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준의 ‘2002 대통령’ 대야망
  • 吳民秀 기자 ()
  • 승인 1998.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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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 인물·통일 지도자·경영자 이미지 심기 주력…92년부터 준비 치밀
지난해 대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20% 밑으로 떨어져 좀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을 때 일이다. 당시 여권 일부 그룹이 은밀하게 ‘후보 교체’를 추진했다. 이회창으로는 DJ에게 이길 수 없으니, 새로운 인물을 내세우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도는 결국 무위로 그쳤지만, 아무튼 당시 후보 교체를 추진했던 그룹은 ‘대안’도 마련해 놓고 있었다. 1안이 이한동, 2안이 김우중, 3안이 박찬종.

정몽준, 대선에서 이회창 대안으로 거론돼

그런데 후보 교체를 추진했던 그룹 한켠에서는 의외의 인물도 거론했다. 정몽준 의원이었다. 물론 정몽준 대안론은 몇몇 실무자 선에서 문건 작성 수준으로 끝났다. 상층부에 정몽준 대안론이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아무래도 ‘대안’으로 밀어올리기에는 시간이 촉박하고 여건도 좋지 않았다는 것이, 당시 정몽준 대안론을 검토했던 한 인사의 증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정의원은 국내 정치와 담을 쌓고 월드컵 준비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여겨 볼 대목은 정몽준 대안론에 담겼던 내용들이다. △46세로 세대 교체 명분에 부합 △무소속 3선 의원으로 정적(政敵)이 없음 △2002년 월드컵을 유치해 국민적 인기와 지명도 획득 △ROTC 출신으로 군 문제 깨끗함 △현대중공업 회장(경영 마인드),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국제적 인맥 형성)을 역임해 21세기 지도자상에 부합 △현대그룹의 배후 지원으로 선거 자금 확보 가능…. 끝으로 정몽준 대안론은 이회창 대 반이회창 그룹의 분쟁으로 분당 위기가 도래할 경우, 민정·민주계 모두에게 거부감이 없다는 점을 강점으로 꼽았다. 한마디로 당시 정치권 인사들 중에서 ‘급하게’ 대안을 찾을 경우 정몽준만한 인물이 없다는 논지였다.

정몽준 의원. 그는 대권 도전의 야망을 갖고 있는가. 벌써 항간에는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와 맞물려, 그가 차기 대선에 도전하리라는 관측이 무성하다. 물론 정의원도 대권 도전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을 숱하게 받아 왔다. 그럴 때마다 그가 ‘단골 메뉴’로 꺼내는 말이 있다. “죽음을 불러들이는 사람은 없겠지만, 죽음이 찾아왔을 때 피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공직도 마찬가지다. 평소 공직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지만, 공직이 찾아왔을 때 피하는 것도 어리석다.” 그가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읽고 무릎을 쳤다는, 그리스 철학자 세네카의 말이다. 요컨대 섣불리 대권 행보를 걷지는 않겠지만 상황이 만들어지면 굳이 마다하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대권 경쟁이 한창이던 지난해 10월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은 아시아의 떠오르는 차세대 지도자 6명에 관한 특집 기사를 실었다. 한국인으로는 정몽준 의원이 유일하게 꼽혔다. <타임>은 기사에서 정의원이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고, 그 근거로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를 실현해 한국인의 자부심을 높여 준 공로를 꼽았다. 정의원과 함께 아시아 차세대 지도자로 꼽힌 인물은 말레이시아 안와르 이브라힘 부총리, 일본의 간 나오토 민주당 대표, 인도네시아의 고 수카르노 대통령 장녀인 메가와티 등이었다.

또한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96년 12월 ‘한국의 뉴 리더’라는 연재물을 싣기 시작했는데, 첫 번째로 소개한 인물이 정몽준이다. 4회에 걸쳐 정의원의 일대기를 다루었는데, 초점은 정의원의 2002년 야망에 맞추어졌다. 이 신문은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의 야망이 월드컵 유치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며, 부친이 이루지 못한 꿈인 대통령 선거 승리까지 시야에 넣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적어도 정몽준의 대권 도전설에 관한 한 국내 못지않게 외국에서도 관심이 높은 것이다.

사실 정의원의 최종 목표가 대권이라는 관측은, 시중에 나도는 설 못지않게 정주영 일가의 궤적과 정의원의 행보를 통해서도 우회적으로 입증된다.

