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 바람이 불붙인 ‘불교 전쟁’
  • 崔 進 기자 ()
  • 승인 1996.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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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 조계종 등 주류에 소수 종파 반발…여권 물밑 지원 받으며 ‘딴 살림’ 모색
“수행자들이여, 내 가르침을 중심으로 서로 화합하고 존경하며 다투지 말라!” 부처가 열반하기 직전에 남겼다는 유언이다. 그러나 부처의 마지막 간곡한 가르침도 정치 바람 앞에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최근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는 며칠 간격을 두고 ‘정치적’으로 전혀 다른 법회가 두 번 열렸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불교계가 두 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한 갈림길이었다.

11월18일 오전 8시 서울 을지로 롯데호텔 2층 크리스털 볼룸. 전국 각지 22개 종단에서 모인 1천2백여 승려가 참석해 ‘국가와 겨레를 위한 기원 대법회’를 열었다. 주최는 대한불교종단진흥회(회장 배일공 원륭종 총무원장). 이 날 법회는 연설 내용에서도 익히 드러났듯이 다분히 친여적인 집회였다. “역사 바로 세우기와 세계화 추진을 위해 주야 노고하시는 대통령 각하에게 충심으로 감사와 경의를 표현하는 바입니다.” “대통령 각하에게 부처님의 자비 광명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날 주최측은 호국발원문과 대통령에게 드리는 메시지,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내는 메시지, 국민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통해 안보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고 대통령의 노고를 여러 차례 칭송했다.

그로부터 4일 후인 11월22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 조계종을 중심으로 하는 전국 3개 종단 2천여 사찰에서 3천여 승려가 운집해 ‘환경 보존과 민족문화 수호를 위한 전국 본말사 주지 결의대회’를 열었다. 주최는 대한불교종단협의회(회장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 이 날 조계사 안팎에는 정부 ·여당의 환경 정책을 비판하는 현수막이 구름처럼 내걸렸고, 사이사이에 ‘김영삼 정권은 불교계 분열 정치를 즉각 중단하라’(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불교 자주성 훼손하는 외부 간섭 물리치자’(동국대 불교학생회)라고 쓴 현수막도 여러 개 보였다. 협의회측은 현 정권의 신권위주의와, 정치적인 목적으로 불교계를 분열시키려는 책동에 대해 강력히 비난한 뒤, 불교의 자주성을 역설했다. 대구 반야사에서 왔다는 한 스님은 “외부 대중에게 불교계가 분열됐다는 인상을 주어 마음 아프다. 하지만 선거 때만 되면 불심을 정치에 이용하려는 집권 세력에게 매운 맛을 보여주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조계사 법회가 진흥회라는 이탈 세력과 그 이탈을 부추기는 집권 여당에 강력한 경고를 보내는 일종의 세 과시 집회라고 입을 모았다.

나라를 위한 법회 “어용이다” “아니다”

불교계는 왜 두 개의 모임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가. 이제까지 불교계는 조계종·천태종·태고종 등 크고 작은 28개 종단이 대한불교종단협의회(협의회)라는 단일 조직체를 형성해 왔다. 그 가운데 최대 종파는 전체 신도 수의 80%를 차지하는 조계종. 불교계 하면 곧 조계종을 떠올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 천태종·태고종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종단은 소수파다. 바로 이 소수파 22개 종단이 대한불교종단진흥회(진흥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실상 독립을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진흥회의 한 관계자는 자기들의 독자 노선에 대해 “해마다 열어온 ‘나라와 겨레를 위한 법회’가 94년 12월 송월주 체제가 들어선 이후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협의회가 거부하는 바람에 진흥회만으로 행사를 강행했다. 대통령은 정파를 떠나 국가 지도자인데, 이번 법회를 어용 행사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말했다.그러나 협의회측의 주장은 전혀 다르다. 협의회측은 송월주 총무원장 체제가 들어서고부터 정권과의 밀월을 청산하기 위해 그런 친여적인 법회는 열지 않기로 했으며, 앞으로도 그같은 어용 법회를 배제함으로써 정치적 자주성을 확보하겠다고 다짐한다. 협의회측은 11월22일 조계사 대회에서도 지속적인 종단 개혁과 발전을 위해서는 종도들의 단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외풍 차단’을 결의했다. 협의회에 맞선 진흥회는 이 날 법회에 불참했을 뿐만 아니라 서울 종로구 낙원동 파고다 빌딩 3층에 40여 평 규모 사무실을 따로 마련하고 사실상 결별 수순을 밟고 있다.

불교계는 94년 4월 서의현 전 총무원장 체제가 무너질 때부터 분열의 씨앗을 잉태했다. 이른바 개혁 종단으로 일컬어지는 현 송월주 체제가 들어서면서 상층부는 개혁 성향의 승려들로 대거 교체되었지만, 중·하부에는 서의현 전 총무원장이 심어놓은 보수 인맥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보수 종단의 일부가 그동안 개혁 바람에 숨죽이고 지내오다 불교종단진흥회라는 이름으로 부활을 시도했다는 것이 불교 관계자들의 해석이다. 여기에 최대 종단인 조계종이 불교계를 주도하는 데 대한 군소 종단의 소외감과 불만도 분열을 가속화했다고 한다.

