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보며 환호하는 ‘필살기 리그’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4.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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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마니아들의 전유물이었던 이종격투기의 인기가 폭발적이다. 여성 관객이 40%를 차지하는가 하면, 인터넷 카페 관련 사이트도 7백개가 넘을 정도다.
“싸워야 진정한 나를 알 수 있다.” 영화 <파이트 클럽(Fight club)>에서 더든(브래드 피트)은 이렇게 말하며 잭(에드워즈 노튼)에게 싸움을 건다. 잭은 싸움에서 묘한 매력을 발견하고 점점 빠져든다. 둘은 숭고한 싸움으로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정화할 수 있다는 신념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들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난다. 결국 이들은 매주 토요일 술집 지하에서 맨주먹으로 격투를 벌이는 비밀 조직 ‘파이트 클럽’을 결성한다. ‘파이트 클럽’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영화를 본 기자는 혼란스러웠다. 곧바로 영화의 원작인 척 팔라닉의 동명 소설 <파이트 클럽>을 읽었다. 하지만 ‘미친 세상’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실제로 매일 경기가 열리는 파이트 클럽이 생긴 곳은 서울이 유일하다고 한다. 그리고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피가 튀는 장면을 보면서 밥을 먹는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연예인 출신 사장이 홍보를 했으려니’ 하고 여겼다. 지난 12월23일 서울 삼성동에 위치한 ‘김미 파이브’를 찾았다. 기자의 예상은 빗나갔다. 밤 8시, 아직 술자리를 시작하기는 좀 이른 시간이었지만 9백여 명이 1천1백평 규모의 클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예약을 하지 않은 사람은 입장하지 못할 만큼 붐볐다. 링이 잘 보이는 로열석은 서너 달 전에 이미 예약이 끝난다고 한다.

스테이크 먹으며 피 튀기는 결투 관전

밤 9시, 이종격투기 경기가 시작되었다. 관중들은 즉시 그 숨막히는 경기에 빠져들었다. 권투나 레슬링 경기장과 비교할 수 없는 열기였다. 손님들은 인기 가수의 콘서트에 온 듯한 일체감을 보였다. 한 선수가 고꾸라지고 다른 선수는 얼굴에서 피가 튀었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링과 불과 2~3m 거리에 있는 좌석에 앉은 사람들은 스테이크를 썰고 스파게티를 먹었다. 폭력성과 잔인함에 대한 비난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지막 세 번째 경기가 끝나는 밤 11시까지 자리를 비우는 손님은 거의 없었다. 손님들은 계속해서 몰려들었고 사나이들의 처절한 결투에 환호했다. 또 한가지 놀라운 것은 주요 고객이 20~30대 젊은이들보다 중년층이 많다는 것이었다.

2004년 3월 이 파이트 클럽이 문을 열었을 때 성공을 장담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파이트 클럽은 장소 임대 보증금 50억원 등 초기 투자 비용으로 1백20억원이 들었다고 한다. 한 달 보증금만도 9천5백만원. 90명이 넘는 직원들을 거느리고 선수들에게 상금 1억원을 지급하려면 한 달에 최소 5억원 이상을 벌어야 한다. 사장 이상민씨의 부인 이혜영씨도 말렸다고 한다. 이사장은 “인간의 한계를 아주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는 게 이종격투기의 매력이다. 대중을 압도할 만한 이종격투기의 장악력과 한국민의 정서가 맞아떨어질 것이라고 확신했다”라고 말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은 또 있다. 여성 고객이 40%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많다는 사실이다. 경기에 집중하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나와 선 채로 경기를 구경하는 사람도,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도 대부분 여성이었다. 여고 동창 7명과 생일파티를 하러 왔다는 회사원 김선영씨(26)는 “속상할 때 여기 와서 이종격투기를 보며 소리를 지르면 속이 다 후련하다. 1주일에 한두 번은 친구들과 온다”라고 말했다. 공무원 이은미씨(37)는 “한번 와서 경기를 보고 사나이들의 인간미에 흠뻑 빠졌다. 가장 거칠고 자연적인 것이 이종격투기의 매력이다”라고 말했다.

이사장은 “한국 여성들이 이렇게까지 격투기를 좋아할 줄은 몰랐다. 이 정도 열기와 성장세라면 세계 최고의 이종격투기 시장이 한국으로 옮겨올 날도 멀지 않다”라고 말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일상적으로 접할 수 없던 싸움이라는 격한 상황이 라이브로 펼쳐진다는 점이 젊은 여성들에게는 강한 호기심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스포츠계의 신데렐라로 떠올라

일부 마니아들의 전유물이었던 이종격투기가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계의 신데렐라로 각광받고 있다. 프로 야구나 프로 농구를 좋아하듯 이종격투기를 좋아한다. 유행에 민감한 광고계는 일찌감치 이종격투기에 점령당했다. 여자와 남자가 겨루기를 하는 휴대전화 광고와 경기장 함성을 그대로 전하는 모니터 광고가 매일 전파를 타고 있다. 한국 이종격투기의 간판 격인 데니스 강은 직접 광고 모델로 나서기도 했다.

