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 지갑 열고 시장 앞으로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2.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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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의 주머니가 활짝 열렸다. 남성들이 유흥비를 줄이는 대신 패션과 취미 생활에 투자를 늘리면서 여성들을 제치고 새로운 소비 주체로 떠오른 것이다. 이 시대 남자들은 무엇을 위해
소비 시장에서 남자는 ‘열외’였다. 정작 돈을 버는 쪽은 남자이지만, 쓰는 쪽은 주로 여자여서 유통업체들은 당연히 남자보다 여자를 VIP로 모시기에 바빴다. 그러나 이런 사정이 얼마 전부터 달라졌다. 몇 년 사이에 남자들의 소비 의식과 유형에 변화가 일면서 남자들이 새로운 소비 주체로 떠올랐다.




지각 변동은 20대가 일으켰다. 20대의 상당수는 과거 유흥가에 돈을 갖다 바쳤던 ‘선배’들과 달리 수입의 절반 가까이를 자기 자신을 꾸미고 취미 활동을 하는 데 쓴다. 30대는 소비에 눈을 뜬 남성과 그렇지 않은 쪽으로 양분되는데, 패션에 관심을 갖는 숫자가 크게 늘고 있다. 40대도 20∼30대의 변화에 영향을 받고 있다.



김영석씨(27·삼성테스코 재무회계팀)는 한 달 용돈의 대부분을 취미 생활에 쏟아붓는다. 스킨스쿠버·골프·스키 등을 즐기는 김씨는 수입의 30~40%를 스포츠용품 구입이나 연습에 쓴다. 얼마 전에는 거금을 들여 골프채도 장만했다. 주변에서는 새파랗게 젊은 놈이 무슨 골프냐며 비난하는 이도 있지만, 김씨는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김씨는 “용품을 싸게 구입하고 퍼블릭 코스를 활용하면 먹고 마시는 데 드는 돈만 아껴도 좋아하는 운동을 즐길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스포츠용품은 공동 구매를 하거나 세일 기간에 사고, 회사 골프 회원권을 사내 동아리 회원들과 함께 이용하면 필드에 나가도 돈이 많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홍보대행사에 다니는 황의건씨(35·오피스H 이사)는 이미지를 가꾸는 데 수입의 상당 부분을 투자한다. 마음에 드는 옷이나 액세서리를 발견하면 값을 따지지 않고 산다. 옷이 연예인 못지 않게 많은데, 넥타이도 2백 개가 넘는다. 구두도 40켤레 넘게 가지고 있다. 피부 가꾸기에도 게으르지 않다. 20대부터 아이크림을 반드시 발랐고, 최근에는 노화 방지 에센스와 비타민C도 바르고 있다.


그러나 어떤 물건이든 정가에 사지 않는다는 것이 황씨의 철칙이다. 면세점이나 아울렛 매장을 주로 이용하고, 세일 기간에 쇼핑한다. 그렇다고 해서 고가품이나 명품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황의건이라는 한 사람을 여러 가지 옷과 액세서리로 편집한다는 마음으로 자기에게 어울리는 물건만을 고른다. 해외 출장 때에는 매장을 돌고, 국내에서는 인터넷이나 잡지를 통해 새로운 유행 정보를 얻으며 자신의 패션 감각을 키워가고 있다. 황씨는 “수입에 비해 소비 비율이 높은 편이지만, 사회 활동이 왕성한 30대에는 품위 유지를 위해 투자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남성 10명 중 3명 “마음에 드는 물건 꼭 산다”



의류 회사에 다니는 김준만씨(42) 역시 패션과 취미를 위한 소비를 ‘투자’라고 생각한다.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패션에도 꽤 관심을 가진 김씨는 돈 쓰임새가 많은 중년이어서 돈이 많이 드는 옷보다는 소품을 주로 활용한다. 김씨는 “바이어를 만난 자리에서 1회용 라이터와 5백원짜리 싸구려 볼펜을 꺼내는 사람과 품위 있는 소품을 꺼내는 사람의 이미지가 같을 수는 없잖은가”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시계·만년필·라이터·향수 따위를 구입하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다. 음악 감상과 운동에도 꽤 투자한다. 좋은 음향 기기와 스노보드를 구입하는 데 쓰는 돈은 심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바쁜 일과 때문에 따로 쇼핑하러 다니기가 어려운 김씨는 주로 온라인 쇼핑몰을 이용한다. 특히 한 달에 10장 넘게 수집하는 음악 CD는 꼭 인터넷에서 산다.



