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준, 모르고 횡재했나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2.10.0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 진상 추적/오너 보호하려고 수사 ‘모범답안’ 작성도



정몽준 의원은 두 번의 텔레비전 토론을 통해 표정 변화 없이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유독 한 문제에 관해서는 흥분했고 표정 관리에도 실패했다. 1999년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의 책임을 묻는 질문이었다.
정의원은 “금감원이 나에게 도덕적 문제는 있으나 법적 문제는 없다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조작 아니냐”라고 목청을 높였다.

지난 9월19일 MBC <100분 토론>에서도 정의원은 “금감원이 도덕을 판단하는 기관이냐”라고 불쾌감을 숨기지 못했던 터였다. 민감한 질문에 ‘비켜 가기’ 전략을 쓰는 정의원은 한 말씀 더 드리겠다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금융감독원 책임자 만나서 누가 조작을 해서 주가를 올리면 산 사람(가격을 올리는 사람)이 문제 있지 판 사람이 문제 있느냐고 말한 적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해명은 오히려 정의원이 국회의원 신분을 이용해 금감원에 압력을 행사했음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 되고 말았다.


정의원의 답변이 명쾌하지 않다는 지적이 일면서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은 정의원을 검증하는 첫 단계로 여겨지고 있다. 사상 최대 주가 조작 사건으로 불리는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 사건에서 현대중공업과 정몽준 의원은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


“산 사람이 문제이지, 판 사람이 문제냐?”


현대그룹은 1998년 5월부터 11월까지 현대중공업의 자금 1천8백82억원 등 2천여억원을 가지고 현대전자 주가 띄우기에 나섰다. 현대증권 이익치 회장의 지시를 받은 실무자들은 현대전자 주식 매도 주문이 나오면 곧바로 물량을 거두어들였다. 이 과정에서 현대중공업은 1998년 6월11∼22일에 1백20만주, 7월에 3백20만주, 8월 1백20만주, 9월7일부터 11월13일 사이에 100만주씩 현대전자 주식을 순매수했다. 현대중공업이 매수 강도를 높이며 현대전자의 주가를 밀어올리자 일반인들의 추격 매수가 이어졌다.


주가를 띄우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었다. 하루 동안 무려 1백49회에 걸쳐 고가로 허수 주문을 냈고, 장을 마감하는 오후 3시 직전 높은 가격에 대량 매수하는 방식으로 종가를 높였다. 어떤 날은 현대전자 하루 거래량의 93.2%를 사들이는 현대 특유의 뚝심을 발휘하기도 했다. 작전 개시 시점인 1998년 5월26일 1만3천7백원이던 현대전자 주가는 6월 말 3만1천2백원으로 폭등했고, 1998년 내내 3만원을 오르내렸다.


주가가 오르자 현대그룹의 일부 계열사들과 정씨 일가는 현대전자 주식을 내다 팔기 시작했다. 1998년 한 해 동안 현대그룹이 매각한 현대전자 주식은 3천3백68만여 주에 달했다. 이 때 정몽준 의원을 비롯한 정씨 일가의 2세들도 나섰다. 정몽준 의원이 1998년 9월부터 10월에 걸쳐 8만5백44주를 처분한 것을 비롯해, 몽근·몽윤·몽규·몽혁 씨도 2백10만주를 매각해 막대한 시세 차익을 올렸다.





정의원은 방송기자클럽 토론에서 “주식을 판 사람이 문제가 있냐”라고 말했다. 그러나 만약 정의원이 주가 관리 사실을 알고 주식을 처분했다면 이는 명백한 위법 행위다. 또 정의원은 “1985년 5천원을 주고 산 주식을 15년 후에 1만5천원에 팔았다”라며 막대한 시세 차익을 노렸다는 의혹에 대해 해명했다. 하지만 정의원의 말과 달리 그는 1998년 10월15일 2만주를 2만8천24원에서 판 것을 비롯해 주당 평균 단가 2만5천9백83원에 현대전자 주식을 처분했다. 1999년 2월 공직자 재산 등록 신고 과정에서 정의원은 현대전자 주식 6만5천7백14주를 16억9천3백91만원에 매각했다고 축소 신고했다.