영화와 드라마 할 것 없이 이종격투기 기합 소리가 넘쳐났다. SBS 드라마 <폭풍 속으로>의 주인공 김민준은 이종격투기 선수로 등장했다. 지난 12월 초 개봉한 <주먹이 운다>는 재소자 출신 종합격투기 선수 서 철을 모델로 삼았다. 대전·광주 등 지방 도시에서는 이종격투기가 나이트클럽 무대에까지 진출했다.

인터넷과 케이블 방송을 통해 이종격투기를 접한 마니아들이 직접 배우겠다고 나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학생 최양욱씨(22)는 보디빌딩을 하다 1년 전 이종격투기 도장을 찾았다. 김씨는 “혼자 노력하며 강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이종격투기의 매력이다. 시합에 나가 한계에 도전해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가구회사에 다니는 연석우씨(27)는 “영업 일을 하다 현장 사람들과 부딪치는 일이 많은데 마찰이 생기면 나를 보호하기 위해 이종격투기를 배우고 있다”라고 말했다. 레슬링 전문 체육관 ‘최무배짐’을 운영하고 있는 최무배 관장은 “운동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늘고 있어 도장을 늘릴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이종격투기를 가르치는 대학이 생길 정도로 이종격투기에 대한 열기는 폭발적 증가 추세다.

포털 사이트 다음 카페에는 이종격투기 관련 사이트가 7백여 개에 이른다. 대표적인 동호회 ‘쌈박질 클럽’은 회원 수가 18만명이나 된다. 관련 업계에서는 이종격투기 팬 규모를 100만명 수준으로 보고 있다. 2005년 업계는 100% 성장을 예상하고 있다. 2002년 말 위성 방송 KBS스카이를 통해 이종격투기가 소개된 지 2년도 안되어 일어난 일이다. 대중문화 평론가 변희재씨는 “이종격투기는 하나의 열풍을 넘어 스포츠의 한 장르로 자리 잡았다. 억압 구조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룰을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고, 약자가 강자를 잡는 경우가 빈번한 이종격투기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최근 천하장사 최홍만, 국가대표 유도선수 윤동식·김민수 등이 잇달아 일본에 진출한 것도 급속하게 팽창하는 이종격투기 시장과 맞물려 있다. ‘태권 황제’로 군림했던 김제경 선수에게는 K-1측이 미국으로 사람을 파견하면서까지 스카우트에 열을 올리고 있다. 최근에는 아테네올림픽 태권도 헤비급 우승자 문대성도 영입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일본에서 한국 선수 영입에 열을 올리는 까닭은 우수한 선수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여기에는 세계적인 한국 파이터가 나온다면 한국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계산도 깔려 있다. 최홍만이 스모 선수인 아케보노를 꺾는다든지, 윤동식이 요시다를 꺾는다면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지리라는 판단이다.

최홍만을 스카우트한 다니카와 사다하루 대표는 “K-1은 한국 내 보급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한국에서 스타 선수가 탄생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일본 이종격투기 시장은 한국 선수들에게 한국에서 보장받는 수입보다 최소 10배 이상을 약속하고 있어 한국 선수들의 일본행은 2005년 벽두를 뜨겁게 달굴 것으로 예상된다.

아직까지는 한국 파이터들의 실력이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거리가 있다. 국내 여건상 낮에 일하고 밤에 운동하는 선수가 많고, 또 이종격투기를 체계적으로 훈련하지 못한 선수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국내 최대 규모 대회인 스피릿MC 초대 챔피언 이면주 선수는 지난해 11월 일본에 건너가 네이선 코벳에게 TKO를 당했다. 앞서 7월에 서울에서 열린 경기에서도 일본 선수에게 무릎을 꿇었다. 현재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는 데니스 강은 태국의 카오클라이의 한방에 걸려 기절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바둑 시장을 일본이 만들었으나 한국 기사들이 장악했듯이, 격투기 시장도 머지않아 한국 선수들이 장악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일본 프라이드에 진출해 3승무패를 기록 중인 최무배 선수는 “일본 격투기 시장을 만든 주인공은 역도산과 최영의였다. 한국 선수들의 투지와 근성에 지원이 보태진다면 정상은 그리 멀지 않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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