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길목에 돈가뭄, 금배지 ‘허덕’
  • 吳民秀 기자 ()
  • 승인 1995.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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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금 한파로 꽁꽁 언 ‘돈줄’… 제도개혁·정치 풍토 쇄신으로 뚫어야
정치의 섬 여의도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요란하다. 비자금 사건이 낳은 현상이다. 재벌들이 줄줄이 검찰 청사를 들락거리는 상황에서, 요즘 정치인들은 어디 가서 손 내밀기가 쑥스럽다고 한다. 내밀어 보아야 주지도 않는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사업하는 친지로부터도 ‘지금 누구 잡을 일 있냐’고 면박당하기 일쑤다. 그래서 돈얘기는 꺼내지도 못한다. 그냥 끙끙 앓는 도리밖에 없다. 비자금 정국만 넘기면 회복되지 않겠느냐는 희망 섞인 분석도 있지만, 최근 정치판 돌아가는 사정을 보면 장담할 수도 없다. 여당이 ‘정치와 돈’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손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YS는 정면 돌파 방식을 택했다. 노씨 비자금 사건으로 발화한 대형 화재 때문에 정치권 전체가 진화 방법을 놓고 우왕좌왕하는데, YS는 과감하게도 기왕 불탄 집을 허물고 이번 기회에 아예 새로 짓자며 청사진까지 제시하고 나섰다. 그가 제시한 청사진은 이렇다. 5·18 특별법을 제정해서 정치권의 터를 새롭게 다지고, 각종 제도를 개혁해 돈 안드는 정치 풍토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YS는 땜질식 처방보다는 민자당과 정치권 전체를 향해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진화 방안’이라고 결심한 것 같다. 일단 그가 택한 방법은 정치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무엇보다 YS는 자신을 향해 뻗쳐오던 대선지원금이라는 의혹을 단숨에 잠재웠기 때문이다.

현재 여권 핵심부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돈 안드는’ 정치 풍토를 조성하려 하고 있다. 정치자금법과 선거법을 개정해서 음성적으로 흐르던 돈의 흐름을 양성화하겠다는 것이 첫 번째 골자다. 그런 맥락에서 각 후보의 선거비용 상당액을 국고에서 부담하는 선거공영제 도입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강삼재 민자당 사무총장은 11월24일 “현재 10~20%에 불과한 선거공영제 요소를 80%까지 끌어올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으로 흘러들어오는 돈을 투명하게 만들자는 분위기는 이미 대세를 이루고 있다. 국민회의 문희상 기조실장은 “민자당이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우리도 의기투합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둘째는, 비대한 당조직을 날씬하게 만들어서 ‘기본 경비’를 훨씬 줄이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앙당 조직을 축소하고 지구당과 후원회 조직을 강화하는 미국식 정당 모델을 도입하겠다는 것이 현재 민자당 민주계의 발상이다. 결국 국고 보조금만으로도 충분히 운영할 수 있는 정당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년 총선을 앞두고 민자당이 당의 몸피 줄이기에 나서는 데에는 위험 부담이 따르기 때문에, 이 방안은 내년 총선 이후에나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민자당 내부 문제이다. 여당이 그렇게 하겠으니 야당까지 따라오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뭉칫돈 사라져 계파 관리 초비상

돈 안드는 정치 제도와 돈 안쓰는 정치 풍토를 어떻게 만드느냐. 이는 이제 정치권의 화두로 자리잡았다. 이 화두가 등장한 데에는 YS가 비자금 정국에서 탈출하기 위한 국면전환용 카드로 제시한 혐의가 짙게 깔려 있지만, 어찌됐든 이는 정치권의 오랜 숙제였다. 누구랄 것도 없이 사회 전체가 총체적 부패 구조에 휩싸여 있고, 정치인은 그 먹이 사슬의 맨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보스를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해온 한국 정치는 그런 구조 위에서 건설되었다. 보스 정치는 공천권과 돈을 두 축으로 해서 형성되었다. 그래서 5·18 특별법이 그릇된 역사를 청산하는 계기라면, 정치 제도 개혁은 보스 정치의 한 축을 허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정가에서 정치 제도 개혁을 정치권 지각 변동의 예고탄으로 해석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대세에 밀려 정치 제도 개혁 자체에 시비를 거는 정치인은 아직 없지만, 정치권은 내심 바짝 긴장하고 있다. 특히 여야 중간 보스들의 고민은 심각하다. 이들의 자금 사정은 앞으로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최소한 기업들로부터 받던 뭉칫돈은 당분간 사라질 것 같다. 중간 보스들은 이대로 간다면 명절이나 선거 때마다 계보 의원들에게 찔러주던 돈봉투를 마련하는 데에도 숨이 턱에 찰 지경이다.

“중진들은 고생길에 접어들었다. 정치권에 돈줄이 막혔다고 해서 기존 정치 관행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정치인이라면 누구든지 기본적인 쓰임새가 있게 마련이다. 유권자의 의식이 바뀌지 않는 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돈 때문에 형성된 계보 의원은 하나둘씩 떨어져 나갈 것이다. 이제 중진들은 계보 관리를 다른 차원에서 해야 한다.” 국민회의 한 중간 보스의 말이다. 실제로 보스로부터 내려오는 하사금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총선 출마 채비를 서둘러야 하는 평의원들은 자구책을 찾고 있다. 그러나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당장에는 그저 후원회에 기대는 것이 고작이다.

