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새 정치인 ‘남는 장사’ 한다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2.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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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원칙 팽개쳐도 요직 꿰차고 당선율 높아…건망증 심한 국민이 ‘뜨내기’ 키워
"국가와 국민을 위한 대의가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자민련 소속이던 이양희·이재선 의원이 11월15일 한나라당 입당 기자회견을 하면서 밝힌 소감이다. “이회창 후보의 집권을 통한 정치 안정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대세라고 생각한다.” 이는 그보다 한 달 전 민주당 탈당 사태의 첫 테이프를 끊은 전용학 의원이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한 말이다. 한나라당 입당 의원들만이 아니다. 후보단일화파도, 제3신당파도 마찬가지다. 대통령 선거를 불과 한 달여 남겨둔 정국에 ‘민족과 국가’ 혹은 ‘역사’ 같은 거창한 단어로 무장한 결단의 변들이 쏟아지고 있다.


10월14일 전용학 의원과 이완구 의원이 한나라당에 전격 입당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민주당과 자민련에서 탈당한 의원은 24명. 이중 7명은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이로써 한나라당은 의석 수 1백47석의 거대 야당이 되었다. 민주당은 92석, 자민련은 10석이다. 불과 한 달 사이에 한나라당 의석은 7석이 늘었고, 민주당은 20석, 자민련은 4석이 줄었다. 스스로 제명을 요구함으로써 사실상 탈당 대열에 낀 전국구 의원 3명까지 포함하면 27명이나 자발적 철새 대열에 합류한 것.





이들은 왜 여론의 뭇매를 각오하고 철새가 되는 쪽을 택했을까. ‘철새족’ 24명을 지역 별로 구분해보면 서울 5명, 경기 9명, 인천 1명 등 수도권 출신이 15명으로 62.5%에 이른다. 그 다음으로 충청권이 7명이며, 강원·전북이 각 1명이다. 이 철새 정치인들이 속한 지역구의 지방 선거 결과를 살펴보자. 24개 지역구에서 지난 6월 지방 선거를 통해 당선된 자치단체장 27명(3개 지역은 복수의 시·군으로 이루어진 지역구임)의 소속 정당은 한나라당 17명, 민주당 3명, 자민련 7명이다. 한나라당 후보가 70% 넘게 당선된 것이다. 광역 의원의 분포도 마찬가지다. 이들 지역구에 할당된 광역 의원 74명 가운데 한나라당 공천으로 당선된 사람이 52명(70.2%)이나 된다. 민주당과 자민련은 각각 10명씩만 당선시켰다(무소속 2명). 이런 한나라당 독식 현상은 수도권으로 올수록 더하다. 다시 말해 이들 철새 정치인들의 지역 기반이 급속히 붕괴된 것.


따라서 극소수 ‘후보단일화 소신파’ 의원과 몇몇 ‘반 노무현 소신파’ 의원을 제외하면, 탈당 의원 대다수는 거창한 탈당의 변과 달리 양지를 찾아 떠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철새 정치인들을 선수(選數) 별로 분류해 보면 초선 9명, 재선 10명, 3선 이상 5명이다. 정치 초년병뿐만 아니라 중진들에게도 정치 도의나 노선, 원칙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배지’였던 셈이다.


오장섭은 철새도 못되는 박쥐?


민주당 대변인 출신으로 한나라당에 입당한 전용학 의원은 탈당 사태의 첫 테이프를 끊은 탓에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았다. 뒤따라 떠난 ‘철새’들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매를 맞았다. 무리 지어 날아갔기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 주요 인사들의 면면은 이렇다.


민주당과 자민련 모두 현역 사무총장이 철새의 길을 택했다. 민주당 유용태 전 사무총장은 ‘반노’ 성향으로 노무현 후보측과 재정 문제를 놓고 첨예한 갈등을 빚기도 했다. 15대 총선 때 신한국당 소속으로 당선된 그는 현정권 출범 뒤 국민회의로 옮겨 재선에 성공했다. 현정부에서 노동부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그런 그가 4년 만에 다시 떠난 것.


오장섭 전 자민련 사무총장은, 유용태 의원의 사례에 비하면 좀더 비극적이면서도 코믹하다. 1997년 7월 보궐 선거에서 당시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당선된 그는 이후보가 대선에서 패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자민련으로 당적을 옮겼다. 이후 건설교통부장관과 자민련 원내총무·사무총장을 지내며 김종필 총재의 총애를 받았으나, 이회창 대세론이 퍼지자 한나라당 입당설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런 행보에 분노한 김종필 총재는 오의원이 탈당하기 며칠 전 그를 사무총장에서 전격 해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희비극’은 그가 탈당한 직후 벌어졌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한 방송 토론에서 “이익에 따라 철새처럼 온다면 그것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그를 겨냥해 말한 뒤, 한나라당이 그의 입당을 보류시켜 버린 것. 그는 결국 자기가 모셨던 두 ‘보스’로부터 모두 버림받았고, ‘철새도 못되는 박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이들 두 현직뿐이 아니다. 이번 철새 대열에는 전직 사무총장이 4명이나 더 끼어 있다. 오장섭 의원과 함께 한나라당으로부터 반(半) 공개적인 비토를 받은 민주당 탈당파 김명섭 의원도 사무총장 출신이다. 그도 오의원과 비슷하게 현정부 초반 한나라당을 탈당한 인물로, 민주당 사무총장과 국회 정보위원장 등 요직을 역임했다. 또한 후보단일화를 주장하며 탈당한 김원길·박상규 의원도 민주당 사무총장을 지냈다. 자민련에서 한나라당으로 건너간 이양희 의원도 사무총장 출신이다. 이의원은 대변인과 원내총무도 지냈다. 역시 ‘자민련→한나라당’행을 선택한 이완구 의원도 원내총무 출신이며, 이재선 의원은 현직 국회 윤리특위 위원장이다.


