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고 동문,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 나섰다
  • 丁喜相 기자 ()
  • 승인 1997.1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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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고 동문들,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 세몰이… 비참여파와 갈등 심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돕는 경기고 동문들의 움직임이 활기를 띠고 있다. 경기고 49회인 이후보는 15대 대선에서 유일한 경기고 출신 후보로 뛰고 있다. 일찍이 신한국당 경선을 거치면서 경기고 출신 이홍구(49회) 박찬종(54회) 후보가 정리되었고, 지난달 민주당 조 순(45회) 후보가 이후보의 손을 들어주면서 경기고 동문들의 움직임은 세간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이회창과 조 순의 후보 단일화를 계기로 ‘경기고 대통령 만들기’ 바람이 급속도로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경기고 동문들의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 분위기가 공개적으로 표출된 것은, 경기고 총동창회가 지난 11월17일 서울 청담동에 있는 경기고 강당에서 개최한 ‘화동사랑의 모임’ 행사였다.

경기고 총동문회 모임으로 열린 이 날 행사장에는 경기고 출신 인사 천여 명이 모여 이회창 후보에게 거는 동문의 기대를 드러냈다. 총동창회 명예 회장인 김 집 전 체육청소년부장관이 “이회창 동문과 조 순 동문이 합쳤다. 이제 동문이 하나로 뭉쳐 새 역사를 창조하자”라고 말하자 참석자들은 기립 박수로 ‘이회창’과 ‘대통령’을 연호하며 화답했던 것이다.

“이·조 연대하라” 압력 행사

이 날 행사는 예년에 치른 동문 화합 행사와는 성격이 달랐다. 주최측은 각계에서 활약하는 경기고 출신 중 친 김대중 성향 인사를 배제함으로써 동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경기고 출신 대통령 만들기’ 분위기를 확산하는 이벤트로 활용했다. 그 결과 이날 행사 이후 ‘총동창회가 동문들 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동문 내부의 비판도 따랐다.

그러나 경기고 동문 전체를 놓고 볼 때는 과거 대선 시기에 경북고·경남고가 보였던 것과 같은 단결력을 기대하기는 무리라는 주장도 많다. 경기고 출신의 속성이 단결이나 권력 지향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전국의 수재들이 모였던 경기고에는, 학창 시절부터 협력과 단결보다는 경쟁에 바탕을 둔 엘리트주의 학풍이 뿌리 깊었다. 그래서 경기고 출신은 한국 사회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파워 엘리트로 자리잡아 오면서도 모래알 같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그러나 15대 대선이 임박하면서 ‘경기고 출신 대통령’에 대한 동문들의 관심과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자 ‘경기고 단결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회창 후보 진영은 경기고 동문들의 그런 정서를 자극하는 데 주력해 왔다. 현재 경기고 동문 사회에 불고 있는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 바람은 이후보 진영이 일찍부터 졸업 기수별 경기고 출신을 상대로 동문 의식을 자극한 뒤, 세력 규합 작업을 벌여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경기고 동문들이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벌인 1차 작업은 지난 8월 신한국당 경선에서 선보였다. 일찍이 여권내 경기고 인맥은 경선 과정에서 크게 이회창·이홍구·박찬종 지지 세력으로 3분되어 있었다. 그 중 세력이 가장 컸던 이회창 후보를 지원한 동문들이 이홍구·박찬종 후보 지지 동문을 상대로 주저앉히기 작업에 나섰다. 이들 경기 인맥은 이회창 후보의 경선 승리를 주도한 후 이홍구 후보 캠프에 섰던 현홍주 전 주미대사, 한승주 전 외무부장관, 백영철 한국정치학회장을 함께 뛸 ‘경기고 사단’에 편입했다.

경기고 사단은 이후보 지지율이 지지부진하던 지난 10월에는 민주당 조 순 후보 공략에 나섰다. 이에 대해 이회창 후보 진영의 한 핵심 인사는 “두 후보는 경기고 동문이기는 하지만 각각 걸어온 인생이 달라 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결국 경기고 선후배들이 두 후보 단일화를 위해 나섰고, 특히 두 후보의 선배들이 조총재를 압박했다. 조총재에게 만약 이인제 후보와 합치면 동문 차원의 후원금을 단 한푼도 안주겠다고 최후 통첩을 보낸 게 주효했다”라고 말했다.
김우중·박용오·김승연 등 재계 인사 포진

어쨌든 경기고 출신 여권 인맥은 15대 대선을 앞두고 동문의 힘으로 여권 단일 후보를 만들어냈다. 이들은 여세를 몰아 기필코 이회창 대통령을 만들어 내겠다는 의지로 동문 결속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들은 서울 광화문·여의도·강남 세 곳에 사무실을 내고 동문 규합과 연락 작업, 모금 운동, 주 2회에 걸친 친목 모임 같은 활동을 벌이고 있다. 원래 경기고 개교 100주년(2000년) 기념 행사 준비 모임으로 지난 11월 17일 총동문회가 띄운 화동사랑의 모임은 사실상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 활동을 겸하고 있다.

