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경선인가,탈선인가
  • 김은남·차형석 기자 ()
  • 승인 2004.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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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력 있는 영입파 줄줄이 탈락…조직력 강한 토착 후보 ‘100전 99승’
김성호 의원(서울 강서 을)이 경선에서 탈락할 때만 해도 열린우리당은 웃었다. 창당 주역이자 40대 현역 의원으로서 앞날이 창창한 김의원의 낙마는, 인간적으로 보자면 분명 동정할 일이었다. 그렇지만 당 차원에서 손해볼 일은 없었다. 김의원이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리당 경선은 새 선거 문화의 아이콘인 양 떠올랐고, 덩달아 김의원을 이기고 강서 을 지역 우리당 후보로 확정된 노현송 전 강서구청장 지지도 또한 10% 포인트 이상 뛰어올랐다.

이에 우리당은 ‘3고(高)·3무(無)·3신(新) 효과’가 새로 발생했다고 자화자찬하는 보도 자료를 뿌리기도 했다. 선거판에 우리당식 국민참여경선 제도가 정착하면서 정치 신뢰도·우리당 후보 지지도·정치 참여 의지가 상승했고(3고), 금품 제공·유권자 동원·경선 불복 문화는 사라지고 있다(3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자축 분위기가 깨지는 데는 채 2주가 걸리지 않았다. 지난 2월22일 경기 고양 덕양 을과 파주에서 경선을 치른 권오갑 전 과기부 차관과 박 정씨(박정어학원장)를 필두로 경제 칼럼니스트 겸 방송인 김방희씨(서울 서대문 을), 최창환 전 이데일리 대표(서울 은평 을) 등 우리당이 공들여 영입한 인사가 경선에서 줄줄이 낙마하면서 당 지도부 사이에는 ‘이게 아닌데’라는 당혹감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특히 대전지법 판사를 지내다가 지난 대선 막바지 김민석 전 의원의 ‘배신’에 맞서 분연히 법복을 벗어던지고 노무현 캠프에 합류함으로써 노풍(盧風)을 재점화한 주역 중 한 사람이었던 박범계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마저 2월27일 대전 서구 을 경선에서 탈락하자 지도부는 아예 할 말을 잃었다.
이들 영입 인사는 대부분 지역에서 수 년간 표밭을 일구어온 이른바 토착 후보에게 패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물론 영입 인사가 경선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한 당직자는 ‘자업자득’이라는 말로 이들의 패인을 설명했다. 자신의 유명세만 믿고 선거 한두 달 전에야 지역을 비집고 들어간 이들 영입 인사가 토착 후보에게 밀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박범계씨 같은 경우도 중앙 당에서는 이런 점을 우려해 토착 후보세가 약한 대전 유성구로 지역구를 옮기거나, 김민석 전 의원 지역구(서울 영등포)에 대항 출마할 것을 권유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지만 문제는 이들 토착 후보가 과연 순수한 자기 경쟁력만으로 경선에서 승리했느냐 하는 점이다. 중앙 당의 한 고위 관계자는 최근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초기에 우리가 너무 낙관했던 감이 있다. 경선 결과를 상당 부분 조직이 좌우한다는 사실이 시간이 흐를수록 드러나고 있다”라고 토로했다.

이는 우리당보다 2∼3주 늦게 경선을 시작한 한나라당·민주당 후보 또한 공통으로 지적하는 문제이다. 2월28일 부산 영도에서 경선을 치른 김형오 의원(한나라당)의 한 참모는 “열린우리당 선거 결과를 두고 남들이 이변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전혀 이변이 아니다. 현행 경선 방식으로는 조직을 장악한 사람이 백발백중 이기게 돼 있다”라고 주장했다.

본래 국민참여형 경선은 돈과 조직에 의해 선거 결과가 좌우되는 폐단을 고치기 위해 도입한 제도이다. 그럼에도 새롭게 도입한 경선에서 다시금 조직 선거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다고 할 만하다. 경선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무엇보다 현행 경선 방식에 근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당·한나라당의 경우 경선을 위해서는 일단 전체 유권자 수의 일정 비율에 해당하는 선거인단을 확보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지구당 선관위가 선정한 여론조사 기관(또는 선관위가 채용한 전화 면접원)이 해당 지역 유권자에게 수만 회에 걸쳐 전화 통화를 시도하게 되어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전화번호부에 전화번호가 등재된 유선 전화 가입자들만 선거인단 모집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조직의 힘은 바로 이 단계부터 발휘되기 시작한다. 낮에 집을 비우는 직장인·대학생 등이 유선 전화를 받기 힘든 것은 당연한 일. 따라서 조직력을 갖춘 후보는 이들 대신 주부·노인 또는 무직자 층을 며칠 동안 전화 옆에 대기하게 한다거나, 집을 비운 사람이라도 부재중 걸려온 유선 전화를 무선 전화로 착신 전환케 유도하는 방식으로 자기 사람을 선거인단에 끌어들이는 ‘작업’을 벌인다.