민주당 탈당파 가운데 눈에 띄는 또 다른 인물은 김영배·박종우·이윤수 의원이다. 국민경선 선거관리위원장을 맡아 스타가 되었다가 “국민 경선은 사기였다”라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던 김영배 의원은 6선으로 현역 의원 2백73명 가운데 김종필·이만섭 의원을 빼고 가장 오래 의원 생활을 하고 있는 인물이다.


민주당 정책위 의장을 지낸 박종우 의원은 전형적인 철새족. 1996년 4월 15대 총선 때 무소속으로 당선된 직후부터 ‘신한국당(1996년 5월)→국민회의(1998년 9월)→무소속(2002년 11월)’ 순으로 탈바꿈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그는 16대 총선 직전 정치개혁시민연대가 발표한 ‘유권자가 알아야 할 15대 국회의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명단의 애초 이름은 ‘유권자가 알아야 할 부끄러운 국회의원’.





원유철, 15대 때 당적 세 번 옮겨 ‘최다’


이윤수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이 야당 시절 수행비서를 지낸, 동교동계 출신이다. 권노갑씨가 쓴 <누군가에게 버팀목이 되는 삶이 아름답다>에는 당시 겨울이면 그가 구두를 품에 넣어 따뜻하게 만든 후 DJ가 출근할 때 꺼내놓곤 했다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그는 동교동계와 소원해진 뒤 한때 쇄신파에 동조하기도 했으나, 이번에 탈당 대열에 합류했다.


정치권의 철새 논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1999년 10월17일자 ‘국회 경과보고서’에는 15대 국회의원 2백99명 중 24%인 73명이 소속 정당을 바꾸었다고 나와 있다. 14대 국회 때는 75명이, 13대 국회 때는 55명이 당을 옮겼다.


15대 국회 중반에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가 발생했다. 따라서 ‘철새 도래지’도 전·후반기가 각각 달라서, 전반기에는 신한국당으로, 후반기에는 공동 여당인 국민회의와 자민련으로 철새들이 몰렸다. 15대 전반기에 당시 신한국당은 총선 후 39일 만에 21명을 끌어들여 ‘여소야대’를 ‘여대야소’로 바꾸었다. 그러나 후반기에 정권이 바뀌자, 이번에는 한나라당을 뜬 철새들이 국민회의(18명)와 자민련(8명)에 내려앉았다. 우연하게도 정권 교체 6개월 만에 한나라당의 의석은 총선 때 거둔 1백39석으로 정확히 되돌아가 있었다.


15대 임기 중에 여야가 바뀌다 보니 한 의원이 여러 차례 옮겨다니는 촌극도 벌어졌다. 원유철 의원은 ‘무소속→신한국당→국민신당→국민회의’로 15대 국회 4년 동안 세 번이나 당적을 옮겼다. 당적을 두 번 이상 옮긴 의원도, ‘무소속→한나라당→국민회의’로 옮겨다닌 박종우 의원과 권정달 전 의원을 포함해서 11명이나 되었다. 김학원 의원은 당적을 바꾸면서 아예 지역구까지 바꾸었고, 이의익 전 의원은 자민련이 야당일 때 탈당했다가 공동 여당이 되자 복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당적 변경은 주로 선거 후나 정권 교체 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대통령 선거라는 정치권 최대의 거사를 코앞에 두고서 이토록 많은 철새 정치인이 출현한 적은 없었다.


이들이 여론의 뭇매를 감당하면서도 철새 행각을 벌이는 이유는 뻔하다. 양지를 찾아 떠나도 정치 이력을 쌓는 데 별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15대 국회의 철새족 51명 중 20명은 당적을 바꾸어 출마한 16대 총선에서 당선했다. 불출마와 공천 탈락자를 제외한 낙선자는 20명이니, 철새 정치인 2명 중 1명은 국민들에게 재신임을 받은 꼴이다. 15대 국회의원 2백99명 중 16대 총선에서 살아 남은 의원이 1백39명(46.5%)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비교해 보아도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던 것. 다시 말해 철새 정치인은 ‘빨리 잊고 이해심 많은 국민’이 길러내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념이나 정책에서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 국내 정당 구도도 문제가 많다. 함성득 교수(고려대·행정학)는 “우리나라 정당은 여당이든 야당이든 다양한 이념을 가진 의원들이 함께 섞여 활동하기 때문에, 의원들이 이 당으로 가나 저 당으로 가나 별다른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이번 대선을 계기로 이념이나 정책을 중심으로 모이는 정치가 되기를 바란다”라는 원유철 의원의 말은, 한 철새 정치인이 한국 정치에 보내는 충고이자 조소로 들리기도 한다.



