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자기 최면’에 빠졌나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3.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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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옳다” 확신 지나쳐 무리한 행보…청와대, ‘승자 증후군’에 감염
사실 제가 운이 좋은 대통령이었다면 더 많은 의원을 여당으로 모시고, 첫 번째 국회 국정 연설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국회 본회의장 연단에 선 노무현 대통령이 연설 첫머리에 이 말을 꺼내는 순간 의석에 앉아 있던 한 민주당 의원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고 한다. 대통령은 유머랍시고 얘기했겠지만 그 순간 이미 한나라당 의원들은 눈을 세모꼴로 뜰 것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 의원은 이때부터 연설이 사고 없이, 제발 빨리 끝나기만 기원하며 벽시계를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대통령이 연설 말미 “원고에는 없지만…”이라며 KBS 사장 인선 건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 순간 그의 소망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대통령은 대선 기간 자신의 언론 특보였던 서동구씨를 KBS 사장에 추천하게 된 배경을 10여 분간 장황할 정도로 상세히 설명했다. 덕분에 대통령이 토씨 하나, 표현 하나 정성을 갖고 다듬었다는 본래의 연설문은 이 돌출성 발언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대통령 스스로 ‘취임 후 최악의 날’이라고 명명한 4월2일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대통령이 국정 연설 도중 KBS 사장 인선 건을 언급할 줄은 청와대 연설팀은 물론 측근 비서관들도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 날 아침 <조선일보>의 보도가 대통령의 심기를 흩뜨려 놓았다. 이 날 이 신문은 1면 구석에 “대통령이 방송 맡아달라 했다”라는 서동구씨의 발언을 기사화했다.

일단 보도가 나간 이상 대통령은 이 사건을 정면 돌파하기로 결심한 듯하다. 국회로 향하는 차 안에서 대통령은 KBS 사장 인선과 관련된 연설 내용을 급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전국민에게 중계되는 생방송 도중 이를 쏟아냈다. 그것으로는 모자랐는지 대통령은 국회 연설이 끝나자마자 청와대 기자 간담회를 자청했고, 그 직후 또다시 KBS 노조와 시민단체 대표자들에게 대화하자고 제안했다.

이 날 대통령의 행보는 지난번 ‘검사와의 대화’ 때처럼 찬반 양론을 불러일으켰다. ‘참신하다’는 의견과 ‘대통령답지 못하다’는 의견이 한치 양보 없이 맞섰다. 대선 기간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을 지내며 대통령을 3개월간 밀착 수행했던 한 민주당 의원은 이 날 대통령의 행보를 보며 대선 전야의 악몽을 떠올렸다고 했다. “노대통령은 옆에서 네가 잘못했다, 틀렸다고 할수록 오기가 더 뻗치는 스타일이다. 서동구 건도 주변에서 하도 그러니까 오기가 발동한 것일 게다”라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대선 전야 노대통령의 “너무 앞서가지 말라”는 말에 열 받아 정몽준씨가 지지 철회를 선언했을 때도 그랬다. 애가 바짝 탄 참모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큰 실수를 했다고 닦달해도 대통령은 한동안 정씨 집을 찾지 않고 버텼다.

노대통령이 당시 오기를 부린 배경에는 ‘내가 옳다’는 확신이 있었다. 대통령을 안하면 안했지 원칙 없는 권력 나누어먹기는 절대 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소신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은 자신이 나서 성심성의껏 설명하면 진심이 통할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 배경에는 정당성에 대한 자기 확신이 있었다. 사심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공정하고 유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서씨를 쓰려 했던 것인데, 그 정도는 대통령의 권한으로서 용인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신념이 그의 연설에서는 배어난다.

문제는 ‘정몽준 소동’ 때 통했던 그의 확신이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 날 대통령을 만난 KBS 노조 관계자는 “그간 우리가 대통령을 오해한 부분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노조는 사장 인선에 권력이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밀고 나갔고, 대통령도 자기 뜻을 100% 관철하지는 못했다. 결국 이 날이 최악의 날이 된 데는 청와대와 시민 사회를 잇는 의사 소통 구조가 왜곡되어 있었던 탓이 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통령 스스로도 일종의 ‘승자 증후군’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청와대 사정에 밝은 한 정치인의 지적이다.

아무리 훌륭한 인재라 한들 한때 언론 특보를 지낸 사람을 공영 방송 사장으로 대통령이 직접 ‘추천’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논란의 소지가 있다. 그런데도 동기가 옳으면 모든 것이 선하다고 믿는 이상주의자인 듯이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에 귀를 닫아 버리는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행태를 보며 ‘우리는 옳다. 그래서 승리했다’던 애초의 자긍심이 ‘우리는 승리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일은 옳다’는 자기 최면으로 변질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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