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의 북한 석유 3대 사업 전모
  • 南文熙 기자 ()
  • 승인 1998.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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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부터 은밀히 추진…‘주유소 설치·정유 공장 진출·서한만 유전 개발’ 목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재방북을 계기로 그동안 물밑에 잠복했던 북한의 유전 개발 문제가 관심의 표적으로 떠올랐다. 북한 유전 개발에 대한 국제적 붐을 조성하려는 북한측의 노력은 정명예회장 방북을 출발점으로 본격화할 공산이 매우 크다. 북한 당국이 내년 2∼3월께 그동안 중단되었던 대규모 국제 유전 설명회를 다시 개최할 것이라는 점이 그 하나의 징표이다. 북한측의 유전 설명회 재개 소식은 북한 유전 개발에 정통한 일본 ‘레인보우 통상’의 미야가와 쥰 대표가 정명예회장 귀환 직후 <시사저널>에 알려옴으로써 확인되었다.

중단된 유전 설명회 내년 2~3월 재개

미야가와 씨는 북한 원유공업부 후원으로 일본 석유 개발 회사인 페트릭스 사와 공동으로 지난해 10월7일 일본 도쿄에서 제1차 북한 유전 설명회를 개최했던 인물이다. 그는 북한측이 2차 유전 설명회를 내년 2∼3월에 개최한다는 소식은 최근 방북 초청을 받은 페트릭스 사의 하세가와 대표가 평양측 파트너와의 교신 과정에서 확인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한 2차 설명회 개최를 협의하기 위해 하세가와 씨의 방북과 별도로 북한측 실무자가 오는 12월에 니가타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명예회장 방북에 이어 북한 유전에 대한 국제 설명회가 열리게 될 경우 그동안 잠복했던 북한 유전 개발 사업이 또다시 국제적인 현안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실 지난해 1차 설명회를 열 때까지만 해도 북한측은 설명회를 연속 개최해 북한 유전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고조시키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2차 설명회를 지난해 12월3일 도쿄에서 열고, 3차는 올 3월 호주에서, 4차는 9월에 싱가포르에서 개최한 후 마지막으로 평양에서 대규모 국제 세미나를 개최한다는 복안이었다. 북한은 이같은 연속적인 유전 설명회를 통해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뒤 김정일 총비서의 권력 승계 직전에 평양에서 또다시 대규모로 개최함으로써 유전 개발을 김정일 시대의 핵심 사업으로 추진하겠다는 것을 내외에 공표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측의 이같은 계획은 지난해 말과 올해 초 북한 내부에 불어닥친 사상 검열 등으로 해외 행사가 위축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번 정명예회장 방북을 계기로 북한 유전 문제가 불거져 나온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즉 북한 입장에서는 설명회 무산으로 식어 버린 북한 유전에 대한 관심의 불꽃을 재점화하기 위해 정명예회장 방북을 극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의도가 어디에 있건 이번에 북한과 현대가 합의한 유전 개발 방식은 그동안 유전 개발에 대해 북한이 보여 왔던 태도에 비추어볼 때 대단히 진일보한 것이라는 점을 높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평양이 기름더미 위에 올라 있다. 기름을 들여오기 위해 파이프 라인 가설 작업을 곧 시작하기로 합의했다”라는 정명예회장 발언은 사실 일정 부분 과장된 것이다. 오히려 정몽헌 회장이 기자 회견에서 밝힌 내용이 더 현실성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김용순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이 (현대측에) 기회가 있다면 탐사와 개발에 참여해 줄 것을 제안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석유가 생산되면 남측에 먼저 공급하겠다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북한의 입장이 진일보했다는 점은 바로 북한측이 유전 탐사 및 개발 과정에 한국의 대기업인 현대측이 참여해 줄 것을 공식 제안했다는 점이다. 지난해 10월의 유전 설명회 개최 전까지만 해도 북한은 한국 대기업이 유전 개발에 참여하는 것을 꺼려 왔다. 물론 그 이전에도 간접적으로는 국내 기업에 여러 가지 제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주요 대상은 유럽이나 일본·미국 기업 쪽이었다.