매년 연말 정치권은 각 의원 후원회 행사로 날을 지샌다. 더구나 총선이 코앞이다. 그래서 국회 주변에는 ‘○○○ 의원 후원회의 밤’을 알리는 현수막이 어지럽게 걸려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의원들의 후원회 행사는 지구당 운영비 정도만 나와도 성공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한 해 후원금이 1억원을 넘는 의원이 15명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경우 후원회 행사 때 들어오는 후원금은 친한 정치인들끼리 몰려다니면서 서로 주고받는‘제 닭 잡아먹기’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후원회에 참석하는 의원들은 흔히‘부조’하러 간다고들 한다. 그리고 음성 자금을 처리하는 경우도 많다. 정가에서는 국회의원 후원회의 밤은‘이중 장부 정리의 밤’으로 통한다. 즉, 국정감사 피감 기관으로부터 받는 떡값, 친구나 친지로부터 조달한 자금 따위를 후원회를 통해 양성화한다는 것이다. 현재 정치자금법에서는 후원회비·세비·당비를 제외한 자금 수수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의도판 생존 능력 ‘눈먼 돈 찾기’

그러나 의원들의 정치 활동은 정치자금법이 인정하는 돈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거의 모든 의원들은 정치자금법을 어기고 있다고 스스럼없이 인정한다. 다음 선거에 당선되려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항변이다. 지역구가 서울인 민주당 소속 어느 초선 의원의 사례는 이를 여지없이 반증한다.

그의 지역구에는 조기축구회·부녀회· 상조회와, 운전기사 모임을 비롯한 각종 직능 단체 등 평소 ‘신경써야 할’ 단체가 줄잡아 2백~3백개는 된다고 한다. 국회의원은 그들이 부르면 달려가야 한다. 특히 선거 때만 되면 이들은 반드시 모임을 갖는다. ‘여당은 백만원 야당은 50만원’하는 식으로 공정 가격도 정해졌다고 한다. 인사 치레가 없으면 당장 말이 들어온다. 그뿐만이 아니다. 각종 경조사도 줄을 잇는다. 그는 “선거 때를 감안하면 여당 의원은 평소 한 달에 1억원, 야당 의원은 최소한 한달에 2천만원 이상은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의원들은 ‘눈먼 돈’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여당 의원은 “돈 마련하려고 정치하는 건지, 정치하려고 돈 마련하는 건지 분간이 안된다”고 말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눈먼 돈 찾아내기가 쉽지는 않다. 결국 국회라는 공간과 의원이라는 신분을 활용하는 방법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이다. 지난 7월 주세법개정안으로 파란을 겪었을 때 재경위 소속 의원들이 이런 의혹을 받았다. 당시 의원회관 주변에는 지방 소주업자와 대기업 간의 치열한 로비설이 파다하게 돌았다. 의원들 중에서도 특히 이런 쪽에 밝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은행 대출 알선이나 업계의 세무 관련 민원을 해결해 주고 사례비를 챙기는 식으로 정치 자금을 마련한다. 심지어는 피감 기관에 약점을 폭로하겠다고 위협해 무마비를 챙기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런 쪽에 전혀 재능이 없는 의원들에게도 기회는 찾아온다. 재야 출신인 국민회의 소속 한 초선 의원은 “정치를 하다 보면 가끔씩 검은돈의 유혹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나름의 원칙을 세워놓지 않으면 넘어가기 쉽다”고 말한다.

YS 정치 환경 개혁, 실효 거둘까

이와 관련해서 정가에서는 김상현 국민회의 지도위원장의 이른바 ‘생선론’이 유명하다. 야당가에서 돈을 잘 만들어 잘 쓰기로 소문난 김의장은 “정치인이 정치 자금을 만들 때는 반드시 생선 먹듯이 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라고 밝힌다. 가시 있는 생선과 썩은 생선은 피하라는 얘기다. 이는 구체적인 조건이 걸려 있는 돈이나 검은돈을 뜻한다. 물론 그가 그동안 생선을 잘 가려 먹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여하튼 그는 자신이 20년 간의 정치 공백 끝에 재기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현재 민자당이 추진하는 정치 제도 개혁은, 한마디로 정치인들이 굳이 정치 자금을 만들 필요를 느끼지 못하도록 정치 환경을 바꾸자는 것이다. 비자금 사건의 추악한 전모가 다 드러나기도 전에 정치권이 갑자기 밝아진 듯한 인상이다.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지렛대 삼아, YS의 정치 제도 개혁 의지는 상당히 힘을 얻고 있다. 자정 선언을 한 민주당도 이런 흐름에 일조했다. 물론 여론은 환영 일색이다. 다만 언제 자신의 정치 기반이 무너질지 몰라서 긴장하고 있는 여야 중진들만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데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아무리 제도를 잘 만든다고 해서 50년간 굳어진 풍토가 하루아침에 변하기야 하겠느냐는 것이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최근의 이런 흐름을 놓고 “평생 피아노를 연주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한두 달 배워서 쇼팽의 환상곡을 치겠다는 것은 말 그대로 ‘환상’이다”라고 일침을 놓는다. 총선 전에 바뀔 것이 분명한 선거법과 정치자금법이 환상인지 현실인지는 내년 총선을 거치면서 확인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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