그동안 경기고 동문 결속 작업의 구심 역을 맡아온 인물로는 서상목 한나라당 대선기획본부장, 안동일 변호사, 진 영 이회창 후보 정책특보, 황영하 전 총무처장관 등이 꼽힌다. 여기에 대선이 임박하면서 지역·졸업 기수·부문 별로 동문 결속 작업을 맡을 대표단이 가동되고 있다. 이후보와 동창인 49회 졸업생 중에서는 오성환 전 대법관과 이세중 전 대한변협 회장이 나섰다. 이후보의 경기고 후배 그룹인 50회대 동문들로는 안동일 변호사, 유경현 전 평통 사무총장, 백영철 한국정치학회장, 현홍주 전 주미대사, 한승주 전 외무부장관이 뛰고 있다. 졸업 기수 60회대 동문은 진 영 정책특보(66회)와 이후보의 동생인 이회성씨(60회)가 주축이다. 특히 이회창 후보측 경기고 동문들은 60회대 졸업생 중 이 철 전 의원(63회)을 상징적 인물로 보고 이후보 진영에 영입하기 위해 각별한 공을 들였다. 이 철 전 의원의 한나라당 입당 뒤에는 경기고 선후배들이 총동원되어 눈물을 흘리다시피 하며 설득한 숨은 사연이 있었다.

조 순 후보가 이회창 후보의 손을 들어준 이후, 결속에 가속도가 붙은 경기고 동문들은 지역별 동문 조직을 통해 이후보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숨어서 활약해 왔다. 부산·경남 지역은 정재문 의원과 유흥수 전 의원이 주축이 되어 이 지역 한나라당 의원 탈당 방지에 주력했다. 경북에서는 김 집 전 체육청소년부장관이, 강원도에서는 이응선 의원이 각각 경기고 동문 규합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다. 또 수도권에서는 이재명·정영훈 의원이 동문 결속 작업을 하고 있다.

이밖에 학계에서는 안병만·이강혁 전 외국어대 총장, 한승수 고려대 교수, 유세희 한양대 교수, 방석현 서울대 교수 등이 이회창 후보를 적극 돕고 있는 경기고 인맥이다.

경기고 출신 중 이회창 후보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는 쪽은 재계 인맥이다. 재계 인맥을 엮는 작업은 안동일 변호사가 꾸려온 이회창후보후원회가 주로 맡아 왔다. 정재석 전 경제 부총리가 회장으로 있는 이회창후보후원회는 이회창·조 순 후보가 합친 이후 단시간에 목표 후원금액을 채웠다. 이에 대해 안동일 변호사는 “처음에 18명으로 발기했는데 지금은 3만여 명이 참여해 이후보에게 큰 후견자 역할을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재계에 포진한 경기고 인맥은 이회창 후보의 든든한 선거자금 조달 창구이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정명식 포철학원 이사장, 박용오 두산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김현철 삼미그룹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이 모두 경기고 출신이다. 이밖에 30대 그룹 중 경기고 출신인 중역 이상 임원도 대우가 31명, 현대 12명, 삼성 11명, 효성 10명, LG 6명 등으로 집계된다.

경기고 동문들의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 작업은 첫 단계인 세 규합에 성공한 이후, 여세를 몰아 모금운동과 구전 홍보단 역할을 적극 펼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동문 내부의 반발도 만만치는 않다. ‘경기고 출신 대통령’보다 정권 교체를 지지하는 동문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경기고 총동창회는 기수 별로 ‘이회창 지지 선언’을 준비하다 몇몇 기수회장이 반기를 드는 바람에 좌절한 일도 있었다. 또 대선을 앞두고 나오는 경기고 동문 단결론에 대해 ‘경기인의 정신’에 어긋난다며 거부감을 보이는 동문들도 있다.

경기고 70회 졸업생인 참여연대 박원순 사무처장은 “나에게도 경기고 대통령 만들기 모임에 들어오라는 연락이 많이 오지만, 경기고 출신이 과거 경북고처럼 뭉친다면 나라 꼴이 심각해진다는 판단에서 거리를 두고 있다”라고 말했다. 각계에서 이미 파워 엘리트로 활약하고 있는 경기고 출신들이 끼리끼리 단결해 권력을 창출하고 ‘엘리트 내부 동맹’을 만들게 되면 우리 사회에 엄청난 위화감을 조성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현재 진행되는 경기고 출신 인사들의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가 성공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후보의 대선 승패와 관계 없이 이번 선거를 계기로 경기고 동문 사회는 반목과 위화감이라는 상처를 깊게 간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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