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취재]국제법 무시한 중국의 배타적 경제수역 선포
  • 이정훈 기자 ()
  • 승인 1996.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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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EEZ 선포에 국제법 무시… 한·일·동남아국가와 마찰 빚을 듯
 
지난 5월15일 중국이 전국인민대표대회 19차 상무위원회를 통해 발표한 직선 기선(基線)의 비밀이 일부 밝혀졌다. 이 날 중국은 산동 반도 끝에 있는 산동고각(山東高角)에서부터 해남도(海南島)까지를 49개 기점으로 이어가는 전무후무한 방식의 직선 기선과, 서사 군도 일대에 대한 28개 직선 기선 기점을 발표해 한국·일본·미국과 동남아 여러 나라를 깜짝 놀라게 했다(왼쪽 그림 참조).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중국의 기선 발표에 경악한 것은, 중국이 유엔 해양법 협약과 국제법 원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철저하게 자국 이기주의에 근거해 기선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중국측 주장이 무리라는 것은 첫째 ‘산동 반도 이남의 전중국 해안이 과연 직선 기선을 적용시킬 정도로 복잡한 해안인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한다(해양법 용어에 대한 설명은 63쪽 딸린 기사 참조).

반도 국가인 한국은 섬을 3천5백79개나 보유한 만큼 해안선이 복잡하다. 그러나 국제법 원칙에 따라 섬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서·남해에 대해서만 직선 기선을 채택하고, 해안선이 단조로운 동해안에 대해서는 통상 기선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모래톱·돌섬, 억지로 기준 삼아

3천9백22개의 섬으로 구성된 일본은 현재 통상 기선 방식만 채택하고 있다. 오는 6월 말 참의원에서 영해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일부 해안에 한해 직선 기선을 채택할 예정이나, 해안선이 단조로운 동해안쪽 등 상당 부분 해역에 대해서는 통상 기선 방식을 적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압록강 하구에서부터 베트남 접경 지역까지의 중국 해안선은 1만1천㎞에 이를 정도로 장대하지만, 섬 숫자는 한국·일본과 비슷한 3천4백16개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해안선이 한국이나 일본에 비해 특별히 복잡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국제법에서 중요한 원칙 중의 하나는 ‘형평성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대향국(對向國)인 한국과 일본이 통상 기선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데도 중국이 자국에게만 유리한 직선 기선 방식을 일방적으로 채택한 무례(無禮)는, 경제수역 중간선 획정을 위한 한·중·일 협상에서 두고두고 문제가 될 전망이다.

두 번째 문제는 한국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1번 산동고각① 기점에서부터 13번 동남초 기점까지가 과연 국제법 원칙에 부합하느냐’ 하는 것이다. 한국이 이 13개 기점을 모두 인정한다면 그만큼 한국이 갖게 될 배타적 경제수역이 좁아지게 된다. 이 중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이 9번 마채형(麻菜珩) 기점·10번 외개각(外 脚) 기점·12번 해초(海礁) 기점·13번 동남초(東南礁) 기점이다.

 
9번과 10번 기점은 정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모래톱(沙洲)으로 밝혀졌다. 이 모래톱은 양자강에서 나온 토사가 태평양에서 올라오는 쿠로시오(黑潮) 해류에 밀려 북쪽으로 올라오다 퇴적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모래톱은 9번과 10번 기점 일대의 수역에서 여러 개 발견되는데, 썰물 때는 물 위로 드러났다가 밀물 때는 가라앉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중국은 ‘배타적 경제수역의 기선은 썰물 때의 해안선을 기준으로 한다’는 원칙을 악용해 썰물 때 드러나는 모래톱을 기선으로 발표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중국말고는 어떤 나라도 모래톱을 기선으로 삼지 않았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큰 강에서 흘러나온 토사가 조류에 밀려 형성된 모래톱은 낙동강 하구에서도 발견된다. 백합등·장자등 따위 이름을 가진 이 모래톱은 바닷물에 잠기는 때가 많을 뿐만 아니라 조류에 따라 매년 모양이 변화한다. 사람은 전혀 살 수 없고, 을숙도와 더불어 새들의 천국이 되고 있다. 이런 모래톱은 생태계를 연구하는 학자용 특수 지도에만 표시될 뿐이다. 한국은 이런 모래톱을 영해나 배타적 경제수역의 기선으로 채택하지 않고 있다.

중국에서 나오는 정보가 극히 제한된 상황에서 9번과 10번 기점 일대의 모래톱이 낙동강 앞바다의 모래톱과 같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유엔 해양법이 ‘94년 이 법이 발효되는 시점에서 인간이 거주하며 경제 생활을 하는 섬을 기선으로 한다’라고 한 규정에 분명 위배되리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의견이다. 해양법 권위자인 박춘호 전 고려대 교수는 이런 추측을 내놓았다. “40∼50년 전 이 모래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최근 매우 커졌다고 한다. 중국 자료에 따르면, 양자강에서 나오는 토사가 매년 10억∼20억㎥인데, 최근 양자강 중·상류 지역의 산림이 급속히 황폐화되면서 유출 토사량이 더욱 늘어났다고 한다. 때문에 1백∼2백년 후 이 모래톱들이 섬이 될 수 있으므로 미리 기선으로 발표한다는 것이 중국의 시각인 것 같다.”

