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회의 ‘영남 철벽’ 두드리다
  • 하동·구미/이숙이 기자 (sookyiya@sisapress.com)
  • 승인 1996.08.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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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회의 ‘경상도 달래기’ 힘겨운 출발… 화개장터 열기 불구, 구미는 썰렁
 
花開장터가 아닌 火開장터라고 해야 옳았다. 체온보다 높은 37도의 불볕 더위가 숨쉬기조차 버겁게 하는 날씨였다. 연단 위에서는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영·호남 화합을 호소하는 열변을 토해냈다. 화개천변을 가득 메운 천여 청중의 반응도 뜨거웠다. 화개장터에 불꽃이 활활 피어오른 분위기였다.

DJ가 영남 스킨십을 본격 시작한 8월 초하루. 영·호남 화합의 상징인 경남 하동 화개장터는 대선 유세장을 방불케 했다. 총재 특보단과 전남 지역 의원 등 30명 가까운 국민회의 현역 의원이 무대 주위를 에워쌌고, 영남 지역 원외위원장들도 총출동했다.

참석자 일일이 지적해야 발언

흥돋이는 인기 가수들의 공연으로 시작됐다. 조영남이 주제곡 <화개장터>를 부르며 이번 행사의 메시지를 단박에 부각시켰다. 청중들은 이 노래의 가사를 쓴 이가 국민회의 김한길 의원이라는 사실에 놀랐고, DJ가 손뼉을 치며 후렴구를 따라 부르자 그 ‘낯선’ 모습에 다시 한번 놀랐다.

현 미가 <밤안개> <노란셔츠의 사나이>로 한껏 분위기를 띄운 후, DJ와 지역 주민 간의 질의·답변 시간이 마련되었다. 하동·부산·여수 출신의 세 질문자가 물었다. ‘지역 갈등이 언제부터, 왜 생긴 것인가’‘지역간 정권교체론은 영남 배제를 의미하는 것 아닌가’‘지역 갈등 해소 방안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DJ는 지역 갈등은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한 후 심화됐으며, 지역간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면 거국 내각을 구성해 절대로 영남을 차별하지 않겠으며, 지역 갈등 해소 방안은 수평적 정권 교체라고 대답했다. DJ는 또 ‘YS의 용공 조작과 비무장지대(DMZ) 사건 부풀리기는 나쁜 행동’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한 후, 한 집안에서도 큰 형님이 재산을 다 차지하면 불화가 나는 법인 만큼 이번에는 여당이 야당 되고 야당이 여당 되는 풍토를 만들어 보자고 역설했다. 평소 하고 싶었던 얘기를 보따리째 풀어놓는 듯했다.

연설 사이사이 청중들로부터 박수가 터져나왔다. 감동이 밴 환호였다. 하동 주민의 반응이 궁금해 청중석을 훑었다. 그러나 빼곡히 들어찬 청중 사이에서 하동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대부분 여천·순천·구례·곡성 등에서 총재를 ‘뵈러온’ 전라도 사람들이었다. 섬진강 상류 기름 탱크 설치 반대 시위를 위해 왔다는 한 청중은 곡성 주민만 4백여 명이 함께 왔다고 전했다. 행사장 맞은편에는 전남 번호판을 단 관광버스가 20대 가까이 줄지어 서 있었다. 어렵사리 찾아낸 이 지역 한 할머니는 “김총재 말 중에 옳은 얘기도 많더라. 하지만 특정인을 너무 심하게 꼬집는 것은 좀 걸린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김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이 거슬린다는 의미였다. 행사장 밖에서 만난 한 중년 부인은 홍보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차가 북적대는 모습을 보고서야 DJ가 온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국민회의측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행사였지만, 단지 경상도 땅을 빌린 전라도 사람들의 단합대회로 끝난 것 아니냐는 아쉬움이 남았다.

DJ에 대한 영남인들의 보이지 않는 벽은 ‘DJ 영남 방문’ 첫 순례지인 구미공단에서도 이미 감지되었다. 구미공단 방문은 중소기업의 어려움을 직접 현장에서 듣고 대책을 강구하자는 취지에서 마련한 일정이었다. 박상규 부총재와 손세일 통상산업위 위원장 등 당내 중소기업 전문가들이 DJ를 수행했다. 하지만 DJ와 공단 입주자들과의 대화 시간은 한마디로 썰렁했다. 사회를 맡은 김민석 의원이 일일이 참석자를 호명해 질문을 구걸해야 했다. 전자부품 업체를 운영하는 한 입주사 대표는 그 이유를 ‘별다른 기대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중소기업의 어려움을 털어놓을 기회가 많았지만 정작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는 얘기다. 야당 총재의 첫번째 공단 방문을 환영하면서도 ‘무슨 힘이 있겠느냐’는 것이 공통된 인식인 듯했다.
DJ가 공단 입주 업체 두 곳을 방문했을 때도 반응은 비슷했다. 한 방문 업체 간부는 “가장 더울 때라 직원들이 번거롭게 여기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수백 개 공단 입주 업체 가운데 우리가 방문 업체로 선정됐다는 것 자체가 회사 이미지나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큰 효과가 있어 흔쾌히 수락했다”라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방문하는 국민회의나 맞아들이는 입주 업체나 실질 효과보다 이미지 전략에 초점을 두기는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특보단·총재, 시간차 공격 전술 채택할 듯

영남 방문의 결과가 기대 이하로 나타나자 특보단은 다소 난감한 표정이었다. 한 특보는 ‘총재가 온 후로 특보단은 뒷전’이라는 말로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당초 특보단의 대화 여행에 총재가 격려차 합류하는 성격이었는데, 정작 총재가 합류한 뒤부터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얘기다. 총재가 동행하면서부터 언론을 통한 홍보 효과는 높아졌지만, 취재진과 수행인 등 한 무리가 우르르 몰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모습은 오히려 거부감만 일으킬 수 있다는 자체 분석도 나왔다. 특히 국민회의가 주된 공략처로 삼고 있는 영남권 방문에서 기대에 못미치는 효과를 얻은 데 대해 특보단은 큰 아쉬움을 나타냈다.

특보단은 앞으로도 대화 여행을 계속할 계획이다. 방법과 시기는 미정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DJ와 함께 움직이지는 않으리라는 점이다. 특보단이 길을 닦아 놓으면 DJ가 그 길을 타고와 효과를 극대화하는 시간차 공격이 새로운 전술로 채택될 가능성이 크다.

DJ의 영남 순례. 이번 행사는 DJ가 영남 진군의 첫발을 내디뎠다는 점에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번 방문은 동시에 영남 벽이 얼마나 두터운지를 새삼 확인하는 계기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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