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넘은 경계인' 송두율의 비애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3.10.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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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교수, ‘면책’ 힘들 듯…“추방도 내 사유에 도움될 것…한국 언론에 분노”
“유태인으로서 프랑스에 정치 망명을 한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는 1843년 13년 만에 조국을 찾았다. 하지만 그는 추방당했다. 그 고뇌를 파리로 돌아가 <독일, 겨울 동화>라는 유명한 시집으로 남겼다. 37년 만에 찾은 조국에서 내가 추방당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만큼 두렵다. 그러나 하이네가 그랬던 것처럼 추방마저도 내 사유에 도움이 될 것이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송두율 교수(59)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때로는 격렬했다. 학자적 자존심마저 짓밟는 한국 언론의 보도 태도에 대해서는 분노한다고도 했다. 10월4일 송교수는 아들 준(28)과 린(27)을 인천공항에서 배웅하고 <시사저널>과 전화 통화를 했다.

‘송두율 파문’이 커지고 있다. 본인 표현대로 ‘양심적인 학자’에서 ‘거물 간첩’으로 추락하고 있다. 파문은 커지고 있지만, 정작 공안 당국과 송교수의 입장은 핵심 쟁점에서 엇갈린다.
송교수가 귀국하기 전까지 국정원의 수사 초점은 오길남 사건을 비롯한 유학생 입북 권유 여부와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 진위 여부였다. 입국 당시 송교수측은 결백을 자신했다. 하지만 9월29일 송교수는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1973년에 방북하고, 로동당에 입당한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그의 지인들조차 당혹해 할 만큼 치명타였다. 김형태 변호사는 “국정원 조사 첫날 당신 스스로 1973년 방북한 사실을 술술 불었다”라고 했다. 나중에야 핵펀치급 발언임을 알았다는 김변호사는 “학자라서 그런지 로동당 가입이 던질 충격파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송교수는 거짓말, 말 바꾸기 논란에 휩싸였다. 송교수가 부인하면 부인할수록 거짓말을 한다는 악순환이 계속된 것이다. 송교수로서는 첫 단추를 잘못 꿴 셈이다.

국정원도 1973년 방북·로동당 가입과 관련해 증언 외에 별도의 파일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992년 귀순한 오길남씨(61)가 “로동당 간부로부터 들었는데, 송두율이 1970년대 초반부터 북한을 오고갔다”라고 안기부 조사 때 밝힌 첩보 수준이었다. 국정원은 이를 확인차 물었고, 송교수는 대수롭지 않게 방북 사실을 진술했다. 순간 국정원 관계자들은 무릎을 쳤다. 로동당 입당 사실은 수사의 핵심인 김철수 진위 여부 확인에 종지부를 찍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려면 적어도 로동당에 입당한 사실이 확인되어야 하는데, 스스로 이를 인정한 것이다.

지난 10월2일 기자회견에서 송교수는 “1970년대 북한은 알바니아·쿠바와 함께 사회주의 대안 모델로 여겨졌다. 학문적 탐구를 위해 방북했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때를 놓친 변명이었다.

송교수는 방북 시인과 함께 국정원 조사에서 자금 수수도 털어놓았다. 국정원은 이를 공작금이라고 못박았다. 송교수는 1992년부터 3년간 해마다 2만∼3만 달러를 북한에서 받아 한국학술연구원을 되살리는 경비로 사용했다고 밝혔다. 1973년부터 방북 과정에서 항공비를 지원받았을 뿐 공작금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상 금품 수수(5조2항)는 목적과 무관하게 그 자체가 처벌 대상이라는 대법원 판례(1985년 12월10일)가 있다. 송교수에게 불리한 대목이다.

유학생 방북 권유 혐의에 대해서는 송교수측이 오히려 공세적이다. 송교수는 “국정원 조사 당시 오길남씨와 대질했다. 녹음되어 있으니 확인해보면 안다”라고 반박했다. 오길남씨에게 입북을 권유하고 북한 인사를 주선한 주인공은 독일 교포 김 아무개씨(63)라고 송교수측은 주장한다. 1965년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 간 김씨는 송교수와 함께 민주사회건설협의회 회원이었다. 송교수측은 김씨의 증언이나 진술서 제출도 고려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오길남씨는 “김씨는 송교수의 하수인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수사의 핵심인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 논란은 송교수에게 아킬레스건이다. 이 문제에 대해 송교수는 황장엽씨와 재판으로 다툴 만큼 결백을 주장해 왔다. 하지만 그는 국정원 조사에서 1994년 김일성 주석 조문 때 김철수로 초청받은 사실을 인정했다. 한 발짝 물러섰지만, 일관되게 정치국 후보위원 23위라고 통보받은 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송교수는 1991년 김일성 주석 면담 이후 예우가 달라져 짐작만 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가 정치국 후보위원임을 알면서도 방북했다면 국가보안법상 사형·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중형에 처해질 수 있다(3조2항).

현재 검찰은 송교수에 대한 기소를 자신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담이 없지도 않다. 개폐가 거론되는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한다는 점과 송교수가 자발적으로 들어와 조사에 응한 점, 독일과의 외교 관계 등을 고려할 때 국제적으로 논란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찰은 준법서약서 이상의 전향서를 받으려 한다.

그렇다면 송교수는 왜 국정원 조사를 각오하고 귀국했을까? 송교수는 기자와 통화에서 개인적인 이유를 들었다. “국가기관이나 다름없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초청했고, 미국에 있는 아들도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온 가족이 방문할 기회였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은 특별한 의미는 없다는 것이다. 지인들은 송교수가 국내에서 활동하기를 갈망했고, 후학을 양성할 국내 대학도 알아볼 계획이었다고 한다. 또 향수병도 귀국의 결정적인 동기였다고 지인들은 추정한다.

송교수와 같은 처지였던 윤이상씨는, 고향 통영을 방문하는 것이 좌절되자 일본에서 배를 타고 통영 앞바다가 보이는 곳까지 가서 눈물을 흘리며 향수병을 달랜 일화가 있다. 그만큼 향수병은 치유 불가능한 중병인 셈이다. 윤이상씨와 절친했던 송교수도 입국 기자회견에서 “고향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참지 못할 만큼 울컥 솟았다”라고 밝혔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서 문화 중재자를 자임한 하이네는 ‘유배지 생활을 해본 사람만이 조국애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회고록에 남겼다. 남과 북 사이에서 화해자와 경계인을 자처하다가 결국 남한의 실정법 덫에 걸린 송교수는 지금 하이네를 떠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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