 
한국 4광구와 중국 북광구 경계선 중복 우려돼


대륙에서 69해리나 나와 있는 12번 기점 해초(海礁)는 중국에서는 동도(童島), 국제 해도(海圖)에는 바렌 제도로 알려진 것으로, 바닷물 위로 몇m 솟아 있는 바위덩어리 암초에 불과하다. 유엔 해양법은 사람이 살지 못하는 바위섬은 배타적 경제수역의 기선에서 제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단지 돌섬이 물 위로 솟아올랐다고 해서 기선으로 삼겠다는 것은 중국의 억지 주장이라고 관계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13번 기점 동남초(東南礁)는 훨씬 더 작은 암초덩어리로 동도보다 더 동쪽에 있다.

동도와 동남초 기점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위 그림에서처럼 한국의 제4광구와 중국 북광구 간의 경계선이 이 기점을 어떻게 인정하느냐에 따라 변경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제주도를 한국측 기선으로 삼고 동도를 중국측 예상 기선으로 삼아 (나)선을 4광구 경계선으로 발표했다. 이후 중국도 북광구를 설정하며 계단 모양 경계선을 발표했는데, 이 경계선이 A, B 두 지점에서 한국 4광구 경계선과 겹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양국은 국교 관계가 없었고 이 대륙붕에서 석유도 발견되지 않아 중복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지금까지 방치해 왔다. 중국이 영해법을 제정한 바 없었고 기선을 발표한 적이 없었던 것도 협상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92년 2월25일 영해법을 공표하고 지난 5월15일 기선을 발표한 이상 한·중 양국은 대륙붕 중복 문제와 배타적 경제수역 중간선 획정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만약 이 협상에서 중국의 동도·동남초 기선안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한국 4광구의 경계선은 (가)선으로 옮길 수 있어 한국에 유리하다. 그러나 동도·동남초가 기선으로 인정될 경우 경계선을 (다)선으로 대폭 옮겨와야 하므로 한국이 절대적으로 손해이다.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4광구는 온 국민을 들뜨게 했던 7광구보다 석유 부존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또 이 수역은 어족이 매우 풍부해 중간선을 어떻게 긋느냐에 따라 한국과 중국 어민들의 이해가 엇갈리게 된다. 배타적 경제수역 문제를 담당하는 한국 외무부의 실무자는 우리의 국익뿐만 아니라 국제법 원칙 면에서 보더라도 중국의 동도·동남초 기선안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어, 실제 협상에서 중국과 대립이 심각해질 전망이다.

직선 기선 발표는 중화사상에 뿌리 둔 것

5월15일 발표에서, 중국과 대향국 사이에 영유권 분쟁이 일고 있는 여러 섬 중에서 유독 서사 군도에 대해서만 직선 기선을 발표한 것도 주목할 사항이다. 서사 군도는 현재 중국이 실효 지배를 한 상태에서 베트남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섬인데, 중국은 이 군도 일대에 28개 직선 기선을 발표했다. 그러나 일본이 실효 지배한 조어대(일본명 센가쿠 열도)와 중국이 실효 지배한 동사 군도(필리핀 등이 영유권 주장), 중국과 아세안 제국이 분점하고 있는 남사 군도, 그리고 독립을 막는다는 이유로 지난 3월 무력 시위를 감행했던 대만에 대해서는 영유권만 주장하고 직선 기선을 발표하지 않았다.

외무부의 한 실무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직선 기선을 적용하는 것은 영유권 주장보다 훨씬 더 강한 것이라 대향국이 격렬하게 저항할 가능성이 있다. 만약 중국이 조어대에 대해 직선 기선을 발표했다면 일본이 가만 있겠는가. 대만에 적용했다면 대만과 미국이 합세해서 중국에 대들 것이고, 동사와 남사 군도라면 아세안 제국이 집단으로 대항할 것이다. 결국 중국은 유사 이래 수천 년간 조공을 바쳐온 한국과 베트남을 가장 만만한 상대라고 판단하고, 한국·베트남과 관계된 부분만 직선 기선을 발표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실무자는 “직선 기선을 발표한 저변에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이 깔려 있다. 오랑캐를 다스리는 데는 이들을 분열시켜 상대하는 게 최고라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책략이 깔려 있는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최근 중국 해적선의 횡포는 한국이 자초한 면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중 국교 수립 때부터 지금까지 한국은 중국에 저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북한의 핵개발로 긴장이 고조되자, 북한을 제어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뿐이라는 믿음에서 중국을 조심스럽게 대하려는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 그러다 보니 중국 어선이 영해를 침범해 해적질을 해도 그냥 놔두고 있다. 가끔 해양경찰에서 나온 자료를 보면 중국과의 외교 문제를 고려해 영해를 침범한 중국선을 나포하지 못했다는 부분이 있는데, 정말 답답하다. 일본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대하면서도 중국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무기력한지 모르겠다. 독도 영유권 문제를 포함한 한·일 간의 경제수역 획정 문제보다 중국과의 서해 중간선 획정 문제가 훨씬 더 어렵고 국익에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한 국제법 전문가는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하는 데는 국제법 원칙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국제 무대에서는 힘의 논리뿐만 아니라 국제법 원칙도 통용된다며, 대만 해협 사태 때 싱가포르의 이광요 전 총리가 “양안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라”며 중국을 나무랬던 것처럼 우리도 중국에 대해 국제법 원칙을 지키라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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