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를 기대하는 대중의 ''타는 목마름''
  • 魯順同기자 ()
  • 승인 2000.03.0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청률 50%대 드라마 <허 준> 인기 비결
'허이~, 이보게. 준이~(오근, 일명 순돌이 아빠). 허이고. 준아(허준어머니). 허허~참. 요즘 사람답지 않게. 준수한 사람이구만(창녕우상대감).

허의원님. 제가…, 준비하겠습니다(예진)'.

통신 유머방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허 준 이행시다. 요즘 유행하는 썰렁한 삼행시 유머에, 드라마 <허 준>에 등장하는 주변 인물의 어투를 흉내낸 것이다. 위 유머를 읽고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이라면 이미 '허준 마니아'일 가능성이 높다.

방영 30회째를 맞는 드라마 <허 준>(연출 이병훈 극작 최완규)의 기세가 꺾일 줄 모르고 있다. 지난해 11월22일 처음 방영된 후 올해 초 시청률 1위 자리를 차지한 뒤 정상을 내놓지 않고 있다. 얼마 전부터 사극으로서는 이례적으로 50%대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첫사랑> <사랑이 뭐길래>는 60% 전후를 맴돌았으며, <보고 또 보고> 등이 55%까지 기록한 적이 있으나 사극으로서는 드문 일이다. 1998년 사극 바람을 일으켰던 <용의 눈물> 시청률은 종영 당시 49.5%였다(TNS 집계).
"허 준처럼 해달라" 요구에 한의사들 진땀

전문가들은 10대 이하와 50대 이상이 시청자군에 가세한 데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AC 닐슨 시청률 조사의 계층별 분석표에 따르면, 10대 이하 주 시청 프로그램은 대부분 유아 및 만화프로그램인데 그 틈에 <허 준>이 끼어 있다. 덩달아 서점가도 활기를 띠고 있다. 교보문고는 한의학 서적판매대를 따로 설치했으며,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원작 <동의보감>(창작과 비평사 펴냄)이 다시 베스트셀러권에 진입했다. 소설 <동의보감> (1990년)은 3백90만 부가 팔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으나 최근에는 한 해 만 부가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드라마가 시작된 후 두 달 도안 무려 6만 부가 팔려나갔다.

한의사들은 대체로 드라마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지난 1월 대한한의사협회(회장 최환영)는, 허 준 역을 맡은 전광렬과 유의태 역의 이순재, 작가 최완규 씨에게 명예한의사증을 수여했다. 허 준이 환자에게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부각되면서 한의사의 이미지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김남일 교수(경희대 한의예과 ·의사학)는 언론의 문의가 빗발치는 바람에 자문에 응하느라 연구에 차질을 빚을 정도라고 말했다. 반면 열풍이 가속화하면서 곤혹스러운 경험을 털어놓는 한의사도 늘고 있다. 드라마에서 환자들이 극적으로 낫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모습이 환자들의 기대치를 높여 황당한 요구를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양광렬씨는 "병원에 특별히 환자가 몰린다고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환자들이 허 준에 대해 저마다 한마디씩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라고 말한다. 특히 침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그는 치료 때마다 환자들이 웃으면서 '허 준은 침으로 치료하던데, 꼭 약을 먹어야 하나요'라고 묻는 통에 곤혹스러웠다고 말했다. 인터넷의 동의 보감 사이트에도 허 준에 대한 열기가 후끈하다(http:www.warpeace.com). 드라마가 방영되기 전에는 질병에 대한 처방을 문의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으나 요즘은 누구나 드라마 <허 준>에 대한 소감을 빠뜨리지 않는다. 이같은 열기를 감지한 서울 강서구청은, 허 준이 <동의보감>을 집필한 곳이라는 점을 내세워 허 준 기념관을 비롯한 문화 벨트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허 준이 뭐길래'라는 질문이 절로 나올 법하다. 전문가들은 1990년대 초반부터 한의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데다가, 최근 의약 분업을 둘러싸고 의학계 내분이 심해지고 있는데 의사의 본분을 돌아보게 하는 허 준의 행적이 가뭄 끝 단비처럼 느껴지는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미국 위스컨신 주에 거주하는 이은준씨도 비슷한 의견이다. 미국에서도 드라마가 방영된 후 2주면 비디오를 접할 수 있어 한 회도 빼놓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 본다는 그는 "고증 문제로 논란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드라마 <허 준>이 현재 대중의 심리를 정확히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즉 '돈을 따라다니지 말라. 의술이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유의태의 교훈이 새삼 가슴에 와닿는다는 것이다.

허 준의 실제 삶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고무적인 현상이다. 허구를 사실로 받아들일까 염려하는 전문가들이 걱정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첫손에 꼽히는 예가 허 준 ·유의태 ·양예수가 삼각 관계이다. 허 준의 사랑이나 개인사야 사료가 공백으로 남아 있는 탓에 얼마든지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역사적인 자료가 남아있는 세 인물의 관계에 대해서만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 창작인지를 일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접근법이 자칫 허 준의 역사적 의의를 가릴 우려가 있다는 목소리도 높다. 전문가들은 허 준이 높이 평가되는 이유가 단순히 병을 잘 고쳤기 때문이 아니라 고유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신체의 작동 원리를 밝혔기 때문인데, 지금처럼 단번에 병을 고치는 '신의 손'으로만 부각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지적한다. 양광렬씨는 드라마 속의 허 준이 지나치게 단방 처방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든다. 다음 논란거리는 해부 장면. 스승 유의태가 시대의 금기를 개고 자신의 배를 가르도록 하는 설정은 이 드라마의 절정에 해당하는 중요한 일화이지만, 해부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당시 의학관을 왜곡할 우려가 크다고 우려한다. 해부를 금기시하던 시절이었다는 정황말고도, 허 준이 그린 인체도가 해부도가 아닌 장부도라는 점을 간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허 준이 그린 신장도는, 장부의 모습을 서구의 해부학적인 방식이 아닌, 한의학적 개념과 논리에 따라 그림으로 옮겨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스승 해부 장면, 허 준의 인체관과 맞지 않아

