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형' 당하듯 죽어간 사람들
  • 경남 산청/글 이문재·사진 안희태 기자 (moon@e-sisa.co.kr)
  • 승인 2001.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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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단, 산청 외공마을·함양 서주마을에서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


구덩이 6개를 파더니, 구덩이 앞에 사람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총을 쏘았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하순께(3월 중순이라는 설도 있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 마을에서는 처형하듯이 학살이 자행되었다.


외공리 민간인 학살 사건은 오랫동안 파묻혀 있었다. 1960년 4월 〈한국일보〉와 〈부산일보〉가 보도한 이후 줄곧 잊혔다가 1998년 진주MBC를 통해 다시 알려졌다. 지리산 외공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에 따르면, 외공리에서 학살이 있던 날은 비가 내렸다. 장갑차와 군용 트럭을 앞세우고 민간인을 실은 버스 11대가 마을로 들어왔다. 버스들은 신흥·경북·서울 번호판을 달고 있었다.




이 차량 행렬은 외공 마을을 지나 중산리 쪽 반천 마을로 올라갔다가 빨치산의 총격을 받고 다시 철수, 외공 마을 뒤 속칭 소정골 앞에서 민간인들을 하차시켜 골짜기로 끌고 갔다. 조짐이 이상하다고 느낀 민간인들은 군인들을 붙잡고 "아저씨, 좋은 곳으로 살러간다더니, 이리 가면 우리 죽는 거지요"라며 울부짖기도 했다.


1999년 5월, 진상규명추진위를 결성하기로 하고 소정골 현장에서 발굴 작업을 벌였다. 구덩이 6개 가운데 1개만 발굴했는데 채 1m도 파지 않아 유골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 구덩이에서 1백50개로 추정되는 유골이 수습되었다. 진상규명대책위 서봉석 실행위원장(산청군의회 의원)은 희생자가 최소 4백명에서 최대 8백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지리산 도보 순례단은 지난 5월7일 오후 4시, 외공 마을에서 50년 전 희생된 '무명씨'들의 넋을 달래는 위령제를 지냈다. 이보다 사흘 앞선 5월4일, 서주 마을에서는 '한국전쟁시 함양군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가 열렸다. 1951년 2월8일(음력 정월 초이틀), 인근 10개 마을에서 천명 가까운 주민이 소집되어, 그 중 1백7명이 죽임을 당했다. 유족회 대표로 나와 당시 상황을 증언한 최병철씨(73)는 그날 바로 이 자리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앉혀 놓고 모두 눈을 감으라고 한 다음, 살릴 사람과 학살할 사람을 가려냈다.


서봉석 실행위원장은 "민간인 학살 사건은 진상 규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진상을 밝혀야 명예가 회복되고, 역사의 교훈이 된다. 보상과 위령 사업은 그 다음 문제다. 하지만 당국이나 유족들은 배상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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