조직의 힘은 선거인단 확정 이후 다시 한번 본격적으로 발휘된다. 현재 우리당·한나라당은 공히 경선 3∼4일 전부터 후보들이 선거인 명부를 열람할 수 있게 한다. 각 당에 따르면, 이는 인지도가 낮은 신인들에게 자기 홍보를 할 기회를 주기 위해 도입한 방식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를 통해 재미를 더 많이 보는 것은 조직세가 강한 후보일 수밖에 없다. 최근 경선을 치른 한 현역 의원측은 “정당 조직은 평소 통·반 책임자까지 다 두고 있다. 선거인단 명단이 나오면 이들을 모두 동원해 명단 중 아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서 3일 동안 집요하게 전화하고 선거 당일 투표장에 나오게끔 하면 된다”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조직력에서 열세인 정치 신인은 분루를 삼킬 수밖에 없다. 경선을 참관하러 나온 한나라당 부산시지부 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는 이같은 우려 때문에 선거인단 명부를 공개하지 말자고 중앙 당에 건의했는데도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이게 무슨 민주주의인가, 조직 싸움이지”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지역의 이같은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경선 제도 자체는 완벽하다’는 것이 중앙 당의 공식 입장이다. 단지 운용상 문제가 발생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정기남 우리당 부대변인은 “제도 자체는 훌륭한데 준비 기간이 짧다 보니 충분히 홍보가 되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 투표율을 끌어올리고 젊은층의 참여를 확대하면 국민 경선의 취지를 제대로 살릴 수 있을 것으로 본다”라고 낙관론을 폈다.

사실 국민 경선 자체는 이미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과정을 통해 그 파괴력이 입증된 제도이다. 문제는 이것이 모든 선거에 적합한 제도냐 하는 것. 대선보다 관심도나 참여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총선이나 지자체 선거에서 국민 경선은 자칫하면 민의를 오히려 왜곡하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3월1일 현재 25개 지역구에서 경선을 치른 열린우리당의 경우 평균 투표율은 35% 수준에 불과하다. 이 중 투표율이 가장 낮았던 서울 마포 갑(22.4%)은 전체 선거인단 8백18명 중 불과 1백83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선을 치렀다. 곧 1백83명이 11만 명(마포 갑 전체 유권자 수)의 민의를 대변한 셈이다.

그나마 1백83명이 질적으로 ‘엄선된’ 표본이었다면 문제가 덜하다. 나이와 성별만 따지는 현행 선거인단 추출 방식으로는 선거인단의 대표성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다고 허명회 교수(고려대·통계학)는 지적한다. 화이트칼라·블루칼라, 대졸·고졸 등 다양한 계층의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려면 선거인단을 뽑을 때 나이·성별뿐 아니라 직업·학력·생활 수준 등을 다각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 제기가 이어지면서 최근 정치권에는 경선만능주의를 경계하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최근 우리당 지지자들은 영입 후보를 밀어내고 토착 후보들이 승승장구하자 ‘여기가 열린우리당이냐, 열린지역당이냐’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토착 후보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 인사의 경우 우리당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 전력을 갖고 있는데도 중앙 당이 이들을 경선 대상에 포함해 화를 자초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한 예로 파주 경선에서 당선된 우 아무개씨는 한국자유총연맹 파주시지부장 출신이고, 서울 양천 갑에서 당선된 김 아무개씨는 학력 위조 시비 때문에 2000년 민주당 구청장 후보로 결정되었다가 탈락한 전력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일각의 지적대로 단순히 민의를 대변하기에는 경선보다 여론조사가 훨씬 더 정확하고 과학적인 제도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각 당은 지지층의 결속을 굳게 하고 정치 무관심층을 새롭게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으로 경선을 도입했다. 그러나 경선이 제구실을 못하면서 지지층은 지지층대로 흥미를 잃고, 정치 무관심층 또한 오히려 확산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제도 보완이 선행되지 않는 한 국민 경선이 ‘축제’는커녕 ‘재앙’이 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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