이같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휴먼 드라마와 의학 전문 드라마 면모를 두루 갖춘 <허 준>의 의의가 퇴색될 것 같지는 않다. 이병훈 프로듀서에 따르면, 천출에 대한 제약을 법제화한 태종 이후 첩의 소생으로 정1품에 오른 인물은 딱 두사람이다. 게다가 문무가 아닌, 당시로서는 잡술에 불과한 의학으로 정1품까지 오른 것은 이례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허 준이 어떤 역경을 겪어야 했을지는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그는 "경제 위기가 한참일 때 이 드라마를 기획했다. 한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때에 역경을 딛고 성공하는 이야기가 호소력이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라고 말했다. 허준을 부활시키려고 작정한 이유가, 단지 성공한 인물이어서만은 아니다. 그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치열한 장인 정신의 전범이기 때문이다.

전작과 달리 의학 전문 드라마를 지향한 것은 이같은 기획 의도를 반영한다. 매회 질병에 대한 치료법을 상세히 설명함으로써 시청자의 정보 욕구까지 충족시키는 일거양득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에 따라 감초 ·당귀 ·맥문동 ·생지황 등 약재 모습을 틈나는 대로 부각하고 침술 장면을 클로즈업하는 등 사실감을 높이는 데도 공을 들이고 있다. 이를 위해 제작진은 한방 자문단을 꾸렸다. 이들을 조를 짜서 촬영 현장에 나와 대본을 수정하고, 필요햘 경우 직접 침을 놓기도 한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허 준>은 영화까지 포함하면 네 번째 극화다. 영화 <허 준>(1977년)과 텔레비전 드라마 <집념>(1976년) ·<동의보감>(1991)이 전작들이다. 의학 전문 드라마를 지향했다는 점말고도, 전작이 다루지 않은 <동의보감> 집필 과정을 상세히 소개해 차별화를 꾀했다. 원작자 이은성씨가 당초 '춘하추동' 네 권으로 잡고 시작했으나 마지막 권을 끝내지 못한 채 작고했기 때문이다. 덧붙여진 부분은 선조 25년부터 광해군 7년까지 22년간. 이후 내용을 미리 보면, 31~50회는 허 준과 예진의 궁중 내의원 생활을 펼치고, 50회 이후 임진왜란과 <동의보감> 집필과정을 그리게 된다. 작가 최완규씨는 "집필때부터 허 준과 유의태의 관계를 놓고 이론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원작에 충실하자는 방침을 정했다"라고 말했다. 원작에 충실한다고 해도, 소설과 다른 점도 적지 않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의녀 예진이다. 예진은 '허 준의 사랑'을 그려갈 수 있게 하는 주요축이자, 조선 시대 의녀 제도를 소개할 수 있는 좋은 매개가 된다. 제작진에 따르면, 궁녀가 3백~4백 명 규모였고, 의녀도 70~80 명에 달할 정도로 비중이 컸는데 그동안 사극에서 이들의 존재가 조명된 적이 없다.
'예진과 허 준의 사랑'에 시청자 관심 쏠려

제작진은 새로 추가되는 대목에서 작가 최완규의 진가가 발휘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최씨는 젊은 의사들의 세계를 그린 <종합병원>, 간이역 부역장의 삶을 잔잔히 그린 <간이역>, 법조인의 인간적인 갈등을 그린 <그들만의 포옹> 등 전문인의 세계를 그려온 작가로 극적인 재미와 정보를 한데 녹여내는 기술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현재 시청자의 관심은 두 축으로 요약된다. 첫째가 유의태(이순재)의 아들 유도지(이병세)와 허 준(전광렬)의 대립이다. 유도지가 당대 최고의 어의(御醫)를 꿈꾸는 권력 지향적인 인물이라면, 허준은 세속적인 기준에 아랑곳하지 않고 심의(心醫)를 꿈꾸는 인물이다. 이병훈 프로듀서는 유도지와 허 준의 관계를 살리에르와 모치르트의 관계에 비유하고 있다. 허 준이 모차르트처럼 철없는 천재는 아니지만, 유도지에게는 아무리 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벽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유인은 허 준의 사랑 이야기다. 이 대목에서는 시청자 의견이 봇물이다. '예진(황수정)을 허 준의 첩으로 삼아 달라. 아니면 본처 다희를 죽게 하고 예진과 맺어 달라'는 의견도 있고, '허 준이 초반에 마음을 못잡은 것은 첩의 소생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비극을 대물림해서는 안된다'는 의리파도 많다. 제작진은 '등장 인물의 성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가닥이 잡힐 것'이라고 말해 끝까지 시청자의 애를 태울 작정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