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인질극 해결사 시프라이니 대주교
  • 崔寧宰 기자 ()
  • 승인 1997.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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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모리 대통령과 담판, 협상안 이끌어내… 수감 게릴라 석방 여부가 열쇠
‘후지모리 대통령도 게릴라 지도자 세르파도 그의 말이라면 신뢰하고 따랐다’. 사건 발생 백일이 넘는 페루 주재 일본대사관 점거 사태가 성공적으로 수습된다면, 아마도 1등 공신은 사태 초기부터 부지런히 중재 역할을 도맡아온 후안 루이스 시프리아니 대주교일 것이다.

지난 3월24일 밤 시프리아니 대주교는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을 2시간 가량 극비리에 만났다. 그 자리에는 페드로 디아즈 페루 주재 쿠바대사도 함께했다. 그동안 끈질기게 나돌던 대사관 점거 게릴라들의 쿠바 망명설이 현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25일 아침 페루의 주요 신문들은 일제히‘인질 사태가 타결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후지모리 대통령은 3월30일 한 텔레비전과의 회견에서 교도소에 수감된 반군을 한 명도 석방하지 않겠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이같은 언론 보도를 일단 부인했다.

후지모리 정부는 투팍 아마루 혁명운동(MRTA) 게릴라들에 대해 처음부터 냉담했다. 테러리스트와 타협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게릴라측도 최악의 경우 인질범들을 하나씩 살해할 수도 있다는 위협을 대사관 밖으로 끊임없이 내보냈다. 바로 이 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사람이 시프리아니 대주교였다.

그가 맨 처음 모습을 나타낸 때는 사건 발생 8일째 되던 96년 12월25일, 크리스마스였다. 이른 아침 대사관저로 걸어 들어간 그는 저녁 무렵 탈진한 동양인 인질 1명을 데리고 나왔다. 그 뒤에도 그는 쉴새없는 중재를 통해 5백여 명에 이르던 인질들이 차례로 석방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후지모리 대통령과 심야 대좌를 하던 날, 대사관저에는 인질이 모두 72명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인질범 쿠바 망명 등 유도

인질 사태가 장기화로 치닫던 1월15일 시프리아니 대주교는 자신의 평상적인 집무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중재 역할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사태 중재를 위해 후지모리 정부가 구성한 평화위원회에 가입한 것이다. 그가 평화위원회에 들어간 것은 반군들의 요구 사항이기도 했다.

평화위원회 활동 초기에 그는 정부와 게릴라 사이의 협상을 지켜보고 감시하는 입회인이었다. 그러나 정부와 게릴라측의 협상이 쉽게 결렬되고 진전될 기미가 없자 본격적으로 중재자를 자처했다.

그러나 게릴라들이 제3국 망명을 요구하고 정부측이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협상이 교착 상태로 빠져들자 그도 한때 중재를 포기하고 대주교 업무로 복귀하려고 한 때가 있었다. 후지모리 대통령과 심야 대좌를 3일 앞둔 3월21일 그는 “내 역할은 한계에 도달했다”라고 사실상 중재를 그만둘 것임을 강력히 시사했다. 그를 이런 처지로 내몬 결정적인 이유는 게릴라들의 쿠바 망명 시도에 대해 페루 정부나 쿠바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3월12일 이후 페루 정부와 게릴라 대표 간의 얼굴을 맞댄 직접 협상이 끊기자 그의 중재 노력도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당시 정부측과 게릴라측 간의 최대 협상 쟁점은 망명 문제와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게릴라 석방 문제였다. 후지모리 대통령은 사태 초기의 입장대로 게릴라를 단 1명도 석방할 수 없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가 3월24일 후지모리 대통령과 담판을 벌여 이끌어낸 최종 협상안은 다음 세 가지. △페루 정부는 수감되어 있는 MTRA 소속 게릴라 17명을 석방한다 △인질극을 주도한 반군들의 쿠바 망명을 허용한다 △페루 정부는 일본 정부·직원이 인질로 잡혀 있는 일본 기업과 공동 부담해 게릴라들에게 수백만 달러를 지불한다.

인구의 90%가 카톨릭 신자인 페루에서 시프리아니 대주교는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다. 국민들은 처음부터 중립적인 중재자로서 그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반군 석방에 반대하는 후지모리 대통령의 기존 입장이 변하지 않는 한 시프리아니 대주교의 그간 노력은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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