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쿼터제 폐지 반대, 문화계로 확산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1998.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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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학자·음악인 등 가세, 해외에서도 지지 성명… “문화 주권 사수해야”
스크린 쿼터제에 대한 논란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영화계의 테두리를 넘어서 문화계 전반의 연대 움직임으로 확대되는 가운데 국민회의가 스크린 쿼터 유지 방침을 공식 발표했다. 이는 스크린 쿼터 유지가 단순히 영화인들의 밥그릇 지키기가 아니라 문화 주권을 지키는 문제라는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취해진 조처로 풀이된다.

이같은 현상을 가장 잘 보여준 사례가 12월11일‘한국 영화를 지키기 위한 문화인 연대 98’ 공연이다. 서울 동숭동 동숭홀에서 열린 이 행사에는 내로라 하는 문화인들이 대거 참석해 스크린 쿼터제가 현행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시인 황지우·최영미, 소설가 신경숙 씨 등이 시와 산문을 낭독했으며 연극인 윤석화·유인촌·김지숙 씨 등은 비나리 공연을 준비했다. 유홍준·이애주 교수, 가수 자우림·정태춘 씨 등도 무대에 올랐고 소설가 박완서, 작곡가 황병기 씨 등 행사장에 참석하지 못한 문화인 40여 명은 영상 메시지를 보냈다. 90년대 들어 문화계가 이처럼 한목소리를 낸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시인 황지우씨는 90년대 한국 문화계에서 활발한 생산력을 보인 분야는 영화뿐이라면서 세계에서 자국 영화 점유율이 높아지고 있는 유일한 나라임을 강조해 박수를 받았다. 그는 다양한 문화가 살아 남아야 세계 문화도 풍성해진다는 내용의 ‘문화 생태계’ 개념을 선보이기도 했다.

통상 전문가와 문화 관련 학자들의 공개 토론도 활발하다. 11일 오후 대학로 흥사단 강당에서는 경희대 도정일·영상원 심광현·서강대 원용진 교수, 연세대 국제대학원 김준기 씨 등이 참여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해외 문화계도 한국을 지지하고 나섰다. 영국 문화원과 브뤼셀영화제 조직워원회 등이 지지 의사를 밝힌 데 이어 12월7일에는 장 뤽 고다르·장 자크 아노·뤽 베송 등 프랑스 영화인 1백70명이 지지 성명을 보내 왔다.

이처럼 해외 영화계가 한국의 스크린 쿼터 공방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자칫 한·미 쌍무 투자 협정의 결과가 문화적 예외를 인정해 온 국제 관례를 깨뜨리는 신호탄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프랑스 영화인들이 이번 지지 성명에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에서 인정된 문화적 예외 조항을 재조정하려는 미국의 압력에 우려를 표한다’고 밝힌 것은 그런 맥락이다.

“정부 태도 이해할 수 없다”

여당이 스크린 쿼터 유지를 약속하는 당론을 확정지음으로써 일단 고비는 넘긴 셈이지만, 낙관하기는 이르다. 한국측이 쌍무 투자 협정을 제안한 마당이어서 미국측이 스크린 쿼터 제도 폐지를 계속 요구할 경우, 쌍무 투자 협정을 조속히 타결하기 위해서는 양보가 불가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차 실무 회담에서 한국 협상단이 이미 다양한 축소안을 제시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외교통상부의 협상 실무자에 따르면, 한국측 협상단은 언론에 보도된 ‘92일 축소안’뿐 아니라, 의무 상영 일수와 유예 기간을 조합한 다양한 축소안을 제시해 놓은 상태다.

스크린 쿼터 논란을 지켜보면서 당국의 태도를 문제 삼는 이들이 많다. 한 나라의 문화 주권이 달린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함구로 일관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화관광부와 통상교섭본부측은 협상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세부 내용을 밝히지 않고 있다.

비밀주의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책 담당자들의 빈약한 문화관이다. 통상교섭본부 실무 담당자는 ‘쿼터제를 통한 산업 보호는 무역 마찰을 일으키는 후진적인 보호 방안이다. 한국 영화도 경쟁을 해야 한다’는 논리만 되풀이하고 있다.

이에 대해 도정일 교수는 “외국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시청각 분야에 대한 예외 규정을 고수하려고 애를 쓴다. 한국 정부가 수세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것은 경제 논리가 빈약해서라기보다는 문화에 대한 마인드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꼬집었다.

당초 12월 중순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4차 실무 회담의 일정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협상이 내년으로 미루어질 가능성도 크다. 협상이 어떻게 마무리되든, 이번 스크린 쿼터 논란은 ‘문화 마인드’를 점검할 기회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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