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관은 노무현도 못 말려
  • 경남 남해·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3.03.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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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식’으로 행정 개혁 밀어붙일 듯…남해 군민의 인물평은 ‘극과 극’



남해대교는 육지에서 경남 남해로 들어가는 유일한 관문이다. 요즘 이 다리를 넘어 남해로 진입하자면 플래카드 하나가 방문객을 먼저 맞는다. ‘김두관 장관의 취임을 축하드립니다-남해군민 일동’.
군(郡)을 통틀어도 인구 6만명이 채 되지 않는 섬 남해. 이 작은 고을의 군수가 어느날 4천만 전국민의 살림을 관장할 행정자치부장관이 되었다. 군민들로서는 경사가 나도 대경사가 난 셈이다. 그러나 현지의 반응은 예상 외로 차분하다.


남해 초입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주인 김 아무개씨(50)는 장관 배출을 축하한다는 기자의 말에 뚱한 표정으로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서는 한참 있다 내뱉는 말이 “그 양반 관운(官運) 하나는 억시게 좋은 사람이라예”이다.
관운 좋은 사람. 이 말은 김두관 장관이 서른일곱 살 되던 해 전국 최연소 자치단체장으로 선출될 때부터 따라 다닌 말이다.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해야 할 재산신고서에 ‘염소 3마리’라고 적었다가 핀잔을 들었을 만큼 찢어지게 가난한 농군 출신인 데다, 학력도 가문도 변변치 않은 무소속 후보인 그가 막강한 여당 후보를 꺾고 군수에 선출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를 기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장관을 처음부터 지지해 온 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결코 쓰지 않는다. “준비된 장관입니더. 잘할 낍니더.” <남해신문> 발행인 한관호씨(44)는 이렇게 잘라 말했다. <남해신문>은 김두관 장관이 군수에 당선되기 전 발행인으로 있던 신문이다. 김장관은 군민주 형태로 자금을 모아 창간한 이 신문을 발행하면서 지역 운동의 토대를 다졌다. 이 신문을 창간하기 전에는 고향 마을인 이어리에서 이장을 지내면서 군민에게 책을 대여해 주는 문화 공간인 책 사랑나눔터와 남해사랑청년회 등을 운영해 대중적인 지지 기반을 넓혔다. 이 과정을 함께한 이들은 그래서 김장관을 당시에도 ‘준비된 군수’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7년간 군정 경험을 통해 지방 분권 시대에 필요한 마인드와 행정 실무 경험을 쌓은 김장관은 준비된 장관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한씨의 주장이다.


반대파도 김두관의 인간미는 인정


남해에서는 사실 김장관에 대한 중립적인 평가를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평가는 오직 양 극단으로 나뉠 뿐이다. 김장관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를 지금도 ‘우리 군수님’이라고 부르며 그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와 애정을 보낸다. 군민이 주로 드나드는 김두관 공식 홈페이지에는 입각 이후 ‘두사모(‘김두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정식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답지하고 있다. 개중에는 김장관을 노무현 대통령과 비교하는 것이 기분 나쁘다는 군민도 있다. ‘왜 김장관님을 리틀 노무현이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노무현 정부가 오히려 김장관의 군수 시절 개혁 정책을 벤치마킹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노무현 정부가 아니라 리틀 김두관 정부라고 불러야 합니다.’(정상수)


그런가 하면 그를 싫어하는 군민은 ‘그런 사람을 장관 자리에 앉혔다는 것 자체가 이 정권의 한계’라고 비아냥댄다. “초선 때나 재선 때는 상대 후보가 계속 악수를 두는 바람에 당선되었지만 3선은 어림도 없었어예. 군수 2기 중반께부터는 지지율이 팍팍 떨어지고 있었심더.” 남해 지역 시민단체의 한 간부는 이렇게 주장했다.





김장관을 상관으로 모셨던 남해군청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반응은 엇갈린다. “(김장관이 군수로 재직하던) 7년간 직원들이 정말 편했습니다. 기자실 폐쇄하는 바람에 기자들 신경 쓸 일 없죠. 회의 같은 건 대폭 간소화하고 실무자들에게 힘을 실어주니까 일할 맛이 났습니다.” 한때 수행비서를 지낸 정종길씨는 이렇게 말했다.


김장관은 군수 시절 기존 관행들을 혁신적으로 파괴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역 출신 국회의원이 찾아오면 남해대교까지 마중을 나간다든가, 유지들을 정기적으로 회식에 초청해 체면을 세워주던 일 따위를 김장관은 깨끗이 무시했다. 연공 서열 중심의 인사 관행도 파괴했다. 능력 있는 직원이라면 상급자를 제치고 과장으로 고속 승진시키는 파격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일부 직원에게는 불만 요인이 되었다. 김장관이 군수로 재직할 때 과장·국장은 ‘열중쉬어 과·국장’이나 다름없었다고 한 군청 공무원은 말한다. 새파란 나이에 군수가 된 김장관이 자기보다 나이 많은 과·국장보다는 실무자급인 담당 계장을 불러 업무 보고 받기를 즐기는 바람에 자기들은 하는 일 없이 눈치만 보고 지냈다는 것이다.


