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뜨는 진보 정당, 총선 관문 뚫을까
  • 金鍾民 기자 ()
  • 승인 1999.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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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주축 ‘민주노동당’ 창당 박차… 정당명부제 도입에 총선 성패 달려
민주노동당 창당 작업에 힘이 붙고 있다. 예상되었던 일이지만 민주노동당의 조직적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민주노총이 최근 합법성을 얻었다. 게다가 노동단체의 정치 자금 기부를 금지하는 정치자금법 조항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림으로써, 민주노동당의 자금 문제도 해결될 가능성이 열렸다.

민주노동당 간부들에게 더욱 고무적인 것은 최근 여야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 정서가 갈수록 확산되고 있는 점이다. 주로 집권 세력에 대한 반대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지만, 야당인 한나라당에 대한 불신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 민주노동당 사람들의 판단이다.

남은 문제는 선거법이다. 권영길 대표·천영세 사무총장을 비롯한 민주노동당 주요 간부들은 지난 12월11일부터 국회 앞에서 정치 개혁 입법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한 간부는 ‘협상 당사자인 기성 정당에도 선거법 문제가 중요할 테지만 우리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이다’라는 말로 사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1인 2투표제에 의한 정당명부제가 채택되는가 여부는 민주노동당의 안정적 원내 진출을 결정하는 관건이다. 여야가 정당명부제에 대해 의견 접근을 보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민주노동당 사람들은 자신들이 배척하는 여야 기성 정당의 협상 결과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전면 참여론’ ‘역량 집중론’으로 전략 엇갈려

이처럼 여러 가지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면서 민주노동당의 총선 전략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총선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선 모든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 전면 대응함으로써 비례대표 의석을 얻는 데 초점을 맞추자는 ‘전면 참여론’이 있다. 지역구 백여 곳에서 대대적으로 후보를 내 민주노동당 바람을 일으킴으로써 비례대표 3∼5석 정도를 얻어내겠다는 전략이다. 92년 총선에서 51곳에 후보를 낸 민중당이 지역구 별로 평균 6.7% 득표율을 올린 것을 감안할 때 정당명부제가 실시되면 전국 평균 10% 득표율을 올릴 수도 있다고 내다본다. 당 차원에서 최소한 20억원이 넘는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당 채권을 발행하는 아이디어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전면 참여론’의 경우 자격을 갖춘 후보 백여 명을 찾는 문제나 20억 자금을 조성하는 문제 모두 쉽지 않으리라는 점 때문에 쉽사리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다.

다른 안으로는, 전략 지역이나 당선 가능한 지역에 후보를 내자는 ‘역량 집중론’이 있다. 자금이나 인물이 역부족인 현실에서 판을 너무 크게 벌이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다고 판단하고 중요한 지역 30여 곳에 후보를 내 역량을 집중하자는 안이다. 특히 당선 가능성이 높은 4∼5곳에 당력을 집중해 최소한 1석 이상 지역구 당선자를 내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그러나 가뜩이나 민주노동당의 당세가 약해 신뢰감을 못 주는 상황에서 일부 지역에만 후보를 내게 되면 자칫 당 자체가 유권자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소선거구제와 1인 1투표제가 현행대로 유지된다면 민주노동당은 이번 총선에서 의석을 얻지 못해 정당 등록이 취소되고 과거 민중의당이나 민중당처럼 ‘거품 정당’ 운명을 면치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당내에서는 소수 의견이기는 하지만 이번 총선에 참여하지 말자는 극단론도 나온다.

선거법 등 제도적 환경도 중요하지만 민주노동당의 주체적 역량도 중요하다. 우선 조직과 인물이 얼마나 준비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 관심사다. 현재 민주노동당은 천원 이상 당비를 내는 당원이 만여 명이다. 이를 내년 1월 정식 창당 때까지는 1만5천 명으로, 총선 때까지는 3만 명 수준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당원 확대를 포함해 민주노동당의 조직력 수준은 1차적으로 민주노총 조합원이 얼마나 적극 참여하는가에 달려 있다. 민주노총 김영대 정치위원장은 “아직 조직 내부 사정 때문에 활발한 참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참여 정도 역시 지역·연맹 별로 차이가 있다”라고 말했다. 울산과 수도권 지역 노조는 적극적인 반면 호남권은 아무래도 소극적이라는 것이다.

