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교포사회 "한국인인 게 부끄럽다"
  • 로스앤젤레스·이석렬 (자유 기고가) ()
  • 승인 1995.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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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교포들 ‘노씨 파문’에 창피·분노·허탈… “검찰 못믿겠다” 84%
미주 한인 교포 1백60여만 명 중 3분의 1이 넘게 사는 로스앤젤레스에는 요즘 개탄과 분노, 창피해서 못살겠다는 소리가 뒤범벅된 가운데, 교포들은 노태우씨의 비리를 한국 검찰이 속시원히 파헤칠 수 있을지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어떤 주부는 <라디오 코리아>(현지 한국어 방송국)에 보낸 편지에서 ‘심슨 재판 때는 돈이면 무죄가 된다고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지만 노태우 사건은 나를 울렸습니다. 내가 눈물을 흘린 것은, 너희는 자랑스런 코리언이라고 어린 자식들에게 말해온 내 가르침이 거짓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믿었던 DJ도 별 수 없다”

노씨가 검찰에 출두한 날 이곳 <중앙일보>가 동포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노씨를 구속해야 한다는 응답자가 71.5%로 본국(63%)보다 더 강경한 것만 보더라도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응답자의 85.5%가 김영삼 대통령도 대선 자금을 공개 해명해야 한다고 한 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또 응답자 중 84%가 검찰이 아마도 진상을 밝혀내지 못할 것이라고 비관적인 견해를 보인 것은, 본국 정부나 정치인에 대한 재미 동포들의 평가나 기대가 낮다는 것을 반영한다. 법치주의가 생활화한 미국에서 법을 어기면 현직 대통령도 물러나야 한다는 닉슨 교훈을 보고 살아온 동포들은 이에 못미치는 고국 실정에 실망하고 있는 것 같다.

미국에 25년째 살고 있는 법정 통역사 홍흥수씨는 “결백한 사람이 있어야 심판을 하지, 다 그렇고 그런 처지에서 무엇을 어쩌자는 것인가”라고 지극히 냉소적이다.

동포들을 실망시키기는 김대중씨도 마찬가지다. 미국 거주 24년째인 조재길씨(인쇄소 경영)는“노태우야 원래 그런 사람이지만, 김씨는 그 돈이 어디서 나왔는데 넙죽 받아 먹었는가”라고 분통을 터뜨리는가 하면, <라디오 코리아> 앵커인 최영호씨는 “DJ에 실망했다는 소리로 전화통이 불이 날 지경이다”라고 전했다. 또 유치원 보모인 송현숙씨는 “믿었던 그 사람도 별 수 없구나 싶으니 모든 희망이 싹 가셨다”고 허탈해 했다.

그런데 노씨가 이곳에 부동산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없는 것은, 전두환씨가 동생 경환씨를 시켜 굵직굵직한 부동산을 사두어 큰 화제가 된 것과 대조를 이룬다. 다만 2년 전 노소영씨 부부가 20만달러 밀반입 혐의로 미국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실로 미루어, 노씨가 외국 은행에 돈을 숨겨 두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사람이 많다.

당시 노소영씨 부부의 달러 밀반입 사건을 담당했고 현재는 새크라멘토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존 멘데즈씨는 그 돈의 출처가 스위스 은행이었냐는 질문에 대해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일부 한국 언론이 자기가 스위스 은행이 출처라고 밝혔다고 보도한 데 대해서도 “스위스 은행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발뺌했다. 이같은 태도는, 앞서 그가 한국의 한 언론과 가진 전화 회견에서 노씨 부부의 돈의 출처가 스위스 은행임을 시인한 것에서 한 걸음 물러난 것이다.

멘데즈 변호사가 몸을 사리는 것은, 이 문제가 한국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데다 일부 야당 의원들이 그와의 면담을 신청해놓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발언이 자칫 수습할 수 없는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을 우려하기 때문으로 관측된다.

가뜩이나 부정한 사람들이 숨어 사는 곳이라는 인식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온 한인 교포들은 노태우씨 비리로 또 한번 자괴감에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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