이래저래 불만으로 가득차 있던 비주류에게 불을 지핀 사람으로는 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지목되고 있다. 협의회측에 따르면, 강총장은 야권 성향이 강한 현 송월주 체제로 내년 대선을 치를 수 없다고 판단하고, 비주류측을 은근히 부추겼다는 것이다. 강총장의 암묵적인 지원에 힘을 얻은 진흥회는 마침내 독자적으로 국가와 겨레를 위한 기원 법회를 열기로 하고, 10월 초부터 김영삼 대통령을 비롯한 여야 정당 대표에게 참석 요청 공문을 보냈다.

진흥회측의 독자 행보에 놀란 협의회측은 즉각 ‘불교계에 혼란을 조장하는 진흥회측의 법회에 참석해서는 안된다’는 요지의 공문과 메시지를 보냈다. 이 과정에서 국회 불교도 모임인 정각회 회장 서석재 의원은 진흥회측으로부터 참석해 달라는 공문을 세 차례, 협의회측으로부터 참석해서는 안된다는 공문을 두 차례나 받았다. 양측으로부터 ‘공문 공세’를 받은 여야 정당 대표와 정부 관계자, 특히 여당 인사들의 처지는 매우 난처했다. 강삼재 총장이 적극 개입한 것으로 알려진 친여 성향의 진흥회에 참여하자니 불교계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조계종에 눈치가 보이고, 불참하자니 여권 수뇌부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진흥회는 예정대로 법회를 열었다. 그러나 막상 행사장에는 신한국당 불자회장인 함종한 의원과 김명윤 의원, 자민련 불자회장인 정상구 의원만 참석했을 뿐 기대했던 서석재 의원이 불참했고, 청와대내 불교 신도 모임인 청불회 회원마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강삼재 총장이나 진흥회 지도부는 내심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진흥회의 독자 노선에 강한 제동을 걸기 위해 연 집회가 바로 환경 보호와 민족문화 보존을 명분으로 내건 조계사 집회였다.

여권 내에서는 불교 신자도 아닌 강총장이 당내 불교계 원로들과 사전에 충분히 협의하지 않고 불교계에 관여했다며 불만을 나타내는 사람이 많다. 불교계의 분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국회 의원회관을 찾은 여권의 한 불교계 인사는 “부처님의 부자도 모르는 강총장이 순전히 정치 논리로 불교계에 개입해 불심을 악화시키고 있다”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이 문제에 일절 함구하고 있는 서석재 의원은 11월18일 진흥회 행사에 불참한 대신 11월22일 조계사의 협의회 행사에는 측근을 비공식으로 대신 내보냈다. 조계종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종단협의회의 정통성을 사실상 인정한 셈이다.“거대한 표밭 잃어선 안된다” 초조한 여권

이처럼 불교계가 분열 위기를 맞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97년 대선을 앞두고 그동안 알게 모르게 진행된 불심 끌어들이기 경쟁이 최근 들어 더욱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불교계에서 흔히 2천만 불자라고 주장하는 불교 인구는, 95년 11월 현재 통계청 발표로 1천3백80만여 명. 남한 전체 인구의 23.3%, 종교 인구의 51.1%를 차지한다. 기독교 인구는 6백10만. 협의회측이 조계사 법회 결의문에서 “2천만 불자가 한뜻으로 정진한다면 이 나라에 해결 못할 일이 없다”라고 공언할 정도다.

이 방대한 불교계는 적어도 현 송월주 체제가 들어서기 직전까지는 여당의 확고부동한 지지 기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여당세가 우세했다. 그러나 94년 4월 조계사 폭력 사태에 이어 현 정권에 우호적인 서의현 체제 몰락, 개혁 성향인 송월주 체제 등장, ‘청와대 훼불 사건’ 등이 잇달아 발생하면서 불심은 YS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다. 특히 지난해 봄 일어난 청와대 훼불 사건은 불심이 여권에 등을 돌리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였다. 초조해진 여권은 빨리 손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혔다. 게다가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불교계 공략에 발벗고 나섰다. 독실한 가톨릭신자면서도 영남 지역 사찰을 돌며 불심 끌어안기에 공을 들이고 있으니 여권으로서는 가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불가에는 부처가 승단의 화합을 위해 내놓았다는 여섯 가지 계율 ‘6화합 사상’이 있다. 공동체 생활 속에서 서로 믿고 존경하면서 하나가 되라는 것이 그 요체다. 그러나 요즘 불교계는 부처의 마지막 유언이나 6화합 사상과는 거리가 먼 정치 바람에 휩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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