 만인 4월15일 노무현을 위한 팬클럽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낙선 54일 만인 6월6일, 노사모가 대전의 한 PC방에서 공식으로 창립 대회를 가졌다. 창립 총회에 참석한 노무현은 “여러분이 많은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더욱 열심히 하겠다”라고 말했다.


경선·단일화 승리 이끌고 ‘정몽준 폭탄’ 해체


자발성을 강조한 인터넷 모임답게 창립 때 회칙은 단 세 줄이었다. ‘노무현과 함께 지역 감정 극복에 동참한다, 참된 민주주의 발전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동참한다, 약속과 관례는 전자 투표로만 바꿀 수 있다.’ 초대 회장은 김영부씨가 맡았다. 회원 확보를 위해 유명 인사를 회장으로 추대하기로 해, 7월20일 명계남씨가 2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2002년 3월16일 오후 5시 광주 염주체육관, 민주당 김영배 선거관리위원장이 마이크 앞에 섰다. “개표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전국에서 모여든 노사모 3백여 명은 김영배 위원장의 입술을 주목했다. 김위원장은 특유의 억양으로 한자한자 읽어 나갔다. “노~무 현 득~표 수 5백.” 그 다음 95표라는 김위원장의 발표는 노사모의 함성에 묻혔다. ‘광주 만세, 노무현 만세.’ 명계남씨도 울고, 노사모도 울었다. 민주당 광주 경선은 노사모의 치밀한 준비가 이끌어낸 승리였다.


노사모는 단기필마로 뛰어든 노무현을 위해 한 발짝 먼저 움직였다. 2001년 12월12일 노사모에 국민경선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민주당이 국민경선제를 채택하기 열흘 전이었다. 국민경선단 모집에서부터 경선장을 축제로 만드는 응원전까지 노사모는 ‘16부작 노풍 드라마’의 조연을 유감 없이 해냈다. 국민경선제가 끝난 뒤 위상을 놓고 한 차례 내홍도 있었다. 명계남씨가 회장 선거에서 사퇴했다. 하지만 비 온 뒤에 땅이 굳듯이 내홍을 겪은 노사모는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2002년 9월29일 저녁 서울 여의도 한강 둔치. ‘희망돼지 수거 전국투어’라는 플래카드를 단 트럭이 들어섰다. 짐칸에는 돼지 저금통이 가득 실려 있었다. 전국에서 수집한 1천6백개에 달하는 돼지 저금통이었다. 30명이 분류하는 데만 4시간이 걸렸다. 10원짜리 스물한 자루, 50원짜리 다섯 자루, 500원짜리 다섯 자루, 100원짜리가 쉰한 자루에 달했다.



희망돼지 역시 노사모 작품이었다. 지난 8월 말, ID가 무착인 이정섭씨(44)는 머리가 번쩍했다. 이씨는 바람 빠진 노풍을 되살릴 고민을 하다가 무릎을 쳤다. “노사모가 아니더라도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다”라고 이씨는 말했다. 이씨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노사모는 시험판으로 돼지 저금통 천 개를 만들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노사모는 좀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저금통 크기를 줄이고 거리 배포를 시작했다. 후원금과 함께 회원 수도 늘어났다.



라디오노 진행자 김갑수씨 ‘생업 포기’



서울 제기동에 사는 최동혁씨(28)도 노무현 지지도가 바닥을 칠 때 노사모에 가입했다. “김민석 탈당이 계기였다. 노무현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라고 최씨는 말했다. 노사모 회원들은 민주당 국민참여운동본부 아래 100만 서포터즈 사업단에 합류했다. 선거법에 저촉되지 않으면서도 노후보를 도울 방법이었다. 100만 서포터즈 사업단 단장은 명계남씨가 맡았다.



일부 노사모 회원은 생업도 포기했다. 라디오노 진행자 김갑수씨도 잘 나가는 부산의 한 방송사 DJ였다. 11월 초, 그는 방송을 그만두었다. 노무현을 위해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고, 인터넷 라디오 방송 진행을 맡았다. 11월4일 개국한 라디오노에서 그는 DJ·PD·작가 1인 3역을 해냈다. 문성근씨는 개혁 국민정당(개혁당)의 희망유세단을 이끌며 전국을 누볐다. 문씨를 따라 노사모 회원은 개혁당에 합류했다. 당원인 공유라씨(28)는 “자기 당 후보를 흔드는 민주당을 보며 문제는 정당 시스템에 있다고 보았다. 노짱을 지키기 위해 개혁당에 합류했다”라고 말했다. 개혁당은 민주당의 노무현 흔들기를 비판하며 유시민씨 등이 주축이 되어 창당했다. 11월16일 개혁당 창당대회에 참가했던 노무현 후보는 문성근의 열정이 담긴 연설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대선 텔레비전 광고 ‘노무현의 눈물’ 편에 나오는 바로 그 장면이다.



“노사모의 개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2002년 11월24일 밤 11시50분, 관악구 노사모에서 제일 발이 너른 노광일씨(45)는 초조했다. 단일 후보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평소 눈팅(인터넷에서 글을 읽기만 하는 것)을 즐기던 노씨도 이 날은 인터넷에 직접 글을 쓰고 퍼 날랐다. ‘국민후보 노무현을 단일 후보로 만들자’는 핸드폰 문자 메시지를 날렸다. 노사모 회원들은 ‘가급적 외출을 삼가자, 여론조사 전화가 오면 침착하게 대답하라’는 세세한 지침을 받았다. 10분 뒤 노씨는 쾌재를 불렀다. 노짱이 단일 후보로 결정된 것이다.



2002년 12월20일 밤 11시50분, 민주당사 앞을 노사모가 점령했다. 광화문 1차 집결에 이어 노짱을 직접 보기 위해 민주당사로 달려온 것이다. 명짱과 문짝은 핸드 마이크로 노사모 앞에 섰다. 명계남씨는 “우리 모두는 훌륭한 전사였다”라고 말했다. 문성근씨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다같이 개혁을 이루어내도록 노력하자”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샴페인을 터뜨렸고, 천명이 넘는 노사모는 환호했다.



‘열정의 아마추어리즘이 진부한 프로를 눌렀다’는 허영일 개혁당 홍보팀장의 말처럼 노사모는 열정 하나로 노무현을 지켜냈다. 국민경선, 단일화, 정몽준의 지지 철회. 결정적인 국면마다 노무현을 육탄 방어했다. 그러나 꿈을 이룬 노사모는 자발적 해체를 모색하고 있다. 그것이 노무현을 위해 노사모가 걸어야 할 길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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