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스의 현실주의,네오콘 눌렀다
  • 남문희 전문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4.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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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2기 정권의 외교안보팀 인선이 ‘우파 혁명’이라는 국내외 언론의 분석은 맞는 것일까? 부시 대통령의 최근 행보와 라이스 국무장관 임명 과정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근거 없는 억측이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칠레 산티아고에 모습을 드러낸 부시 미국 대통령은 분명히 변해 있었다. 지난 4년간, 그리고 대선 기간 내내 유지해온 ‘일방주의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미국 언론들도 지적했지만 부시 대통령은 이번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의 컨셉트를 ‘북핵 문제에 한목소리 내기’로 잡았다. 6자 회담 참여국들과 ‘통일전선’을 구축하려 했다고 평하는 언론도 있었다.

지난 11월20일 밤 늦게 열린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은 단연 관심의 초점이었다. 자기 안방인 로스앤젤레스에서 ‘북한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했고, 앞으로 6자 회담에서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하겠다고 선전포고한 한국의 대통령을 그가 과연 어떻게 대할까. 2001년 3월 김대중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 악몽을 연상하며 불협화음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부시는 이 날 ‘노대통령과 한국 정부가 북핵 문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민감성을 이해한다’며 노대통령의 로스앤젤레스 발언을 비켜갔다. ‘북핵 문제를 미국 외교정책의 1번으로 삼아 6자 회담 틀 내에서 평화적이고 외교적인 방법으로 풀자’는 노대통령의 제안에 대해서도 ‘절대적 동의’를 표했다. ‘북한도 6자 회담 참여국인 만큼 회담을 원만히 진전시키기 위해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자’는 제안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이해’한다고 말했다. 과거 같으면 이 정도 대목에서 한마디 속 긁는 얘기가 튀어나왔을 법한데, 그가 보인 모습은 마음 좋은 ‘엉클 샘’이었다.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호칭이 ‘김정일’에서 ‘북한 지도자’로 바뀌었다는 것도 그의 ‘안정된 심리 상태’를 보여주는 징표였다.

예전의 그가 아닌 것 같다는 인상은 베이징에서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전부터 북한의 후견인을 자처하기 시작한 베이징 역시 부시 2기 정권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워 왔다. 그런데 같은 날 후진타오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도 그는 매우 정중했다고 한다. 두 정상은 대화의 상당 시간을 북핵 문제에 할애했는데, 대화의 주조는 ‘중국의 적극적인 역할을 정중히 부탁하는 식이었다’고 베이징 외교 소식통이 전해왔다.
부시 대통령, 아버지 부시의 길 따르는가

물론 산티아고에서 부시 대통령이 보인 모습 하나만 가지고 평가하기에는 섣부른 감이 있지만, 그가 콘돌리자 라이스를 신임 국무장관에 임명하고 스티브 해들리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안보보좌관에 임명하는 제2기 외교안보팀 인선을 발표한 직후 세계 언론이 예상해온 것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집권 2기 외교안보팀 인선에 대해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는 11월17일자 칼럼에서 ‘우파 혁명’이라고 규명하며 세계 언론의 논조를 주도했다. 크리스토프는 ‘파월이 물러난 것은 스스로 물러난 것이 아니라 해임된 것이며, 사실상 체니를 비롯한 네오콘이 이번 인사의 최종 승리자이고 라이스 역시 그 앞에서는 양순하게 굴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제 파월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의 저항조차 사라져 부시 외교의 우향우 혁명이 크게 염려된다는 것이었다. 크리스토프의 이같은 ‘페시미즘’은 그대로 국내 언론의 입맛에 맞게 증폭되었다. 보수 언론은 쾌재를 부르며 이를 확대 재생산했고, 진보 세력은 마치 체념한 듯 ‘대세’의 추이를 관망했다.

그러나 산티아고에서 첫선을 보인 부시 2기 외교는 크리스토프나 국내외 언론이 지적한 ‘우파 혁명’과는 무관해 보였다. 오히려 그보다는 아버지 부시의 현실주의에 더 가까워진 모습이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한 것일까. 워싱턴 정가 내부 소식에 정통한 소식통들에 의하면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크리스토프가 말한 우파 혁명 같은 것은 실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지난 11월16일부터 11월20일 부시가 산티아고에 출현한 기간은 세계 언론사에 기록될 만큼 오보가 남발된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워싱턴 내부에서는 실제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우선 크리스토프를 비롯한 국내외 언론의 주장에는 몇 가지 전제의 오류들이 있다. 파월이 온건파였던 것은 사실이나, 그의 퇴장이 곧 체니를 비롯한 네오콘의 대세 장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파월은 분명 온건파였지만 부시 정권 내부에서는 번번이 체니의 장벽에 부딪혀 좌절함으로써 오히려 6자 회담 참가국들을 지치게 했다. 즉 그가 물러난 데는 이같은 비효율성이 줄어들게 되었다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체니와 한마디 상의 없이 국무장관 인선