검찰은 정씨 일가가 깊숙이 개입했을 것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수사는 현대증권 이익치 회장과 몇몇 간부가 모든 일을 꾸민 것이고 정씨 일가는 개입 혐의가 없다고 결론지어졌다. 정씨 일가 중에서는 정몽헌 회장만 검찰 조사를 받은 상태였다. 사건의 주임 검사였던 한견표 검사는 전화 인터뷰에서 “현대중공업이 자금 여유가 있다는 이유로 거의 대부분의 돈을 대며 주가조작 사건에서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중공업의 자금을 담당하던 이영기 부사장이 중공업 관련 일은 모든 것을 자신이 처리했다고 주장했고 정몽준 의원과 연관성은 발견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한 수사 관계자는 “현행법으로는 주가를 끌어올린 장본인이 현대중공업 등 법인이어서 대표이사가 법적 처벌 대상이기 때문에 대주주는 부당 이익을 봐도 아랫사람들이 입을 닫으면 처벌할 수 없다”라고 덧붙였다.


입맞추기 답안 주고 예행 연습


수사가 종결되었지만 세간의 의혹까지 잠재우지는 못했다. 재벌의 속성상 월급쟁이 경영인, 그것도 부사장이 계열사 돈 1천8백억원을 동원해 일을 벌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주가 조작을 통해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정씨 일가였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주가 조작 사건에 대한 ‘향후 사건 전망 및 대응 방안’과 관련자들의 진술 내용안은 현대 임직원들이 ‘오너 보호’를 위해 조직적으로 입을 맞추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현대측은 범행을 축소·은폐하기 위해 관련 임직원들에게 예상 질문에 모범 답안을 나누어주고, 예행 연습까지 시켰다. 1안에서 3안까지 제시된 진술 내용안은 주가 조작 사건이 오너와는 관계없는 일로 실무자들에게 일임되어 있음을 강조하도록 되어 있다. 답안 가운데는 ‘사후에 언론 보도를 통해 알게 되었다’는 내용이 제일 많이 등장했다.


검찰이 정몽준 의원을 소환할 것에 대비해 현대그룹이 마련한 진술안에는 ‘주식 매수 또는 매각에 필요한 통장을 경영전략팀에 맡겼다’ ‘경영전략팀(실무자 이름 모름)이 실무자의 기안에 따라 결정했고(사후 구두 보고는 받았음) 개별 거래는 현대증권을 통해 실행된 것으로 안다(경영기획팀이 관여했는지, 증권의 누가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모름)’ 등으로 답변하라는 세부 지침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 안에는 ‘구체적인 질문이 있는 경우에만’ ‘묻는 경우에만’ ‘질문할 경우에만’ 등의 단서 조항을 달아 가급적 대답을 피하고, 실무자들이 알아서 한 일이라고 답변하라는 것이 명시되어 있다.


또 주가 조작 핵심 관련자들이 사건 직후 바로 계열사로 복귀한 것은 정씨 일가의 묵인이 있었음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집행유예가 내려지자 이익치 회장은 바로 현대증권 대표이사 회장으로 복귀했고, 자금을 지원한 현대중공업 이영기 부사장은 지난해까지 같은 자리를 지켰다. 현대상선 박재영 이사는 전무로 승진했다. 특히 박철재 상무는 복귀하면서 현대전자에서 현대중공업 재무팀으로 옮겼다. 박씨는 자기가 주가 조작 사건의 실질적 책임자라고 진술해 총대를 멘 사람이었다.

박씨는 서울대 상대 71학번으로 정의원과 2년 동안 함께 공부했고, 현재 재무관리 전무로 승진해 현대중공업을 지키고 있다. 주가 조작 사건에 대해 박전무는 “할 말이 없다. 만약 이 일이 문제가 되고 나로 인해 회사와 정의원이 피해를 본다면 언제라도 그만둘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박전무가 현대중공업에 근무하는 것에 대해 정의원은 “법적으로 처벌받은 사람을 정상인으로 대해주는 것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라며 문제의 본질을 특유의 화법으로 피해갔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