우선 정의원의 정계 입문 과정. 정의원은 형제들 중에 유일하게 정계에 진출했고, 여기에는 정의원 자신의 뜻과 함께 정씨 가문의 기대가 강력하게 작용했다. 이런 사실은 정의원이 얼마 전 한 외신과 한 인터뷰에서도 잘 드러난다. “<동아일보> 기자로 있던 숙부 정신영씨(정주영 회장의 동생)가 독일로 유학해 정치가를 지망했다. 그러나 숙부가 별세하는 바람에 대신 내가 정치의 길에 들어섰다. 만약 숙부가 생존했다면, 나는 정치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정계 입문이 가문, 특히 정주영 회장의 뜻이었음을 밝힌 셈이다. 큰아들이 죽자 둘째아들인 존 F. 케네디를 대통령으로 만든 케네디 가문의 권력에 대한 집요한 집착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정주영의 대권 도전은 아들 위한 ‘예행 연습’

본래 정몽준은 84년 2·12 총선에 출마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그의 출마를 막았다. 정몽준은 자신의 출마 문제를 놓고 전씨와 독대까지 했다. “뭐든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는데, 뭣하러 골치 아픈 정치를 하려고 하느냐.” 전씨의 출마 불가론이었다. 당시 서슬 퍼런 대통령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쳐 정몽준은 출마 꿈을 접었다. 88년 총선에서도 비슷했다. 이번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는 정권의 반대를 무릅쓰고 울산에서 출마를 강행해 결국 13대 국회에 진출했다. 정의원이 정치적 입신에 얼마나 집착해 왔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권에 대한 정씨 일가의 꿈이 가장 집약적으로 표출된 것은 92년 대선 때. 국민당 후보로 대권에 도전한 정회장은 결국 ‘실패’했고, YS 집권 5년 동안 정회장과 현대그룹은 ‘시련’을 겪었다. 정의원은 92년 대선 때 국민당 정책위 부의장과 부산·경남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전력을 다해 아버지를 도왔다. 말하자면 ‘적지’에 뛰어든 셈인데, 선거가 끝난 뒤 정의원은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 관련자에게 도피 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선거 직후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축구협회장에 취임한 정의원은, 상소를 포기하는 대가로 사면 복권되었고, 친구 이 철 의원으로부터 “드디어 ‘전과자 의원 모임’에 들어온 것을 축하한다”라는 농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은, 정의원이 92년 대선에서 3김이 지배하는 한국의 정치 현실을 온몸으로 체험했다는 점이다. 즉 초원복집 사건에서 보았듯 악재가 오히려 호재로 작용하는 지역 감정의 벽과 함께, 재벌 또는 재벌 권력이 탄생하는 데 대해 유권자의 거부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생생하게 체험했다. 이는 92년 이후 정의원의 정치 행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이다. 아마도 그는 92년의 패인을 철저히 분석해, 대권 꿈을 실현하기 위한 이미지 관리에 활용하는 것 같다. 재계 일각에서는 정주영 회장의 92년 대권 도전이 아들을 위한 ‘예행 연습’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월드컵 유치가 정주영 후보의 공약이었다는 사실도 간단히 보아넘길 문제가 아니다.

92년 대선에서 패한 이후 정의원은 어떤 정당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의정 활동을 열심히 한 것도 아니다. 그는 여야가 맞부딪친 정치 쟁점에 대해서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지 않는다. 정의원이 속한 국회 통일·외무위에서 오래 활동한 동료 의원들에 따르면, 그는 상임위에서도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않았다. 국제 감각이 뛰어나 정확히 맥을 짚는 발언을 하지만, ‘정치’에는 끼어들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 동료들의 전언이다. 오직 월드컵 외교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외유가 잦아 국회 출석률도 낮은 편이다. 그래서 정치권에서는 정의원이 왜 국회의원 직을 유지하는지 모르겠다는 비아냥도 없지 않다.

그러나 정의원 처지에서 보면 이러한 의문은 난센스다. 그는 지금 ‘비상’을 위해 이미지를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그로서는 가장 ‘현실적인 정치 행위’이자 전략인 것이다.

한때 최초의 민간인 국방부장관이 되고 싶다고 발언해 군으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기도 했던 정의원은, 대북 및 국가 안보 문제를 다루는 국회 정보위에서 활동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국가의 주요 기밀을 취급하는 국회 정보위는 원내 교섭단체 소속이 아니면 가입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최근까지도 정의원측은 이 사안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위헌 소송을 제기하는 방안을 검토했었다.