그 다음은 라이스에 이어 안보보좌관이 된 스티브 해들리와 관련된 문제다. 그동안 국내외 언론은 그가 네오콘의 중심 인물이며, 체니와 가깝다는 이유로 외교 안보를 총괄 조정하는 기구인 국가안전보장회의마저 체니를 중심으로 한 네오콘에 장악되었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워싱턴 내부에서는 그를 더 이상 체니 인맥이 아닌 라이스 인맥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그가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책임지게 되었다는 것은 체니가 아닌 라이스가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지휘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일부 미국 언론이 라이스의 위상을 닉슨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과 국가안전보장회의보좌관을 겸임했던 헨리 키신저와 유사하다고 지적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라이스에 대한 평가. 국내외 언론은 이 점에 대해 혼란스런 모습을 보여주었다. 라이스는 ‘네오콘은 아니지만 그에 못지 않게 강경한 인물’이기 때문에 체니나 럼스펠드와 큰 차이가 없다는 식이다. 그러나 그녀의 성향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 그가 유태인이 태반인 네오콘 그룹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현재의 시점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라이스는 인종 차별에 시달려온 남부 출신 흑인 여성이며, 정치적 계보로는 아버지 부시의 측근들이 중심 세력을 구성하고 있는 공화당 정통 보수파인 ‘현실주의자(realist)’ 그룹에 속한다. 1989년 아버지 부시 정권 때 라이스를 국가안전보장회의 소련·동유럽 국장에 발탁한 인물이 바로 공화당 정통 보수그룹을 실질적으로 주도해온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이다. 스코크로프트는 라이스를 자신의 분신으로 여겨왔고, 라이스는 그를 스승으로 여길 정도로 서로 각별한 사이이다(26쪽 딸린 기사 참조).

물론 9·11과 이라크 전쟁이라는 격동기를 거치며 둘 사이가 소원해진 적이 있지만, 네오콘이 주도한 이라크 전쟁이 실패로 돌아가고, 이 과정에서 네오콘의 부도덕성이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라이스는 네오콘과 선을 긋고 다시 스승을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라이스는 네오콘보다는 ‘현실주의자’ 그룹에 가까워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11월16일 외교안보팀 인선 발표가 있기 전까지 부시를 가운데 두고 체니와 라이스 등이 축이 되어 전개해온 백악관 내부의 긴박한 드라마를 살펴보면 이같은 사정들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선 파월 국무장관 퇴진을 정점으로 하는 제 1막에서는 분명 체니를 비롯한 네오콘이 승리를 거두었다. 파월 국무장관은 그동안 부시 2기 내각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공언해 왔지만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유임 쪽으로 마음이 바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체니가 강력히 반대하고 부시가 체니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그의 바람은 좌절되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파월의 후임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부시는 체니와 한마디 상의 없이 라이스를 지명해 버렸다는 것이다. 1기 정권의 대외 정책을 사실상 체니가 총괄해 왔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부시가 라이스를 일방적으로 지명함으로써 내심 라이스 국무장관 임명을 반대하던 체니의 복안은 물거품이 된 것이다. 체니는 부시와 속마음이 통하는 라이스가 대외 정책을 주관하는 국무장관이 될 경우 자신의 영향력이 축소될 것으로 보고 내심 견제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라이스 국무장관 임명에 이어 또 한번의 주요 고지가 바로 국가안전보장회의 안보보좌관 자리였다. 이 자리를 둘러싸고 체니를 비롯한 네오콘은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을 필사적으로 밀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라이스교’로 개종한 스티브 해들리가 발탁됨으로써 또다시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스티브 해들리를 안보보좌관으로 밀어올림으로써 라이스는 국가안전보장회의에 대한 체니와 럼스펠드의 간섭을 배제하고 국무장관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워싱턴 내부의 평가이다.