민주당·자민련 의원들의 탈당 일지


10월14일


민주당 전용학(충남 천안 갑) 자민련 이완구(충남 청양·홍성) 의원 탈당 후 한나라당 입당

11월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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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김명섭(서울 영등포 갑) 강성구(경기 오산·화성) 의원 탈당

11월3일


민주당 김윤식(경기 용인 을) 이근진(경기 고양 덕양 을) 의원 탈당

11월4일


민주당 김영배(서울 양천 을) 김원길(서울 강북 갑) 박상규(인천 부평 갑) 유재규(강원 홍천·횡성) 설송웅(서울 용산) 이희규(경기 이천) 김덕배(경기 고양 일산 을) 박종우(경기 김포) 최선영(부천 오정) 이윤수(경기 성남 수정) 송석찬(대전 유성) 의원 탈당. 민주당 전국구 최명헌·장태완·박상희 의원 제명 요구

11월8일


민주당 원유철(경기 평택 갑) 의원 탈당

11월9일


민주당 유용태(서울 동작 을) 장성원(전북 김제) 송영진(충남 당진) 의원 탈당

11월11일


김윤식·이근진·원유철 의원 한나라당 입당

11월14일


자민련 오장섭(충남 예산) 이양희(대전 동구) 이재선(대전 서구 을) 의원 탈당

11월15일


이양희·이재선 의원 한나라당 입당




15대 국회 ‘철새’ 51명의 16대 총선 성적표



●무소속→신한국당(9명)

김영준(충북 제천·단양) 불출마

김용갑(경남 밀양) 당선

김재천(경남 진주 갑) 공천 탈락 후 무소속 출마, 낙선

김일윤(경북 경주 갑) 당선

박시균(경북 영주) 당선

백승홍(대구 서 갑) 당선

서 훈(대구 동 을) 공천 탈락 후 민국당으로 출마, 낙선

임진출(경북 경주 을) 당선

황성균(경남 사천) 불출마



●무소속→한나라당(1명)

이해봉(대구 달서 을) 당선



●자민련→신한국당(4명)

류종수(강원 춘천 을) 낙선

박종근(대구 달서 갑) 당선

안택수(대구 북 을) 당선

이재창(경기 파주) 당선



●민주당→신한국당(2명)

이규택(경기 여주) 당선

황규선(경기 이천) 낙선



●신한국당→국민신당→국민회의(6명)

김운환 (부산 해운대·기장 갑) 낙선

박범진 (서울 양천 갑) 낙선

서석재 (부산 사하 갑) 낙선

장을병 (강원 삼척) 낙선

원유철 (경기 평택 갑) 당선

이용삼 (강원 철원·화천·양구) 당선



●신한국당→국민신당→무소속(1명)

한이헌 (부산 북·강서 을) 불출마



●신한국당→국민신당→자민련(1명)

김학원 (서울 성동 을→충남 부여) 당선



●한나라당→국민회의(17명)

권정달 (경북 안동 을) 낙선

김길환 (경기 가평·양평) 낙선

김명섭 (서울 영등포 갑 ) 당선

김인영 (경기 수원권선) 낙선

김충일 (서울 중랑 을) 공천 탈락

박종우 (경기 김포) 당선

서정화 (인천 중·동) 낙선

서한샘 (인천 연수) 낙선

송훈석 (강원 속초·고성·양양) 당선

유용태 (서울 동작 을) 당선

이강희 (인천 남 을) 낙선

이규정 (울산 남 을) 낙선

이성호 (경기 남양주) 낙선

이재명 (인천 부평 을) 불출마

장영철 (경북 군위·칠곡) 낙선

정영훈 (경기 하남·광주) 낙선

홍문종 (경기 의정부) 공천 탈락 후 무소속 출마, 낙선



●자민련→신한국당→국민회의(1명)

황학수 (강원 강릉 갑) 공천 탈락 후 무소속 출마, 낙선



●한나라당→자민련(8명)

김기수 (강원 영월·평창 ) 낙선

김종호 (충북 괴산) 전국구 당선

노승우 (서울 동대문 을) 낙선

박세직 (경북 구미 갑) 불출마

오장섭 (충남 예산) 당선

이완구 (충남 청양·홍성) 당선

이택석 (경기 고양일산) 낙선

차수명 (울산 남 갑) 낙선



●자민련→한나라당→자민련(1명)

이의익 (대구 북 갑) 1998년 지방선거 때 대구시장 출마, 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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