그러던 중 1차 유전 설명회에 한국 기업의 참여가 허용되면서 약간의 입장 변화가 관찰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 기업의 참여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형의 국제 컨소시엄의 한 부분으로만 제한되었고 그것도 참여 기업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사실 지난해 12월로 계획되었던 2차 설명회의 논의 역시 한국 기업의 참여 방식에 초점이 맞추어질 예정이었다. 이처럼 완만하게 진행되던 한국 기업 참여 문제가 이번 정명예회장의 방북으로 일거에 급진전된 것이다.

북한이 현대그룹에 유전 개발 참여를 전격 허용한 데에는 나름의 속사정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즉 한국의 대기업인 현대를 사업 파트너로 끌어들임으로써 사업 참여를 주저하고 있는 유럽·일본·미국의 석유회사들을 자극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이 정명예회장 방북에 이어 내년 초 유전 설명회를 재개하는 것도 이같은 포석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극적인 효과를 노리기는 현대측도 마찬가지였다. 북한 유전 개발 사업은 사실 지난 6월부터 시작된 현대와 북한 간의 금강산 프로젝트 및 경협 협의 과정에서 전혀 노출된 바 없다. 그러나 그동안 현대측의 석유 관련 대북 프로젝트 추진 과정과 연계시켜 보면, 현대측이 일부러 이같은 빅카드 발표를 유보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을 갖게 한다. 즉 정명예회장의 재방북용 카드로 치밀하게 준비해 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북한 유전 개발에 대한 현대측의 관심이 즉흥적으로 돌출한 것이 아니라, 상당 기간 준비된 것이라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박부섭 박사가 중간 다리 역할

현대측이 북한 유전에 관심을 갖고 비공식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96년 중반부터였다.그때부터 따지면 이미 2년여의 탐색 기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룹 내에서는 현대정유가 중심이 되어 실무 작업을 추진해 왔다. 관계 소식통들에 따르면 현대정유가 중심이 된 석유 관련 대북 프로젝트는 크게 세 부분으로 추진되어 왔다. 첫 번째 사업은 북한내 주요 도시에 주유소를 설치하는 것이다. 지난해까지 현대측이 주유소 설치 후보 도시로 주목해 온 곳은 나진 선봉 신포 원산 개성 평양 등으로, 사실상 북한내 주요 도시를 망라한다.

이 중 특히 나진·선봉 주유소 설치 계획은 지난해 통일부에 사업 승인을 신청하는 단계까지 진행되었으나, 유사시 북한이 주유소 기름을 전쟁 물자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정부측 우려 때문에 좌절되었다.

주유소 설치 계획이 다시 부활하게 된 것은 금강산 관광 사업이 구체화하면서부터이다. 관광 버스가 50대 이상 필요하다는 현대측 주장에 대해 정부로서도 더이상 반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금강산 입구 온정리를 시작으로 한 주유소 설치 사업은 나진·선봉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평양을 목표로 한 큰 구상의 ‘첫단추’인 셈이다.

주유소 문제가 중요한 것은 이것이 바로 현대의 유전 개발 사업에서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북한이 유전 개발에서 암묵적으로 현대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주유소 설치에서 파생할 여러 가지 이익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부터라는 것이다.

석유 관련 두 번째 대북 프로젝트는 정유 공장 진출이다. 현대측은 그동안 정유 공장을 새로 지어서 진출하는 방안과 기존 공장을 활용하는 방안을 다각도로 검토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이유는 북한의 대표적인 정유 공장이라 할 선봉 지역의 승리화학공장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 것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국내외 기업 사이에서는 몇년 전부터 가동 중단 상태인 승리화학공장의 기존 시설을 수리해 활용해도 문제가 없다는 평가와 아예 새로 짓는 편이 낫다는 주장이 엇갈렸다. 그러나 최근 현대측이 승리화학공장을 재가동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는 소식이 있다. 이 경우 이 공장의 재가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스탠턴 그룹이나 국내의 LG그룹 등과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정리될지가 관심사이다.