무소속의 한계를 절감하면서도 정당 가입에 고개를 젓는 것은, 현상황에서 정당 활동이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데 유익하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요즘도 국민회의 입당설이 나돌고 있지만, 당분간 정당에 몸 담지 않겠다는 정의원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미지 높인 뒤 정치권의 추대 유도

정당을 선택한다면 어느 당으로 가고 싶냐는 질문에 정의원은 “나는 월드컵 당에 속해 있다”라고 말한다. 다음은 정의원이 월드컵 대회의 성공적 개최에 사실상 ‘정치 생명’을 걸고 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는 사례이다. 정부가 서울 상암동 축구 전용구장 백지화 방침을 밝혔을 때 일이다. 당시 그는 ‘DJ만 빼놓고’ 정부와 여당 주요 인사를 다 만났다. 주무 장관인 신낙균 문화관광부장관은 물론이고,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해 청와대의 전 수석, 조세형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 박태준 자민련 총재 등을 찾아다니며 상암동 축구 전용구장을 건설해야 하는 이유를 역설하고 다녔다. 월드컵 문제에 관한 한 정치권 거물들을 뺨치는 막후 정치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아무튼 정의원이 현역 의원 신분을 유지하면서도 현실 정치와는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는 이유는, 일반 대중에게 ‘기성 정치인’과 다르다는 인상을 심으려는 치밀한 전략 때문이라고 보인다. 특히 요즘처럼 정치권에 대한 혐오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는 ‘정치적 때’를 묻히지 않는 편이 이미지 관리에 유리하다.

정의원은 참신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확보하는 데 공을 들이는 것 못지않게, 재벌 2세라는 ‘태생적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는 올해 초 현대중공업 이사진에서 이름을 빼고, 고문으로 물러앉았다. 대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정주영 명예회장이 이사로 등재되었다. 현대중공업은 부친 정명예회장이 ‘정몽준 몫’으로 떼어 준 기업이니, 재벌로서의 이미지를 끊고 정치인·체육인으로서의 이미지를 키워주려는 부친의 배려라는 관측이다. 또한 이는 정명예회장이 아들의 정치적 성공을 위해 직접 나서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정의원의 이러한 행보는 ‘재벌 권력’ 탄생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을 92년 대선에서 절감했고, 그 때의 ‘교훈’을 지금 소리 없이 실천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그가 재벌 2세라는 이미지 탈각 작업에 돌입한 것이다. 이는 평소 정의원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아버지를 꼽으면서도, 가장 싫어하는 단어를 ‘2세’라고 서슴없이 말한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일견 모순으로 보이지만, 이 또한 정의원의 사고를 이해하는 데에는 매우 중요한 단서이다. 재벌 2세 딱지를 떼지 않고는 권력 쟁취가 난망하다는 점을 누구보다 정의원이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사실 92년 국민당 정주영 후보의 대권 도전은 기성 정치 권력에 대한 재벌의 도발이었다. 그러나 재벌의 힘으로 정치판 질서를 재편하려 했던 시도는 무산되었다. 정씨 일가를 잘 아는 한 인사에 따르면, 92년 이후 정의원의 전략이 변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즉 정치판 질서를 ‘깨는’ 방식이 아니라, 정치판 안에서 틀을 ‘바꾸어서’ 꿈을 이루는 쪽으로 선회했다는 것이다. 국제적 감각, 월드컵 대회의 후광, 경영 마인드 등 정몽준이 확보한 이미지를 한껏 키워낸 후, 정치권이 추대토록 하려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현재 현대그룹이 추진하는 대북 관련 사업들도, 사실은 정의원을 ‘통일 시대의 지도자감’으로 키우려는 배려라는 지적도 있다.

현재 정의원은 대개의 정치인들이 못해서 혈안인 조직 확산 작업을 철저히 기피하고 있다. 섣불리 움직여 정권의 견제를 받기보다는 월드컵을 명분으로 사회 각 분야에 ‘인심’을 얻는 행보를 하고 있다고 보인다. 다음은 정의원이 자신의 정치 행보를 묻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뱉은 말인데, 의미심장하다. “달은 잡으려고 하면 멀어진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빛은 방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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