물론 이 세 사람의 소비 의식과 유형이 현재 한국 남성의 소비 흐름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BBDO를 비롯한 6대 광고 회사가 공동으로 조사한 소비자 프로파일 리서치(CPR) 자료를 보면, 남성들의 소비 의식과 유형이 과거에 비해 확연하게 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발표된 ‘1992-2001 소비자 프로파일 리서치’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남성들의 패션 의식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새로운 패션과 유행을 남보다 빨리 받아들인다는 남성과 주위 사람에게 패션에 대해 조언하는 남성 비율이 10년 동안 두 배 이상 늘었다. 유행을 따라가는 데 남성과 여성의 격차가 거의 없을 정도이고, 패션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남에게 조언하는 적극적인 남성도 크게 증가한 것이다. 옷은 입는 사람의 품위를 나타내고, 옷을 잘 입어야 제대로 대접받는다는 생각을 가진 남성이 절반 이상(70쪽 표 참조)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올해의 소비자 프로파일 리서치 자료만 보아도 남성의 소비 유행 변화는 한눈에 들어온다(70쪽 표 참조). 남성 5명 가운데 1명이 정보 통신 제품을 빨리 구입하고, 열 가운데 셋은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미루지 않고 산다. 10명 중 4명은 돈이 들더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여가 활동을 하고, 실제로 다양한 취미와 스포츠를 즐기는 남성도 3분의 1을 차지한다. 또 10명 중 3명 가량은 비싸더라도 분위기 있는 음식점을 찾고, 더 많은 남성이 맛있다고 소문난 음식점을 찾아다닌다.



인터넷 쇼핑몰 최대 고객도 남성



남성이 소비 주체로 떠오르는 현상은 백화점이나 할인점 같은 대형 쇼핑센터 현장에서도 쉽게 감지된다. 지난 11월14일 오후 4시께, 서울 영등포에 있는 할인매장 홈플러스에서는 쇼핑하는 남성이 적지 않았다. 아내와 함께 나온 이가 대다수였지만, 나홀로 쇼핑에 나선 남성에서부터 부자(父子)가 나란히 쇼핑하는 풍경도 볼 수 있었다. 휴가 내고 아버지와 함께 쇼핑 나왔다는 최영진씨(27·회사원)는 “1주일에 한번꼴로 쇼핑한다. 어머니가 동행할 때도 있지만 아버지와 올 때도 적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남성들의 소비 유형을 변화시킨 것은 무어니 무어니 해도 온라인 쇼핑몰이다. 남성의 4분의 1 이상은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해 제품을 구입하는 것이 더 편리하다고 생각하고, 혼자 쇼핑할 때에는 오프라인 매장보다 온라인 매장을 더 자주 이용한다.



남성들은 올 초부터 인터넷 쇼핑몰의 큰손으로 등극했다. 인터넷 쇼핑몰 인터파크에 따르면, 올 상반기 구매 건수 비중은 여성(54%)이 남성(46%)보다 높지만 매출액 비중은 남성(60%)이 여성(40%)보다 월등히 높다. 남성 한 사람이 쓰는 돈은 15만원으로 여성(8만5천원)보다 두 배 가까이 많다. 인터파크 이종환 마케팅 팀장은 “남성들은 주로 PC·홈시어터·가전제품·레저용품 등 가격대가 높은 상품을 구매하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했다. 물론 남녀 구분 없이 온라인 쇼핑몰에서 가장 많이 구입하는 것은 책이지만, CPR자료에 따르면 의류·잡화·화장품을 뺀 대부분의 품목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구입 비율이 더 높다.



인터넷 쇼핑몰 못지 않게 남성들을 소비 시장으로 이끌어낸 것은 남성 패션지들이다. 여성 잡지가 여성의 소비에 가이드 역할을 하듯, 남성 잡지 또한 최신 유행 정보를 제공하면서 남성들로 하여금 소비에 눈 뜨게 한다(위 상자 기사 참조).



의식 변화와 소비 환경이 공조 체제를 구축하며 남성을 소비 시장으로 이끌자, 인터넷 쇼핑몰이나 유통업체, 소비재 기업들은 남성들의 주머니를 열기 위해 치열한 마케팅 전쟁을 벌이고 있다(72~73쪽 딸린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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