세 번째 프로젝트가 바로 북한 서한만 지역의 유전 개발 사업으로, 현대의 대북 석유 프로젝트의 종착점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유전 개발을 둘러싸고 현대와 북한측을 연결해 온 제3의 인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바로 대북 경협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박경윤씨(현 금강산국제그룹 공동의장)의 남동생 박부섭 박사이다.

미국에서 핵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박부섭씨는 최근 몇년 동안 베이징에서 박경윤씨의 사업을 보좌해 온 것으로 알려졌는데, 특기할 것은 그가 유전 개발에 필수적인 탄성파 탐사와 관련한 독특한 기술을 개발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런 기술을 바탕으로 북한 원유공업부 산하 동성기술무역회사와 원유 개발에 대한 독점 계약서를 체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박부섭씨와 현대측의 접촉이 시작된 것이 바로 96년 중반부터이고, 이를 계기로 현대측이 북한 유전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현대정유측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박부섭 박사가 원유 매장 유망지로 제시한 곳은 북한 서한만의 초도라는 작은 섬 인근 해저이다. 남포와도 가까운 이곳의 해저에 막대한 원유가 매장되어 있고, 자신이 개발한 탄성파 탐사 기술을 동원하면 기존 공법의 10분의 1 정도의 노력으로 쉽게 파악이 가능하다는 것이 박부섭 박사의 주장이다.
서한만 초도 부근이 석유 개발 유력지

현대정유측은 그의 이같은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지난해 8월 정몽혁 회장을 중심으로 방북단을 구성해 당시 통일원에 방북 신청한 사실도 있다. 북한 아태평화위원회측과도 사전 조율이 되었던 현대정유 회장단의 방북은 그러나 현대그룹 내부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당시의 반대 논리는 정주영 명예회장의 방북 이전에 현대정유 회장단의 방북이 먼저 이루어지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는 다시 말하면 대북 프로젝트 중 가장 큰 카드라 할 수 있는 유전 개발 사업을 정주영 명예회장의 북한 방문 카드로 아껴놓자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유전 개발은 정명예회장의 방북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비장의 카드였던 셈이다.

정명예회장이 지난 10월27일 방북 기자 회견에서 느닷없이 북한 유전 개발 문제를 꺼낼 때까지도 실무를 담당해 온 현대정유측은 전혀 감을 못잡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전 개발 사업에서도 드러났듯이 이번 정명예회장의 2차 방북은 극적인 효과를 겨냥해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었다. 정명예회장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면담이 대표적 사례이다. 정보 소식통들에 따르면, 정명예회장과 김정일 위원장 간의 면담은 방북 전에 이미 면담 일정 및 방식까지도 대략적인 합의가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정명예회장이 예정 귀환 일을 하루 늦추면서 김위원장을 만나는 형식까지도 사전 조율된 것이라는 지적이다.

김정일 면담 성사에는 현대측뿐 아니라 정부 고위 당국의 강력한 주문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방북 1주일 전쯤 정부 고위 당국자가 현대측과 접촉하면서 이번 방북에서 김정일 면담을 반드시 성사시킬 것을 주문했고, 현대측은 북한측과의 베이징 접촉에서 이같은 입장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귀환 일자를 하루 늦추는 형식의 면담안을 제시한 것은 북한측 파트너인 아태평화위측이었다고 한다.

북한측 역시 면담의 극적인 효과를 높임으로써 북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미국과 일본의 여론 주도층에 대한 시위 효과를 계산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또한 정명예회장과 김정일 간의 면담에 정부 고위 당국이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고, 또 정명예회장이 귀환 즉시 김대통령과 면담을 가진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남북 수뇌 간의 간접적인 메시지 교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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