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소야대 탓에 개혁 안된다고?
  • 李敎觀 기자 ()
  • 승인 1998.07.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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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계류 중인 정부·여당 ‘개혁 법안’ 거의 없어…여당이 법안 통과 막기도
김대중 정부의 개혁이 지지 부진한 원인은 무엇일까. 여당인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그 원인을 국회의 여소야대 구도에서 찾는다. 한마디로 여권은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한나라당이 사사 건건 시비를 걸어 정부의 각종 개혁 작업이 늦어지는 등 국정 운영이 불안하다고 인식한다. 따라서 한나라당의 과반수 의석 허물기와 함께 지역 연합 등 정계 개편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권의 이같은 정국 인식이 타당한지를 알려면 확인해야 할 대목이 한 가지 있다. 지난 2월25일 김대중 대통령 취임 이후 정부와 여당이 국회에 제출한 정치 및 경제 개혁 관련 법안들 중에 아직까지 국회에 계류되어 있는 법안들이 있는지 여부가 그것이다. 만약 그러한 개혁 법안들이 있다면, 여소야대 구도 때문에 개혁을 추진하기 어렵다는 여권의 인식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

2월25일부터 현재까지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은 모두 26개이다. 이 중 외국인투자자유지역설치법안 등 12개 법안은 국민회의와 자민련 의원들이 제출한 것이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단독 발의한 법안은 조세감면규제법 중 개정 법률안 등 8개이다. 변호사법 중 개정 법률안 등 3개는 여야 공동으로 제출했고, 학교보건법 중 개정 법률안 등 3개 법안은 정부가 발의했다.

문제는 계류 중인 이들 법안 중 여당 의원들이 발의한 법안들이 과연 개혁 법안이냐는 점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당장 통과되지 않으면 지난해 외환 위기로 초래된‘IMF 사태’를 극복하는 데 지장을 줄 수 있는 법안들이 계류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한 법안들이 있어야만 여소야대 구도로 인해 각종 개혁 작업이 어렵다는 여권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계류 중인 여당 의원들의 법안 중 경제와 관련된 것은 모두 7개. 이 중 개혁과 관련이 있는 대표적인 법안으로는 박광태 국민회의 의원과 이태섭 자민련 의원 등 여당 의원들이 4월15일 발의한 외국인투자자유지역설치법안이 있다. 이 밖에 자민련 이건개 의원 등이 4월10일 발의한 부정수표단속법 중 개정 법률안과, 국민회의 김병태 의원 등이 3월12일 제출한 소비자보호법 중 개정 법률안도 꼽을 수가 있다.

그러나 많은 경제 전문가가 이들 법안이 통과되지 않고 있다고 해서 IMF 사태를 극복하는 데 막대한 지장이 초래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들 법안이 기업 및 금융 부문 구조 조정을 핵심으로 하는 경제 개혁의 본체가 아니라 곁가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들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소야대 국회가 현 정부의 경제 개혁을 가로막고 있다는 여권의 주장은 지나치다는 지적이다.

여야 의원들이 공동으로 발의한 어음법 중 개정 법률안 등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들 법안이 통과되면 중소기업들이 대기업과 거래한 대금을 주로 어음으로 받음으로써 발생하는 불이익을 덜 수 있다는 점에서 개혁적이다. 그럼에도 중소기업들이 겪는 고통의 주된 원인은 금융 개혁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서 발생하는 돈 가뭄이므로 이들 법안이 계류되어 있다고 해서 경제 개혁이 안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인식이다.

정부가 발의한 경제 관련 법안 가운데 계류되어 있는 것은 5월8일 제출된 국민연금법 중 개정 법률안밖에 없다. 그러나 이 법안은 개혁과 거리가 멀다고 연금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 법안이 정부로 하여금 국민연금을 실세 금리보다 낮게 세금처럼 마구잡이로 쓸 수 있게 함으로써 국민연금을 부실하게 한 주범으로 꼽히는 공공자금관리기금법 제5조 1항을 존속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개혁 법안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개혁 법안 통과보다 자존심이 중요?

여권의 주장이 이처럼 설득력이 약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대목이 있다. 앞서의 7개 법안이 야당의 반대로 계류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히 3월12일과 4월15일 각각 발의된 예산회계법 중 개정 법률안과 외국인투자자유지역설치법률안은 제190회(3월6일∼4월4일)와 제191회(4월8∼24일) 임시국회에서 통과될 수 있었으나, 당시 여야는 북풍 사건과 환란 수사를 놓고 치열하게 대치해 이들 법안에 대한 심의는 뒷전이었다.

어음법 중 개정 법률안과 하도급 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등 여야가 5월 초에 공동으로 발의한 법안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론 제192회(5월1∼15일)와 제193회(5월23일∼6월24일) 임시국회가 한나라당에 의해 단독으로 소집되었다는 점에서 이들 법안이 통과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여당이 이들 법안의 통과가 중대하다고 판단된다면 자존심은 상할지라도 야당의 소집 요구에 응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았느냐는 지적도 있다.

이처럼 정부와 여당의 경제 개혁 법안들이 여소야대 국회 때문에 좌절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정부가 필요로 한 법안들은 모두 통과되었다. 정부가 4월29일 발의한 주요 개혁 법안인 은행법개정안, 증권거래법개정안, 외국인 투자 및 외자 도입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제192회 임시국회 마지막 날인 5월15일에 통과되었다. 또 다른 주요 법안인 조세감면규제법개정안과 법인세법개정안은 제190회 임시국회 회기인 3월 하순 처리되었다.

정부의 더딘 개혁 작업이 더 문제

전문가들은 오히려 정부의 개혁 작업이 더딘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한구 대우경제연구소장은 “정부의 입법 과정이 변화의 추세에 비해 느리다”라고 말한다. 이는 구조 조정과 관련한 법안들에 대해 여당과 협의를 마친 부처가 재경부뿐이라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협의 시점이 6월10일 전후였다는 것은, 여소야대 국회가 그동안 정부의 개혁을 가로막았다는 여권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다.

현재 재경부가 국회에 제출하기 위해 마련한 개혁 법안은 모두 10개이다. 이들 법안 중 국민회의·자민련과 당정 협의가 완료된 법안은 부동산과 주택 매입 수요 확충을 위한 양도세 감면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조세감면규제법 개정안, 외국인 투자 자유화와 외국인 투자자들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기 위한 외국인투자촉진법 제정안 그리고 외환 거래의 자유화와 그에 따른 보완 방안이 담긴 외국환관리법이 있다.

정치 개혁과 관련한 법안들이 계류 중인 이유도 여소야대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특히 공직 선거 및 선거 부정 방지와 관련해 여야가 당 차원에서 서로 내용이 다른 법안들을 발의했기 때문에 여야가 합의해서 단일 법안을 만들기 전에는 통과되기 어렵다. 이와 달리 중요한 정치 개혁인 정치자금법개정안의 경우 국민회의나 자민련 의원들이 아닌 한나라당 의원들이 발의했으나 여야의 이해가 달라 계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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