연맹 별로도 비교적 정치 의식이 높은 사무금융노련의 경우 그동안 자체 선거로 인해 민주노동당 활동에 참여하기 어려웠다. 민주노총 최대의 단위 노조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경우에는 사정이 또 다르다. 이부영 전교조 위원장은 “민주노총 방침에 따른다는 방향은 정해 놓고 있지만 교육 공무원 정치 개입을 금지하고 있는 현행법 때문에 민주노동당에 참여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라고 애로 사항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내년 1월 정식 창당을 하고 총선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노동자들의 관심이나 참여 역시 활발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현재 민주노동당에서 내년 총선에 내세울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은 전국 40개 지역추진위원회 대표들과 중앙당 간부들로 20∼30명 수준이다. 우선 중앙당 간부 중에서는 권영길 대표(울산, 일산 혹은 비례대표)를 비롯해 양연수 대표(비례대표 혹은 서울 종로), 천영세 사무총장(비례대표), 최규엽 정책위원장(서울 금천), 이상현 대변인(서울 노원 갑), 박홍순 홍보위원장(서울 구로 갑), 노회찬 정치개혁특별위원장(서울 강서 을), 배범식 노동위원장(성남)이 출마 가능한 인사로 거론된다. 지역에서는 김기수 대구추진위 대표(대구 서구), 송철호 변호사(울산), 박순보 부산추진위 대표(부산 연제) 등 20여 인사가 후보군으로 거명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울산 송철호 변호사는 98년 울산시장 선거에 출마해 14만 8천표를 얻었던 경험이 있고, 부산 연제 박순보씨는 14, 15대 총선에 민중 후보로 출마해 각각 3만 4천표, 2만 6천표를 얻은 적이 있어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로 분류된다.
노조의 정치 자금 기부 길 열려 ‘숨통’

민주노동당에서 자금 문제는 특히 어려운 숙제로 손꼽힌다. 천영세 사무총장은 “현재 만 명인 당원이 매월 만원씩 당비를 내 기본 살림을 꾸려가겠다는 방침이고, 앞으로 당비 내는 당원이 3만명 정도 되면 일상적인 당 살림은 빠듯한 대로 끌고 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총선을 앞둔 정당이 이렇게 유지될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민주노동당은 총선 자금을 후보들에게만 맡기지 않고 중앙당이 책임지고 해결하겠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최근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노동조합이 정치 자금을 기부할 길이 열린 것은 민주노동당에는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이다. 헌재 결정이 내려지자마자 지난 8일 울산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현대차 노조 출신인 시의원과 구의원 4명에게 활동비 7백만원을 노동조합 이름으로 기부했다. 이상현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내년 초에는 전국 단위노조 위원장 2백∼3백 명이 한꺼번에 모여서 노동조합의 정치 자금 기부를 공식 선언하는 계기를 만들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 액수가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푼돈 수준을 넘는 정치 자금이 민주노동당에 유입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정치 자금 기부가 기대만큼 여의치는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민주노동당 중앙위원인 양병민 서울은행 노조위원장은 “조합원들의 정치적 입장이 다 다를 텐데 조합 자금을 정치 자금으로 기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원하는 조합원들로부터 모금하는 방식 정도가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민주노동당이 크게 기대하고 있는 것은 정책에서의 차별성이다. 현재 여당과 야당 모두 서민들을 위한 정책에 소극적이라고 판단하고 서민층에 집중 호소하는 정책을 제시할 계획이다. 97년 대선 때 국민승리 21 권영길 후보의 정책 자문단으로 활약한 대학 교수 등 1백80여명의 전문가 집단이 앞으로 민주노동당의 정책을 생산하는 두뇌 집단 구실을 할 것이므로 정책에 관한 한 현재의 대형 정당에 뒤질 것 없다는 것이 권영길 대표의 얘기다.

대중적 기반 넓히기가 최대 과제

민주노동당의 이번 정치 실험은 과거의 진보 정당 경험과 분명히 차이가 있다. 특히 과거 진보 정당 운동이 대중적 기반 없이 명망가 중심으로 펼쳐진 것과 달리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이라는 대중 조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정치 실험이 성공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그러나 앞으로 민주노동당이 해결해야 할 숙제는 한둘이 아니다. 가장 핵심적인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국민을 상대로 해야 하는 정당으로서 그 폭이 너무 협소하다는 점이다. 태생적인 한계로 볼 수 있는 민주노총 일변도의 활동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문제이다. 대부분의 유권자가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하기를 바라면서도 대중 단체인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민주노동당에 신뢰감을 느끼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은 민주노동당 내부에서도 고민스러운 대목이다. 한국노총 박인상 위원장 역시 “노총도 노동자의 정치 세력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민주노동당이 좀더 폭넓은 국민 정당으로 변화하지 않는 한 협력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당명도 민감한 문제다. 양병민 서울은행 노조위원장은 “조합원이나 주변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당의 취지에는 동의하는데 당명 때문에 지지하기가 어렵다는 사람이 많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민주노동당의 선택을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정대화 교수(상지대·정치외교학)는 “민주노동당이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정당의 마지막 완결형은 아닐 것으로 본다. 이제 시작하는 것이다. 앞으로 발전 과정에서 좀더 폭넓고 대중적인 진보 정당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전망했다.

민주노동당의 실험은 내년 총선에서 그 성패가 드러날 것이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4개월 밖에 안되는 기간에 얼마나 유연하게 대중적 기반을 넓히는가 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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