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가방의 행방을 찾아라
  • 장영희 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2.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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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북한 거래 의혹 ‘4억 달러’ 오리무중…금융 당국은 “조사 계획 없다”



한나라당의 이른바 ‘나바론 특공대’가 폭로한 ‘4억 달러 대북 지원 의혹’은 과연 사실일까.
9월25일 엄호성 의원은 2000년 6월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으로부터 4천9백억원(4억 달러)을 대출받아 현대아산에 넘겼고 이 돈이 북한에 건네졌다고 첫 포문을 열었다. ‘김대중 정권 대북 뒷거래 진상조사 특위’를 구성해 조직적 폭로에 나서고 있는 한나라당은 그 후 현대아산에 대출금이 넘어갔다는 주장을 슬그머니 거두어들였다.

하지만 지원 경로에 대해서는 더 구체적인 내용을 폭로했다. 9월29일 특위의 이재오·김문수 의원은 현대상선이 산업은행 본점 영업부와 구로지점에서 각각 1천억원, 여의도 지점에서 2천억원의 수표를 받아 국가정보원에 건넸다고 주장했다. 또한 국정원은 4천억원을 6월15일 남북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 국내외 금융기관에서 쪼개고 합치는 복잡한 세탁 과정을 거쳐 북한의 비밀 계좌에 송금했다는 것이다. 정상회담이 예정보다 하루 늦어진 것도 이 돈이 잘못 송금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청와대나 민주당은 한나라당의 폭로전에는 남북 화해 분위기 조성이라는 김대중 정부의 최대 치적에 흠집을 내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저질 폭로전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대목이 적지 않다. 우선 9월25일 국감에 출석한 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의 증언 내용이다. 엄씨는 대출 회수 시점인 2000년 8월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으로부터 “우리가 쓴 돈이 아니어서 갚을 수 없다”라는 말을 들었으며, 이 사실을 당시 청와대 이기호 경제수석과 국정원 김보현 3차장(대북담당)에게 알리자 두 사람으로부터 “알았다” 혹은 “걱정 말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말했다. 엄씨는 임기 3년인 산은 총재 자리에서 8개월 만에 돌연 경질되었다. 당시 금융계에서는 현대와 대우 지원을 둘러싸고 정부와 마찰을 빚은 것이 결정적인 경질 배경이라는 풍문이 돌았다. 김충식 전 사장도 비슷한 경우다.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현대상선을 계열사 지원에 자꾸 끌어들이려는 것에 반발해 물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정적 증거 없지만 ‘비상식적’


아직 한나라당의 주장을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 자료는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 4천9백억원을 긴급 대출해준 2000년 6월 전후의 금융 거래 내용에 여러 모로 납득하기 힘든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선,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 대출해준 줄을 최근에야 알았다는 당시 김경림 행장(현 이사회 의장)과 이연수 부행장의 주장에 따르면, 산은은 4천9백억원이라는 거액을 지원하면서 주채권 은행인 외환은행과 협의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산은의 현대상선 대출 잔액은 2천6백억원. 산은 자신이 자기자본비율(BIS) 비율을 맞추려고 안간힘을 쓰던 이 시기에 대출 잔액의 두 배 가까운 돈을 한꺼번에 빌려준 것에 대해서도 금융계 사람들은 한마디로 비상식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에 대해 산은은 현대 위기설이 퍼지면서 국내 금융 시장이 붕괴할 우려가 있어 자기네가 나서게 되었다고 해명하고 있다. 국책 은행으로서의 소명 때문이지 정권 차원의 외압은 없었다는 것이다. 산은의 주장대로 당시 현대그룹이 유동성 위기에 몰려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현대상선은 2000년 4∼5월 두달 동안 4천억원이 넘는 자금을 회수당했다.


결정적인 의문은 6월7일 산은이 대출한 4천억원의 향방이다. 지난 9월27일까지만 해도 현대상선은 2000년 6월 말까지 4천억원 가운데 1천억원만 썼다고 주장했다. 마이너스 통장과 같은 성격인 당좌대월금 가운데 1천억원만 긴급 운영 자금으로 쓰고 나머지 한도인 3천억원은 남겨 놓았다는 것이다. 즉 정상 회담 전에 이 돈을 북한으로 보내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9월28일, 당시 당좌 대월을 승인했던 박상배 산은 부총재가 이를 뒤엎는 발언을 했다. 바로 그날(6월7일) 현대상선이 4천억원을 모두 뽑아 쓴 것으로 안다고 밝힌 것이다.


현대상선이 4천억원을 모두 뽑아 썼다는 박부총재의 주장이 맞다면, 현대상선은 2000년 8월14일 금감원에 제출한 상반기 사업 보고서에서 이런 사실을 숨겼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상반기 보고서에는 당좌대월이 1천억원, 일반 대출이 9백억원인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이재오 의원은 현대상선이 6월에 빌렸던 4천9백억원 외에 5월18일에 1천억원을 더 빌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돈이 상반기 보고서에 나오는 ‘당좌대월 1천억원’이라는 것으로, 통째로 빠져 있는 6월에 빌린 돈이 북한에 보내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현대상선과 산은은 5월의 1천억원 대출 자체는 부인하지 않고 있다. 다만 추가 대출은 아니고 4천9백억원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산은의 한 관계자는 “5월에 빌려준 1천억원은 만기가 한 달짜리였다. 한 달 뒤인 6월 말 현대상선이 모두 갚을 능력이 없다며 10%인 100억원만 갚아 9백억원을 산업운영 자금으로 대출 성격을 바꾸어 주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누락 혐의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3개월짜리 4천억원의 당좌대월은 어떻게 회수되었을까. 산은은 현대상선이 2000년 9∼10월에 1천7백억원을 갚았다고 밝혔다. 자기가 쓰지 않은 돈을 갚을 리 없으므로 북한에 가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듯하다. 산은은 2000년 연간 사업보고서에 기재된 당좌대월 1천3백억원에 대해 현대상선이 6월에 빌린 4천억원의 당좌대월 가운데 9월28일 3백억원, 10월28일 1천4백억원 등 1천7백억원을 갚고 남은 2천3백억원 가운데 일반 대출금으로 전환환 1천억원을 뺀 금액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금융 전문가들은 돈에 꼬리표가 없기 때문에 회계 장부만 보아서는 이 돈이 그 돈이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소설인지 오리발인지…


현대는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으며 금강산 관광 사업을 이유로 합법적으로 북한에 돈을 보내던 기업이었다. 또 북한과 일을 하려면 뒷돈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런 정황 때문에 야당의 주장을 소설로만 치부하기는 어렵게 되어 있다.


결국 4천9백억원 대북 지원 의혹을 풀어줄 가장 확실한 방법은 금감원의 계좌 추적밖에는 없다. 하지만 당시 현대상선이 대출을 받았을 때 산은 총재였던 이근영 금감위원장의 입장은 “그럴 계획이 없다”이다. 불공정 거래(주가조작)라는 명확한 증거가 없는 한, 단순히 정치권의 폭로만으로는 계좌 추적권을 발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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