외교안보팀 인선과 관련한 마지막 승부처는 아미티지 후임으로 공석이 된 국무부 부장관 자리. 존 볼턴 국무부 비확산담당 차관 승진 인사설과 아버지 부시 정권 때 정치담당 국무차관을 지낸 아널드 캔터가 경합하고 있다. 만약 라이스가 자신의 의중대로 아널드 캔터를 부장관으로 선임하게 될 경우 그 의미나 파장은 대단히 클 수밖에 없다. 이는 곧 라이스가 네오콘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의 ‘고향’인 공화당 현실주의자로 완전히 복귀한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네오콘에 맞선 ‘국무부의 궐기’ 시작되다

아널드 캔터는 현재 브렌트 스코크로프트가 운영하는 국제 컨설팅 회사인 스코크로프트 그룹에서 국제 전략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다. 캔터는 라이스와 같은 스승을 모시고 있는 ‘사형사제’ 뻘인 인물인 것이다. 따라서 캔터의 국무부 진입은 바로 현실주의자의 대부인 스코크로프트 사단이 국무부를 점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널드 캔터의 국무부 진입은 또한 북핵 문제를 비롯한 북한·미국 관계에서도 매우 상징적인 신호가 될 수 있다. 그는 아버지 부시 정권 시절인 1992년 1월 뉴욕에서, 지금은 작고한 북한의 김용순 비서와 북·미 첫 고위급 회담을 했던 인물이다. 이 회담이 이후 1990년대 북·미 관계사의 서막을 연 역사적 회담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후 월 스트리트 저널에 ‘당시 김용순 비서가 미국이 일본과 동맹을 유지하는 것보다 차라리 북한과 동맹을 맺는 것이 동북아에서 미국의 이익을 위해 중요할 것이라는 매우 엉뚱한 제안을 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반면 라이스가 네오콘과 척을 지지 않기 위해 존 볼턴을 승진 발탁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 해도 볼턴의 역할은 과거에 비해 대폭 축소되리라는 것이 지배적인 관측이다.

인선을 둘러싼 내막뿐 아니라 관할 영역 재조정 과정에서도 부시 2기 외교의 중심 축은 체니나 네오콘에서 라이스 쪽으로 이동 중이다. 부시 1기 정권에서는 외교 분야에 대한 체니나 럼스펠드의 월권이 극심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쉽지 않으리라는 전망이다.

우선 업무 영역과 관련해 체니나 럼스펠드는 군사 분야와 이라크 문제 처리에 한정되리라는 것이 워싱턴 내부의 전망이다. 럼스펠드가 1년 유임을 허락받은 것도 결자해지 차원에서 이라크 문제를 담당하라는 의미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엄격한 통제 아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독단적 의사 결정은 어렵다.

군사 문제와 이라크 문제 외의 최대 현안인 북한 핵 문제와 이란 문제 그리고 유럽연합(EU)이나 중국 러시아 등 강대국 외교는 거의 대부분 라이스가 주도하는 국무부 소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부시 1기 정권과 달리 국무부 위상이 강화되면서 중량감 있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국무부를 재편하기 위한 작업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일각에서 ‘부시 대통령이 팔루자에 진격하듯이 국무부와 중앙정보국을 대수술하고 있다’고 지적한 내용의 실질적 의미는 국무부를 우향우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역할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워싱턴 내부에서 ‘국무부의 궐기(State strike)’라는 표현이 회자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동안 네오콘의 등쌀에 소외되었던 국무부의 반격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국무부의 궐기에 대한 실질적 결정자인 부시 대통령에게로 돌아가 보자. 그는 왜 갑자기 체니 부통령과 네오콘이라는 막강한 그룹을 배제하고 라이스를 새로운 외교 사령탑으로 선택했을까. 그가 네오콘을 멀리하게 된 것은 라이스와 마찬가지로 지난 1기 정권 때 그들의 행태에 대한 염증이 깊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라이스가 단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인물이기 때문에 그녀에게 외교에 대한 전권을 맡기게 되었다는 국내외 언론의 분석은 지나치게 단선적이라 할 수 있다. 현실 정치가인 부시가 단순한 친소 관계로 라이스에게 대임을 맡길 수는 없다. 오히려 그가 라이스를 선택한 데에는 라이스야말로 체니를 정점으로 하는 네오콘 세력을 실질적으로 견제할 공화당 내부의 또 다른 뿌리 깊은 인맥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인맥이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가신들과 그 가신들이 키운 공화당 내 정통 보수 세력인 현실주의자들이다. 라이스는 바로 그 현실주의자 인맥의 현직 총사령관인 셈이다.

체니에서 라이스로의 이동은 바로 부시 2기의 대외 정책이 네오콘에서 공화당 현실주의자들로 중심 축이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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