단, 이른바 친(親) 김두관파나 반(反) 김두관파나 동의하는 것이 하나 있다. 외부에 알려진 것처럼 김장관이 극단적이거나 독선적인 사람은 아니라는 평가가 그것이다. 군수 시절 김장관을 ‘파쇼 군수’ ‘즉흥 행정의 귀재’라고 공격했던 한 주재 기자도 그것은 행정 스타일에 대한 비판이지, 김장관 개인은 솔직 담백하고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자기가 구상한 일을 실천에 옮길 때의 김장관은 극단적이고 저돌적이라는 외부 평이 맞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의 타협적인 사고는 없다. 이는 김장관을 전국적인 유명 인사로 만든 1995년 남해군청 기자실 폐쇄 사건에서 이미 단적으로 드러났다. 그가 군수로 취임했을 때만 해도 군청 출입 기자는 지역 유지가 대부분이었다. ‘떡고물 떨어질 것이 별로 많지 않은’ 이 지역에서 출입 기자들은 촌지를 받기보다 인사에 힘을 쓰거나 민원을 관철하는 것으로 자기 존재를 과시하곤 했다. 더욱이 출입 기자 11명 중 10명은 그와 학교 선후배 관계로 얽혀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인정 사정 볼 것 없이 ‘언론과의 전쟁’을 밀어붙였다.


비타협적 자세로 대중적 인기 얻어


김장관의 이런 비타협적인 자세는 대중적 지지의 원동력이 되었다. 한나라당 텃밭으로 분류되는 남해 지역에서 무소속인 그가 변변한 정치적 기반도 없이 연거푸 군수에 당선된 데는, 이런 대중의 성원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런 밀어붙이기식 스타일 때문에 역으로 자신의 지지 기반을 스스로 갉아먹기도 했다.
남해 사람들이 김장관 인기가 떨어진 가장 큰 요인으로 꼽는 사건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이른바 ‘불법 묘지와의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지난해 지방자치제 선거에서 김장관이 무소속에서 민주당으로 말을 갈아타고 경남도지사로 출마한 것이다.


2001년 1월, 김장관은 개정된 장사법(葬事法)에 따라 불법 묘지를 강력하게 처벌하겠다고 공표했다. 이 법에 따르면, 개인 묘지를 쓰려는 사람은 30일 이내에 관청에 신고해야 했고, 합법적인 장소에 묘지를 쓰지 않은 사람은 2년 이하 징역에 천만원 이하 벌금형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법을 지키는 지방자치단체는 전국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해보았자 욕 먹고 ‘지역민 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장관은 이를 밀어붙였다. 묘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남해 그린플랜’에 따라 남해를 환경 친화적인 관광지로 거듭나게 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서였다. 그는 직접 줄자를 들고 도로에서 묘지까지 거리를 재고 다녔고, 군내에 초상집이 생기면 직원을 보내 상주에게 맨 먼저 묘를 어디에 쓸 것인지를 묻게 했다. 덕분에 담당 공무원들은 밤마다 소주 한 병을 사 들고 귀가했다고 한다. “무덤도 내 맘대로 못쓰느냐” “마지막 효도라도 하겠다는데, 당신네는 부모 조상도 없냐”는 군민들의 거친 항의에 시달리느라 맨 정신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법 묘지 비율 80%에서 0.2%로 줄여


그로부터 1년 뒤 남해군의 불법 묘지 비율은 80%에서 0.2%로 떨어졌다. 화장 비율은 10%에서 23%로 높아졌다. 대한민국 행정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그 대신 김장관은 민심을 잃었다. 엎친 데 덮친 것이 지난 6·13 지자체 선거였다. 지역주의의 강고한 틀에 묶여 있는 민심은 ‘민주당 후보 김두관’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의 측근들마저 민주당행을 만류했지만 김장관은 지역 구도의 틀을 깨는 정치인이 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김장관은 자기 고향인 이어리를 제외한 군내 전지역에서 상대 후보에게 참패했다. 그때부터 반 김두관파는 ‘김두관은 이제 죽었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김장관이 속한 진영에서 내세워 당선된 군의원 3명이 그뒤 한나라당으로 소속을 바꾸면서 그의 정치적 사망은 기정 사실이 되어 갔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 당선과 함께 ‘김두관의 화려한 부활’은 시작되었다. 이제 그는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질적인 비약을 이루었다. 김장관의 핵심 측근으로 손꼽히는 박동완씨는 “묘지 전쟁을 보면 김두관 행자부의 미래가 보일 것이다”라고 귀띔했다. 이는 주류 기득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렇다고 대중의 인기에 연연하지도 않고, 원칙적으로 행정 개혁을 밀고 나가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에 대해 남해 지역의 한 시민단체 간부는 “행정을 ‘법대로’ 처리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의견 수렴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일을 벌인 다음 이를 무작정 밀어붙인 것이 문제였다”라고 주장했다. 김장관에 대해 우호적으로 보도해 온 한 지역 기자는 “노무현 대통령은 그나마 대선 과정을 거치며 양보하고 타협하는 법을 익혀 왔는데, 김장관은 그럴 기회가 없었다. 어쩌면 김두관이야말로 노대통령도 못 말리는 장관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2월28일 취임식을 가진 김장관은 일단 공무원 노조를 허용하겠다는 말로 ‘못 말리는’ 행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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